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전적비
1950년 8월 1일 왜관에서 마산과 진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서쪽은 미군이, 왜관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동쪽은
국군이 맡는 ‘워커라인’을 설치되었다.
이어 왜관 일대의 주민들을 모두 소개(疏開) 되었고
낙동강 위의 모든 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래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낙동강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까닭이다.
반대로 인민군에게 낙동강은 전쟁의 완결을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할
선이었다. 창과 방패의 피아간에 처절한 전투와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인민군은 끊임없이 낙동강을 도하하려고 시도하였다.
번번이 실패로 끝났지만 전투가 반복되면서 늘어가는 것은
양측 젊은 병사의 죽음뿐이었다.
다부동은 옛날 다부원(多富院)으로 불리기도 했던 낙동강변의
작은 한촌이었다. 그러나 대구방어의 전술적 요충지라는 위치 때문에
이곳은 한해살이 풀포기도 제 목숨을 다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동족
살상의 전장이 된다. 인민군 3개 사단과 국군 1개 사단이 1950년 8월
초부터 달포가 넘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피아간에
각각 만 명이 넘는 병사가 전사를 하였다고 한다.
산천을 울리는 총성과 포성, 작렬하는 폭탄과 뒤집어지는 검붉은 대지,
그 속에서 온갖 아우성과 피투성이로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들이
아직도 평화로운 안식처를 갖지 못한 채 땅 속 어딘가에 웅크린 자세로
묻혀 있는가 보다. 올 봄 국방부가 경북 칠곡, 영천, 영주 일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재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들의 희생도 헛되이
한국전쟁은 평화로 귀결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정전’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대구와 춘천을 잇는 중앙고속도로의 다부동 나들목을 나오면
바로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보인다. 198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전투장비의 모형과 국기게양대가 늘어서 있는 전적관 옆에
무명용사비가 있다. 아내와 나는 잠시 그날 이곳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피아간의 모든 젊은 영혼들을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칠곡 송림사
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셔놓고 예배하는 대상물이다.
그러나 모든 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실 수 없으므로
후대에는 불경이나 작은 금불동 등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법신(法身) 사리를 모셨다. 탑은 절 안의 모든 건축물이 그렇듯이
부처님의 영험이 깃든 영적인 존재이다. 사람들이 절에 가서 탑에
합장하여 예를 올리거나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비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내와 내가 탑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다소 불경한 표현이겠지만 아내와 내게 절은 산 속에
있는 인공건축물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유서 깊은 절을 거느린 산은 그렇지 않은 산에 비해 더 큰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숲속에 가꾸어 놓은 인간의 흔적이 막막한 자연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순화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절은 산에 기대고 산은 절을 품고 있다는 표현은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런 절을 장식하는 주요
조형물로서의 탑은 어느 절에 가건 늘 아내와 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다부전적기념관을 나와 5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다, 79번 지방도로로
바꾸어 타면 오래지 않아 길 왼편으로 송림사가 나온다. 6세기경인 신라 진흥왕
시기에 창건된 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오래 된 절이면 으례 통과해야하는 진입로의 숲길이나
세심교 등의 ‘예고편’ 없이 갑작스레 등장하는 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길을 조금 지나쳤다가 되돌아오기 십상이다.
게다가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다만 돌담장만으로 찻길과 경계 지워진다.
미처 속세의 마음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절 안으로 들어서면 평평한 절 마당에
서있는 준수한 용모의 탑 한기가 첫눈에 들어온다. 높이가 16.13미터로
우뚝하고 당당하다.
이 탑 하나가 절로 들어오는 모든 ‘절차’를 응축하여 감당하고 있는 것 같다.
송림사의 탑은 우리나라에 흔한 화강암의 석탑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이다.
탑은 불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문화재의 주류를 이룬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500기의 불탑이 존재하며, 국보와 보물의
4분의 1을 탑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석탑이며 전탑은 오직 다섯 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국보 제 16호), 안동 조탑동 오층 전탑(보물 제 57호),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보물 제 56호),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보물 제 226호)과
칠곡 송림사의 오층전탑 (보물 제 189호)이 그것이다.
송림사의 오층전탑은 그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원형이 남아 있는 전탑이다. 금동제로 만들어진 상륜부까지 완벽하다.
한 변이 27cm이고 높이 6.2cm 되는 정사각형 벽돌과 이것을 반으로 나눈
직사각형의 벽돌로 쌓아올린 흑갈색의 탑신과 지붕돌은 매우 조밀하여
자그마한 흐트러짐도 없어 보인다.
1959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사리장치와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때 나온 유물들은 일괄해서 보물 제 325호로 지정되어 대구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물들 중에서 사리장치는 얇은 금동판으로 만든 가마 형상의 틀로, 내부에
초록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 안치되어 눈을 황홀하게 한다.
송림사는 평지에 있어 걷기에 편한 곳이다. 탑을 제외하곤 그리 이름난
문화재가 없어서 문화재 감상의 압박감(?)도 없어 더욱 그렇다.
나무도 당우들도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늘어서 있는 것이
마치 남도의 어느 사찰 같다.
절이 아니면 우리에게 제공될 수 없는 산책과 사색의 공간,
아내와 내가 절을 생각하는 의미는 그렇게 작은 것이지만
그 고마움은 늘 크게 간직하고 있다.
군위 ‘제2의 석굴암’, 삼존석굴
송림사 앞을 지나는 79번 지방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 한티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제2의 석굴암이라 불리는 삼존석굴을 만나게 된다.
삼존석굴은 20미터쯤 수직으로 솟은 바위 절벽의 중간 부위 못미쳐
한 7-8미터 쯤 되는 위치에 동그란 굴이 뚫려 있고 그 속에 불상 3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동굴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이 석굴은 지름과 깊이가 2미터 정도이며
통일 신라 초기 7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석굴은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액운을 물리치려는 남정네와
아들 낳기를 바라는 아낙네들의 치성터로 쓰이다가 1962년에 국보 제 109호로 지정되었다.
이 삼존석굴은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이라는 완벽한 종교 예술품이 그에 앞서는 과도기적
본보기나 선행양식 없이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가정을 품은 채
그에 걸맞는 유물의 출현을 은근히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삼존석굴은 더없이
맞춤한 유물이었다. 이렇게 하여 거칠게나마 자연암석에 새긴 마애불→천연
석굴을 가공한 석굴→인공석굴의 축조라는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계보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삼존석굴은 불교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무게는 자못 무거운 것이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팔공산자락』편 중에서 -
그러나 그 미술사적 가치가 어떠하든 일반인들에게 삼존석굴은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유적이다. 석굴 입구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참배객들 이외에는 출입을 금하라고 쓰여 있다.
그 참배객이 누구를 말하는가는 알 수 없다.
현재 ‘비참배객’들은 석굴에서 멀리 떨어진 참배단이라는 장소에서
멀리 보이는 석굴을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
안내판에는 “그동안 석굴내부를 제한 없이 공개하여 삼존석굴을
보존 관리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여 왔기 때문에” 부득이 밖에서
관람토록 하였으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참으라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지정된 장소에서의 관람이란 ‘다소 불편’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관람이 불가한 것이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문화재 사랑도 교감이 있어야 싹 트는 감정 아닐까?
삼존석굴의 보호와 관리에 여러 가지 힘든 점이야 있겠지만 봉쇄와 차단
이외의 다른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한밤마을의 돌담길
70년대 초에 유행했던 나훈아의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 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배경이 된 대중가요이다. 이젠 시멘트와 벽돌에 밀려
흔하지 않은 풍경이 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돌담길은 애처로운
이별의 순간에서조차 비켜갈 수 없는 흔하디흔한 고향의 풍경이었던가 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부산하게 쏘다니며 의식하지 않아도 기억 속에 자리
잡을 수 밖에 없는 돌담의 고샅길은 그대로 고향을 상징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가 되었을 것이다.
삼존석굴에서 79번 도로를 타면 북쪽으로 향하면 잠깐 사이에
솔숲과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에 닿는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군위면 부계면 대율(大栗)리이지만 흔히 한밤마을로 통하는 곳이다.
한밤은 대율을 우리말로 바꾼 말이지만 이름처럼 밤이 많이 나는 곳은 아니다.
밤나무보다도 오히려 감나무와 호두나무, 산수유나무가 더 많다고 한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허름한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에게
한밤마을에 대해 물어보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할머니의 안내를 따라 제일 먼저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대청(大廳)으로 향했다.
대청은 ‘군위 대율리 대청’이 공식 명칭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간결한 맞배
지붕의 건물이다. 한때는 서당으로 쓰인 적도 있으나
지금은 마을의 경로당으로 쓰인다고 한다.
벽체 없이 사방이 트여있어 한 여름에도 늘 시원한 바람이 머무를 것 같다.
대청 바로 옆에는 ‘군위 상매댁(上梅宅)’이란 사랑스런 고가가 있다.
상매댁은 한밤마을의 대성가(大姓家)인 부림홍씨의 살림집으로
250년 전에 지어져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고 한다.
휘어진 돌담길을 통해 들어서면 대문이 없이 바로 다소 복잡한 구조의
안채와 일자(一字) 형의 사랑채, 사당을 만나게 된다.
크지는 않지만 짜임새 있는 규모이다.
특히 상매댁에는 사람이 살고 있어 그렇지 않은 다른 문화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활의 윤기가 흐르고 있다. 단정한 장독대와 그 옆에
흐벅지게 핀 모란꽃은 소담스럽고 정겹기 그지없다.
대청과 상매댁을 나와서는 특별한 동선을 정하지 않고 마을의 고샅길을 훑고
다녔다. 어디를 가나 돌담이 끊이지 않는다. 집에는 물론 작은 텃밭에도 돌담이
둘러쳐 있다.
푸른 이끼가 끼거나 호박이나 담쟁이 넝쿨에 덮여 오래된 빛이 가득한 담장이
있는가 하면 근래에 쌓은 듯 미끈한 새 티가 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돌담의
높이와 너비도 각각인데다 구불구불 뻗어나간 모양새가 어느 것이나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인 양 자연스럽다.
세상의 변화에 부대끼면서 힘들게 남아 있는 돌담들이 소중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서정을 일으킨다. 돌담 밑에 핀 노란 민들레와 엉겅퀴 같은
야생화들도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많은 돌들이 다 어디에서 왔을까?
누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쌓기 시작했을까?
돌담길에 대한 감탄과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동네사람들에게 묻고 싶었지만 밭일이라도 나간 것인지
고샅길에선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대청에도 상매댁에도 없었다.
낯선 인기척에 놀란 듯한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돌담 안을 기웃거리며 다니다 집 앞의 텃밭을 가꾸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이 한밤마을에서 오래 사셨어요?”
“오래 되지는 않구 한 삼십오 년쯤 됐지. 그건 왜 묻는데?”
“마을의 돌담들이 언제 세워진 것인가 궁금해서요.”
“몰라. 내가 왔을 때 이미 있었으니까. 들리는 말로는 옛날에 큰물이 나서
산이 무너지는 난리가 있었다는데 그때 엄청나게 밀려온 돌들로
담을 쌓았다고 하던데...”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조사를 해보니 할머니가 들은 말은 사실이었다.
1930년 7월 12일 동안 비가 계속 내렸고 이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
팔공산 계곡의 강돌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밀려들었다.
집중호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과다한 벌목이 산사태의 큰 이유가 되었다.
엄청난 양의 돌의 처리 방안을 고심하던 끝에 돌담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청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돌담길의 총길이는 2km에 가깝다고한다.
한밤마을의 자랑거리는 돌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율초등학교 앞쪽으로
수령 200년의 구불구불한 노송들이 이룬 숲도 볼만 하다.
이 숲을 사람들은 ‘한밤성안’ 혹은 ‘성안숲’ 이라고 부른다.
숲 한쪽에는 화강암을 각 지게 다듬어 세운 솟대가 있다.
1966년에 세워진 이 솟대는 진동단(鎭洞壇)이라 부르며 해마다
음력 정월 초닷새날 이곳에서 마을의 평안을 비는 동제를 올린다고 한다.
작년인가 문화재청은 전국의 돌담길 몇 곳을 등록문화재로 예고 한 적이 있다.
한밤마을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 될 경우
재산권 침해를 우려하는 주민들은 문화재청에 문화재 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대신에 돌담의 보호에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밤마을 돌담길의 문화재 지정은 실현 되지 못했다.
누대에 걸쳐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의견이 어떤 정책의 결정에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군위군청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군위군의 인구는
다른 농촌 지역의 인구처럼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1986년에 44,649명 이었던
군의 인구는 1996년에는 32,831명으로, 다시 10년 뒤인 2006년에는 26,687 명
으로 줄어들었다. 피폐해 가는 농촌의 상황이 군위군이라고 피해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밤마을에도 해묵은 돌담 안에 버려진 폐가가 가끔 눈에 띈다.
절박한 생활의 문제를 대면하고 살아가는 주민들 앞에서 돌담길의
서정과 정취를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스런 행위가 될 지도 모른다.
한밤마을의 돌담길에서 한가지 상식적인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사람이
보호되지 않는 곳에서는 자연도 문화재도 보호되기가 힘들다는 사실 말이다.
가을이 오면 발갛게 익어가는 감나무와 산수유 아래 돌담길을 보러
다시 한밤마을에 가고 싶다.
어떤 사정이건 돌담길이 부디 오래 남아있기를 빌 뿐이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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