예천(醴泉)은 ‘물맛이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를 증명이라고 하듯 군내 감천(甘泉)면이 있고 실제 감천이라는 샘물도 있다.
감천은 예천과 함께 물맛이 식혜와 같이 단 샘물을 말하며, 이것이 풍수지리상으로
어떤 혈에 해당되는 요지에 있으면 사람들이 건강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예천의 물이 좋다는 것은 비단 먹는 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낙동강의 큰 흐름에 경북 봉화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북 죽월산에서 시작된
금천의 세 물줄기가 만나는 삼강리(三江里)가 또한 예천에 있어서 예부터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곳이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교통의 요지가 되겠다.
삼강리는 그 옛날 사람과 물품이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 중의 하나였다.
경상남도 쪽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이 북행하는 길에 상주 쪽으로 건너던 큰 길목이었으며,
남쪽에서 배에 실려온 온갖 공물과 화물이 바리짐으로 바뀌어 깊숙한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길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또 여기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까지 연결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중앙선 철도가 뚫리기 전까지 예천은 영주와 봉화 같은 경북 광산지대에 곡물과 생필품을 대어주던
상업도시로 번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맛과 물길이 좋은 곳에 놀이문화가 없을 리 없겠다.
예천은 누구나 자라면서 가락을 저절로 깨우치는 ‘풍류의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오고가는 길손들에 대한 인심이 후하고 놀기가 좋은 곳이어서 ‘반 서울’로 불리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예천은 자긍심이 세고 단합이 잘 되어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사람들이나
그들의 가게가 발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제2의 개성’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삼강리(三江里) 주막
낙동강에 소금배가 다니고 나룻배가 강을 건너던 시절 삼강리 나루터는 사람들로 번잡했을 것이다.
이제 현대식 교량과 도로가 생기면서 소금배와 나룻배가 끊기고 그 시절의 모습은 간 데 없지만
삼강교 근처 낙동강 뚝 아래엔 길 떠나온 사람들이 요기를 하거나 고단한 몸을 뉘어 하룻밤을
보내던 옛 주막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행정상의 주소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로 흔히들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주막이라고 한다.
1900년께 지어진 삼강주막은 32년 이곳으로 시집을 와 70여 년간 이 주막을 지켜온 유옥연 할머니가
2005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버려진 채로 폐가가 되었다.
8평 남짓한 크기의 아주 작고 초라한 주막에선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스산함과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창문엔 구멍이 뚫리고 천장은 내려앉고 벽은 허물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집은 누군가 힘주어 밀면 그대로 스러져버릴 것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동화 속의 일곱 난장이나 스머프들이 살만한 작디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하나, 마루 하나로 나루터를 오고 가는
갖가지 사연들의 사람들에게 백년 가까이 휴식의 공간으로 기능하여 왔다는 생각을 하니 대견스러우면서도 안쓰럽다.
초가 두 칸 오막살이 토방을 둘렀다 / 한쪽 처마 밑으로/ 부엌을 달았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물기슭 / 내성천물 / 금천물 / 낙동강물 / 세 물이 만나 / 밤물소리 잠든다//
저 아래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 / 여기까지 와 잠든다//
소금배에는 / 소금말고도 / 간생선 /연지곤지까지 / 참빛 / 어리빗 / 속옷까지 실려 있었다//
저 아래 동래 밀양에서 / 대구 달성에서 올라온 / 한양 길손들 / 여기 와 쉰다 / 쉬다가 / 문경새재 넘어간다//
삼강 기슭 / 다부동전투 이래 / 전선이 북으로 옮겨간 뒤 / 다시 소금배들 물 거슬러 올라온다//
영감 일찍 잃은 마누라 / 서러워할 겨를도 없이 외로워할 틈도 없이 / 아이 기르고 / 술독 묻고 / 술시중 들었다//
오는 사연 / 가는 사연 / 저고리 옷고름 푼 적 없이 / 막걸리 내고 / 벼락김치 냈다//
주모 유연옥 아주머니 친정아버지 이름도 깜빡 잊었다
-고은, 「삼강 주막」-
주막은 2005년 12월에 경상북도 문화재(민속자료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예천군은 곧 슬레이트로 된
지붕을 초가로 바꾸고 시멘트 방바닥을 다시 황토로 바꾸는 등의 원형 복원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인근 마을에서 나이 지긋하신 분을 뽑아 주모로도 모실 계획도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그런 복원 작업에 선뜻 찬성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아마 삼강주막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가 묻고 낡아 느슨해지고 흐트러진 세월의 손길이 남아 있는 지금의 주막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
인위적으로 복원하는 최초의 모습보다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필요하다면 그런 건물은 옆에 따로 복제하여 지으면 될 것이다.
복원이라는 미명을 들어 민속촌에서도 볼 수 있는 ‘생경한’ 초가집 건물로 삼강주막이 힘들게 버티어온
세월의 크기를 대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주막 뒤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오며 주막에 운치를
더해준 고목 세 그루를 옛날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어린 나무로 바꾸어 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룡포(回龍浦)
회룡포는 삼강주막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에 있다.
삼강리에서 내성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야 하는 곳이다.
오랜 옛날 의성 사람들이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으므로 원래 의성포라고 불리었는데,
외부사람들이 자주 의성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여 군에서 회룡포라는 지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강이 산을 부둥켜 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돌이마을로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예천군 홈페이지에 있는 회룡포에 대한 설명이다. “한 삽만 뜨면” 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내성천의 물줄기가 마을을 동그랗게 휘감고 나가면서 한쪽 끝만 겨우 ‘육지’와 붙어있는 형상을 나타낸 말이다.
회룡포마을과 내성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비룡산에 올라가 내려다 보아야 물동이동의 의미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비룡산 중턱의 장안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회룡포의 모습은 흔치 않은 절경이다.
맑은 물과 흰 모래사장이 감싸고 있는 동그란 지형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특히 드넓은 모래사장이 눈부시게 탐스럽다.
회룡포는 위에서 본 후에 반드시 마을로 걸어들어 가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뚫린 철판을 깔아 만든 ‘뽕뽕다리’를 건너야 한다.
뽕뽕다리는 폭이 좁아 차는커녕 경운기도 건너 갈 수 없다.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니 차를 가지고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멀리 30분 이상을 돌아가야 한단다.
그래도 이 뽕뽕다리는 회룡포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통로라고 한다.
내성천의 깊이가 너무 얕아 나룻배를 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다면 마을 앞 모래사장에 퍼질러 앉아 완만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해도 좋을 것 같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회룡포에서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좋겠지만
아내와 나의 여행이란 게 아쉽게도 늘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모래사장을 잠시 거닐고 뽕뽕다리를 걸어보는 것으로 회룡포를 떠나야 했다.
예천 권씨 종택과 초간정
예천 권씨 종택을 가기 위해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들어서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자 저만큼 담 밑에 앉아서
계속 아내와 내가 탄 차를 주시하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어와 차안 기색을 살핀다.
선팅을 한 탓에 안쪽의 우리가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이내 실망스런 표정이 되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다.
“혹시 자녀분이 오기로 했나요?”
내가 짐작으로 묻자 그렇다고 하며 다시 담 밑으로 걸어가 아까와 같은 기다림의 자세로 앉는다.
도시로 나간 아들이나 딸이 오기로 한 날인데 차의 모양새가 낯설면서도 혹시나 해서 와본 모양이었다.
아내와 나는 죄송함에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생전에 서울에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의 주름진 얼굴에 겹쳐보였다.
울산에 살던 나는 바쁜 세상살이를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세월과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옛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예천 권씨 종택은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1534 -1591)가 지은 살림집이다.
그의 호를 따라 마을 입구의 표지석에는 초간종택으로 되어있었다. 권문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은 사람이다.
종택에 들어서면 높고 기단 위에 우뚝 선 육간대청의 사랑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보물457호인 사랑채는 15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사랑채를 왼쪽으로 돌면 안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안채와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오히려 작고 아담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종택의 인상은 크고 권위와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안채로 들어가기 전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주인의 사생활 공간을 보기 위한 허락도 받을 겸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이 큰집에 몇 분이나 사십니까?”
“영감하고 단 둘이 살지요 뭐. 그러나보니 풀 뽑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
그것은 수백 년 전통의 종가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때 커다란사랑채를 지어야 할 만큼 들고나는 사람들로
부산했을 종가는 연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키는 고적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종가의 뒷산을 넘어 자리한 (지금은 마을을 나와 찻길로 10여 분쯤 에돌아가야 하는) 초간정(草澗亭)은
권문해가 1582년에 지은 별채 정자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흐르는 금곡천에 가까이 자리 잡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간정은 한 여름에도 시원해 보였다.
세금을 내는 부자나무 석송령(石松靈)
감천면 천향동 석평마을에는 ‘석송령’이라 불리는 수령 육백 년의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
높이가 10미터이고 옆가지의 길이가 자그마치 32미터나 되어 324평이나 되는 넓은 그늘을 드리운다.
천연기념물 제 294호이다.
석송령은 옛날 큰물이 졌을 때 떠내려와 이곳에 뿌리를 박았다고 전해온다.
이 나무는 적지 않은 재산을 지니고 있어 세금까지 내는 부자 나무이다.
1920년에 후사가 없던 이수목이라는 노인이 죽으면서 사천 평쯤 되던 자기의 농토와 대지를
이 소나무 앞으로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석송령의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여 왔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는 이 나무 밑에서 마을제사도 크게 지낸다고 한다.
일본강점기에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 순사가 자전거에
도끼를 싣고 이 나무를 베러 왔다가 논길에 굴러 떨어져 다친 일이 있었다.
그 일본인 순사가 그때 아예 죽었다고 믿는 마을 사람도 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석평동의 영험있는 소나무’ 라는 뜻으로 석송령이라 부른다.
가지마다 받침대를 세워주고 나무 주변을 깔끔하게 단장해온 마을 사람들의 자상한 보살핌에
마음껏 가지를 뻗쳐 튼실한 모습으로 자라 석평마을의 상징물이 된 석송령은 자연과 사람이 어떻게
만나야하는지를 보여준 아름다운 인연인 듯 하다.
(2007)
'여행과 사진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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