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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15 -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안동

by 장돌뱅이. 2013. 1. 11.

“안동을 제대로 보려면 얼마동안 보아야 할까?”
차로 이동하는 도중 아내가 물었다.
흔히 경주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등 역사적 깊이나 물리적 규모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유적지를 여행할 때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다.
아내에게 안동도 그런 곳인가 보았다.
안동은 경주보다 지정된 문화재가 많은 곳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 질문은 대개 대답을 구하려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돌아보기에 안동이 너무 크고 넓다는 감탄사라거나
푸념이라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언젠가 캄보디아 여행기를 쓰면서 나는
한 소설가의 글을 인용한 적이 있다. 아내의 질문이나 감탄 혹은 푸념에
나는 그 글을 다시 상기 시켰다. 

   하루에 볼 수도 있고 한 달 동안 볼 수도 있다고.
   천년의 시간이란 그런 것이라고.
   때로는 무의미하고 때로는 삶을 걸 수도 있는......

아내와 내게 여행은 즐거움이 가장 큰 목적이지만 국토의 곳곳에 서린
장구한 세월의 깊이와 그 속에 녹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온갖 사연은
결코 쉽게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
경이와 신비와 황홀함이 가득한 그 바다 앞에서 아내와 나는
해변의 조약돌 하나를 손에 쥔 철부지 아이들처럼 종종 작아지곤 했다.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다는 안동에서
“어제의 햇볕”도 “익는 오늘”도 제대로 살펴봄이 없이
그저 잠시 다녀갈 뿐인 아내와 내게 안동은
정말 얼마동안 보아야 하는 곳일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번이 마지막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부처, 제비원석불
안동의 이천동 태행산 기슭에 자연석을 이용한 거대한 석불이 있다.
보물 제115호로 ‘안동 이천동 석불’ 이라는 공식 명칭보다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한다. 국도와 가까운 지점에 우뚝 서 있어
못보고 지나치기가 오히려 힘들다.
돌부처는 11 미터의 높은 자연 석벽에 선각으로 몸체를 새기고
그 위에 높이 2 미터의 바위에 얼굴을 따로 새겨 얹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논산의 은진 미륵
다음으로 키가 크다고 한다.

옛날 지금 돌부처가 있던 자리에 제비원(燕飛阮)이라는 일종의 여관이 있었다.
주인에게는 ‘제비 연(燕)’ 자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는데, 마음 착하고 불심이
깊었던 딸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연미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이 불상의 인상에 대하여 “근엄한 절대자”가 아니라
“어떤 때 보면 옛 제비원 주막에 계셨을 주모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산신 사당을 지키는 무녀 같기도 하다” 고 했다.
아내와 나로서는 아무리 보아도 이곳 돌부처에서 주모의 모습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석굴암 본존불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위엄과 경외감에 비해서는
친근감이 있게 다가왔다. 

   보라색 황혼빛이 은은하게 비껴 있는 안동 제비원 석불을 멀리서 바라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마음의 울렁임을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바람에 보오얗게 석삭은 화강석 살결 위에 시시
   각각으로 변화를 일으키면서 혹은 보라색으로 혹은 연분홍색으로 환하게
   피어나는 너그러운 얼굴은 아마 누구의 기억에도 영영 잊혀지지 못할 것이다. 
   (……) 이러한 마애불이나 석상은 한국 도처에 남아 있지만, 이 여래상이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사로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부처님의 모습과 숨결이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 스스럼이 없는 까닭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백성들의
   선의와 몸짓과 동떨어지지 않은 너그럽고도 정다운 모습이 석양 놀에 비칠 때
   향수에 젖는 인간들이 선의가 아마 이 부처님의 얼굴에 거울처럼 옮아가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
                                                                 
-최순우의 글 중에서 -

빼어난 답사기나 여행기를 읽다보면 그 장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는 듯한
기쁨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제비원석불을 바라보며 읽어보는 최순우의 글이 그랬다.
글을 읽는 동안 종교적 신심(信心)이 없는 내게 두 개의 돌덩어리로 이루어진
조각물로만 보이던 석불이 어떤 감정을 가진 생명체로 느껴진다.
그렇듯 세상엔 참으로 ‘고수(高手)’들이 많다
한번쯤 최순우의 글을 좇아 제비원석불을 바라보며 ‘보라색 황혼빛’ 속에
서있어야 할 일이지만 애석하게 아내와 나의 여행이란 게 일상의 틈을 간신히
벌려놓은 것이다 보니 늘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무엇이건 제대로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겸손하라. 겸손하라. 여행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천등산 봉정사(鳳停寺) 

봉정사는 682년 영주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려 보내 이 ‘봉황이 앉은(鳳停)
자리’에 절을 지어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연초록의 숲길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이어지고 그 끝에서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면 봉정사의 강당이자 출입구인 덕휘루(德輝樓)가 있다.
봉정사의 대웅전은 강당인 덕휘루 아래쪽으로 난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같은 의상대사가 지어서 그런지 어째 절의 입구가 부석사와 좀 비슷한 것도 같지?”
부석사의 무량수전으로 오르기 전의 안양루를 떠올리고 하는 아내의 말이었다.  

 

굵직한 나무 기둥으로 떠받쳐진 덕휘루는 앞 쪽에서 보면 2층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누각은 당연히 2층이고 1층은 나무 기둥과 돌 축대가 드러난 채로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다.
덕휘루의 하중을 견디는 임무는 나무 기둥이 맡고 축대를 구성하는 돌은 다만
장식물 같아 보였다. 크고 작은 자연석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입구 좌우의
벽면을 채우며 나무 기둥의 해묵은 빛깔과 잘 어울렸다. 봉정사의 덕휘루는
일반인들도 올라갈 수 있다. 신을 벗고 올라 누각의 난간 가까이 앉으니
숲에서 불어오는 달디 단 바람이 시원스레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들머리가 ‘부석사와 비슷하다’고 아내가 말했지만 봉정사는 부석사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부석사가 백두대간의 산 능선을 무량수전의 아래까지 끌어들인
장대한 스케일의 호쾌함을 가졌다면, 봉정사는 천등산(天燈山)의 품속에 잠긴
다소곳하고 아담한 절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절의 앉음새와 분위기가
아내와 내게 주는 경건함과 그에 따르는 감동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극락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유명하다. 간결한 맞배지붕 으로 깔끔하고 야무져 보이는 건물이다. 정면에만
문이 있고, 좌우 측면과 뒷면에는 문이나 창이 전혀 없는 점은 특이해 보였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극락전은 너무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어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
어른스러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옛 건축물에 대한 전문적 소양을
가지고 있지 못한 아내와 내게 특별한 감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누구나 크고 작은 한계를 절감하며 다니는 것이 여행일 것이다.  

 

 

봉정사에서 아내와 내가 좋아했던 것은 대웅전 앞의 마당이었다.
부석사에서 무량수전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바라보는
풍경이 깊은 인상을 주었듯이, 봉정사에서도 대웅전을 등에 지고 바라보는
마당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징검다리 같은 편평한 납작돌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텅 빈 마당에는 여유로움과 고요함에 정연함까지 더해져 퇴색한
대웅전의 단청처럼 세월이 어루만진 원숙함이 드러나 있는 듯 했다. 

봉정사 대웅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요사채를 지나 언덕으로 돌계단을
오르게 된다. 영산암(靈山庵)으로 가는 길이다. 영산암은 봉정사의 부속 암자로
1989년에 만들어진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장소이다.  

 

 

극락전 옆에 있는 것을 옮겨 왔다는 우화루(雨花樓) 는 영산암의 정면을 막고
서 있으나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우화루 밑으로 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법당과 요사채 등의 건물이
ㅁ자형을 이루며 작은 마당을 감싸고 있는 아담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마당에는 크고 작은 나무와 화단이 있어 절집이라기보다는 마치 일반
여염집이나 이름난 한정식집에 들어온 느낌이 난다.  

법당인 응진전 옆에 산신과 칠성, 그리고 말세 중생에게 큰 복을 내린다는
나반존자(那般尊者)를 함께 모신 작은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아내와 나는
이제까지 본 삼성각 중에 가장 예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금계 마을의 학봉종택  

봉정사를 나와 하회마을로 가는 길에 만만찮은 솟을대문의 양반집이 하나 보였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시간을 쪼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대문의 한 가운데
“학봉선생구택 (鶴峯先生舊宅)”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학봉 김성일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종가였다 

 

학봉은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총애를 받은 제자였다.
퇴계가 어린 학봉을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아이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고
극찬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고 한다. 학봉은 학문이 깊고 넓어 수많은 제자가
따랐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임금에게도 직언을 하였고 외국사신으로 가서도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안동 지역 이외의 일반인들에게 학봉은 그 학문적 성과보다는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과는 달리 전쟁의 기미를 보지 못했다고 조정에 잘못 보고하여
전쟁에 미리 대비하지 못하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학창 시절 국사선생님이 우리나라 당쟁의 폐해를 말하면서
그 전형적인 예로 들던 사건이기도 하다.
(모든 민족과 나라에 있는 당파와 당쟁을 마치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특별한 민족성인양 강조하는 것은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열등의식일 뿐이다.) 

 

하지만 학봉은 전쟁의 위험성을 너무 강조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렇게 말한 것으로 실제로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관군을 추슬러 전선에 앞장서고,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다. 1593년 그는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학봉종가는 안동 명문가로서의 당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우뚝이 솟은 대문 안으로 넓은 마당과 지붕을 맞댄 기와집들의 배열이
발걸음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마당에 깔린 초록의 잔디를 두고는 아내와 의견이 엇갈렸다.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옛집에 어울리지 않는 생경함을 지적하자 아내는 약간의 변모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냐며 잔디마당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런 해묵은 정취와
사연이 있는 고가에서 하룻밤쯤 잠을 자보고 싶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이상향의 옛고향, 하회마을

하회(河回), 우리 말로 물돌이동은 문자 그대로 강물이 돌아가는 마을이다.
남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큰 원을 그리며 마을을 휘감고
돌아간다. 풍수상으로 태극형이라고 하여 큰 인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한다.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용과 그의 형인 겸암 류운룡이 가문을 크게 일으킨 이래
풍산 류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하회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충효당과 양진당, 남촌댁과 북촌댁 등의 규모 있는 양반
집들이 대체적으로 마을 중심에 있고 그 바깥쪽에 초가집이 자리하고 있다.
200여 채의 고가 중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절반씩이라고 한다. 

 

나날이 식당과 숙박업소로 변신을 해가는 집들이 늘어가고 있는 하회마을의
모습에 조금은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치 조선시대로
먼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 한 느낌이 들기 충분할 정도로 기와집과 초가집의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하회마을에선 이리저리 미로처럼 뻗어나간 고샅길을 천천히 걷는 재미와 맛이
으뜸이다. 진흙과 돌을, 진흙과 볏집을 썰어 넣은 흙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최근에 들어 황토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모습들을 볼 수 있지만 이미 그것은 옛 마을에서 실현되었던
생활 방식이었다. 그것은 향수 어린 옛 문화가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생태가치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이 낮은 담장 사이로
완만하게 굽어진 골목길 자체만이 아닌 것이다.  

골목길을 벗어나 마을 바깥쪽을 돌며 노송 사이로 보이는 흰 모래밭과 푸른
강물이 만들어내는 풍광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하회마을의 아름다움이다.


서원 건축의 최고봉, 병산서원

병산서원(屛山書院)은 하회마을로 들어가기 전 왼쪽 길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병산서원은 이번 여행길에 방문하지 않았다. 작년 겨울 오직 병산서원
한 곳만을 보기 위해 아내와 여행을 떠났었다. 옛 건축에 대해 아는 바는
없으면서도 왠지 하회와 병산서원을 한꺼번에 보고 기억하는 것은
내 자신의 용량이 부족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10리 길을 두고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작년 우리가 갔을 때는 길 폭이 넓어지고
포장공사가 진행 중인 듯 어수선해서 그리 걸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불쌍하게’ 차를 몰고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고수 답사자(여행자)의 답사(여행) 방법은 흉내낼만하다.
그것은 대상을 보는 효과적인 방법이나 시각을 말하며
그 과정을 통하여 올바르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방법에선 실패했지만 병산서원을 감상하는 방법은
유홍준의 방법이 여전히 유효했다. 그것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라”는
것이었다. 병산서원을 밖에서 보는 것과 그곳에 기거했던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전자가 그저 아름다운 강변에 지어진 옛 건축물이었다면 내부 입교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서원에 기거하며 공부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병산서원이 물돌이로 돌아가는 낙동강과 그 강 건너 병풍처럼 마주한
병산(甁山)과 하늘이 만드는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됐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저절로 깨닫게 된다.
만대루에 앉아서 사원의 내외부를 바라보아도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운영의
   활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고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 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
   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중에서 -
 

 

시각을 바꾸는 간단한 전환이 이런 즐거움을 주듯 때로는 간단한 충고가
정곡을 찌를 때가 있다. 병산서원에서 보는 즐거움, 역시 긴 말이 필요치 않다.
가라! 가서 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2007)

*2010년 여름 하회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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