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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 여행기16 - 다시 흥인문(興仁門)에서

by 장돌뱅이. 2013. 1. 17.

서울에 바치는 반성문
20여 년 전, 회사 '쫄따구' 시절 회사를 방문하는 외국인 손님의 영접을 위해
공항으로 나가는 일은 나의 업무 중의 하나였다. 손님의 영문 이름을 커다랗게
써넣은 종이를 들고 (당시 KBS에서 주관한 이산가족찾기 행사가 절정을 이루던
무렵이어서 나는 이 종이를 ‘이산가족찾기 팻말이라 불렀고 그런 나의 업무를
'양놈 딱까리'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공항 도착 출구에 서서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동안, 나는 손님이 사는 나라와 손님의 얼굴에 대해 상상을 해보곤 했다.

그런 상상은 대개 괜스레 냉소적이면서도 사실은 부러운 감정을 동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손님이 사는 나라의 부유함과 선진성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자유롭게(?)
먼 이국땅을 왕래할 수 있는 그의 삶에 대한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해외여행에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자유로웠다고
할지라도 아직 직장의 풋내기인 내게 주어질 해외여행의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겠지만.

일상적으로 외국인을 만나지만 그것이 ‘홈그라운드’에서일뿐 ‘어웨이’로 나갈 수
없었기에 먼 나라에 대한 나의 갈망은 여타의 사람보다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뒤 인도네시아 근무에 대한 제의를 받았을 때 짧은 고민 끝에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런 심리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은 흡족했다. 무엇보다 아내와 딸아이가 좋아했다.
처음 대면하는 이국적인 풍물 하나하나에 아내와 딸아이는 신기해했고, 아내의
집안일을 도와주는, 중부 자바(JAVA)의 솔로(SOLO)에서 온 “까니”라는 이름의
가정부와도 잘 어울렸다. 딸아이는 특유의 명랑함으로 오래지 않아 인도네시아
동요를 부를 줄 알았고, 등하교 길에 운전사에게 거꾸로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건기 우기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한결 같이 덥기만한 날씨도 별 문제가
없었다. 사철 실외수영을 즐길 수 있었고 점차 집 주변 현지 식당의 맛난 음식을
찾게 되면서 그곳의 직원들과도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왔다. 시간이 지나 계절별로 나오는 과일의 종류까지 알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은 익숙해져 갔지만 거꾸로 한국에 대한 향수도 깊어졌다.

다양하게만 느껴졌던 열대의 과일의 종류와 맛에 대한 호기심이 거짓말처럼
시들해지고 (따지고 보니 가짓수에서 한국의 과일이 결코 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걸핏하면 눈에 들어와 열대지방의 상징처럼 보이던 야자수의 잎이
헝클어진 더벅머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과 휴가기간이면 멀고 가까운 곳을 찾아 차를 몰거나 가끔씩은 생활 경비를
쪼개 비행기를 타고 좀더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에 인색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한국에 대한 갈증을 달래기는 힘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감정의 변화였기에
스스로 놀랬지만 이성으로는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회사의 회유와 협박(?)이 만만찮았지만 나는 마침내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을 며칠 앞두고 그곳에서 알게 된 교민들이 열어준 송별회에서
아내는
동정 어린 시선과 위로(?)를 받았다.
마치 ‘이 편하고 좋은 곳을 두고 왜 귀국을 하느냐’는 투의.
아내는 잠시 어리둥절 했지만 한국 여자들에게 시댁의 행사와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외국생활이 주는 커다란 장점이자 매력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는 회사와 지루한 실랑이를 거침없이 이겨내고 드디어 귀국을 하게 되었다.
컨테이너까지 동원하는 남들에 비해 우리 가족의 귀국짐은 단출했다.
손때 묻은 책 몇 권과 테니스 라켓 세 자루가 전부였다.
우리는 외국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즐겁게 돌아왔다. 

 인도네시아에서 귀국한 뒤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국토여행에 나섰다.
내 나라의 풍경에 대한 누적된 갈증을 풀기위해 우리는 떠돌아 다녀야 할 곳을 서둘러 찾아야 했다.

그 첫 여행지는 경주였다. 우리는 반년이 가깝도록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에 울산에 거주를 하였기에 차로 한 시간 미만의 거리에
있는 경주는 흥미로운 역사와 사연, 무궁무진한 볼거리가 어우러진 최고의
여행지였다. 아내와 나는 토요일이면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딸아이의 하교를 기다렸다가 바로 경주로 향하곤 했다.  


다시 만난 국토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숨 쉬는 공기의 맛까지 달랐다.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에는 없던(우리가  ‘적토마’라고 부르던) 
자가용까지 마련하여 우리의 여행길을 더욱 자유로워졌다.
우리는 마치 체계없는 남독(濫讀)으로 이책저책을 해치우듯  경주를 넘어
국토의 이곳저곳을 바쁘게 쏘다녔다.
국토는 한 없이 넓고 깊은 세상이며 거대한 우주였다.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국토는 아름다웠고 곳곳에 스며있는 
해묵은 사연들에 가슴은 절절해왔다.

더 먼 곳으로, 더 낯선 곳으로. 좀 더 진한 자극을 찾는 중독자처럼 그때
우리의 여행은 가급적 사는 곳으로부터 더 멀고 낯선 곳을 향해 있었다.
자동차의 마일리지를 올릴수록 더 좋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흡족해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게 되었다.
꼭 여행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그렇게 되었다.
여행은 다녀오면 저절로 쓸거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한 달에 두 번의 글을
올릴 수 있는 쉬운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행은 좀 더 규칙적인 일상이 되었다.

적어도 고료를 받고 여행글을 쓰는 만큼 ‘뽀대’나는 여행과 글을 위해
좀 더 멀고 낯선 곳이 필요했다. 아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남들이
안 가본 곳이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은
일종의 허위의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울산에 살 적에는 울산을 제외한 곳을 찾아다녔고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서울을 벗어난 곳을 계획하는 기이한 ‘도착(倒錯)증세’를 가지게 되었다.
공항에서 손님을 기다릴 적에는 먼 나라로의 여행을 꿈꾸고, 막상 외국에서의
생활이란 기회가 주어지자 내 나라에 대한 향수에 허우적거리는 것과 비슷한.

그런 와중에 한 동호회에서 사진을 찍는 지인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는 사진을
이야기 했지만 아내와 나는 우리의 여행을 생각하며 읽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유혹을 받는 것 같습니다. ‘작품 하나 찍어 보겠다는...’
   저는 어땠냐고요? 처음엔 사진의 해상도, 선예도 이런 화질적인 측면에 아쉬움
   이 생겼고... 지나면서 어딘가에 출품이라도 해볼 만한 그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습니다. 그래서... 참 엄한 사진들 많이 찍었습니다. 왜 그런
   사진들 있잖아요. 지하도의 걸인, 재래식 시장의 아주머니, 누군지도 모르는
   주름 깊은 할아버지들...(중략)...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유의미한
   사진이면 족하다는 것이죠. 만족을 주고 싶은 범위를 ‘대중’에게서 ‘자기자신’
   으로 팍 좁혀버리면 아주 쉬워지더군요.

어디 사진에서 뿐이랴. 그와 같은 겸손과 정직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원칙이다.
여행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특별하고 거창한 곳을 드러내 과시하는 ‘작품의’
여행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소담스럽고 행복한 시간을 나누는 매개체로서의
여행을 생각할 때 그것은 공간이동의 길이와는 상관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가까운 주변에 대한 관심과 그곳으로 가는 여행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두서없이 장황하기만한 설명이었지만 그래서 결론은 서울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에 나는 너무 무관심하게 지내왔다.
늘 시선이 서울 밖 ‘더 멀고 더
낯선’ 곳으로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내와 내게 서울만큼 최고의 여행지가 또 어디에 있으랴.
우리나라 최고의 인구 밀집지이며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자 조선의 수도로서
6백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내게 서울에 사는 우연이 주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서울은 내가 기를 쓰고 오고 싶은 ‘먼 곳’이거나
‘이국적’ 매력이 넘치는 외국의 한 도시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서울은 무엇보다 가까이 있기에 이동을 위해 도로나 하늘에서 소비하는 시간이
적고, 버스나 지하철의 대중교통만으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곳의 여행보다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여행이 된다.
넓거나 좁은 저 무수한 도로와 골목길, 높고 낮은, 낡고 새로운 건물들과
그 속에서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온갖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웅장하고
무궁무진하며, 때로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울림이 가득한 우리의 서울.
 
여행이 반복될수록 늘 여행지에 대한 공부가 부족함을 느낀다.
서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 넓이와 깊이에 비해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는
너무 왜소하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터무니없는 집착과 허위의식을 버리고자 한다면,
아내와 함께 걸으며 보았던 풍경과 나눈 이야기만을 정직하게 기억한다면
서울의 여행은 충분히 행복해지고 더불어 여행기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식과 정보는 늘 그 다음의 오는 문제이거나 또 다른 전문가의 몫이 될 것이다.

갈 수 없는 ‘절해고도’, 흥인문(興仁門)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를 하여 종묘와 사직, 궁궐을 건설한 후
곧바로 수도 방위와 치안을 위해 도성 축조를 서두르게 된다.

서울은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사산은 문자 그대로 바깥쪽에 위치한 4개의 산으로 북쪽의 북한산,
동쪽의 아차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이 이에 해당된다.
그 안쪽으로 북쪽에 백악산(현 북악산), 동쪽에 낙산, 남쪽에 목멱산(남산),
서쪽에 인왕산의 이른바 내사산이 위치해 있다.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은
바로 이 내사산을 잇는 총연장 19km에 이르는 도성을 완성하였다.  

*위 그림 : 서울 도성과 사대문(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이때에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북대문)의
4 대문(大門)과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의 4 소문(小門)을 완성하여
도성 안과 밖을 교통하게 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은 어질음(仁)을 일으키는(興) 문이다.
지금 편액에는 흥인지문 (興仁之門)이라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 때
개축하면서 바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흥인문 옆에 있는, 풍수학상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지형이 낮기 때문에 갈지(之)자를 하나
추가하여 약한 기운을 보충하였다는 것이다.

흥인문은 다른 대문이 가지고 있지 못한 반원형의 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동대문 주변의 지형이 낮고 낙산의 높이도 낮아 적의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 흥인문은 교차로 한 가운데에 외로운 섬처럼 떠있다.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 계획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철거해버린 탓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 흥인문을 에워싸고 있는 도로는 오직 밀려드는
자동차를 위한 것일 뿐이어서 흥인문은 일반인들의 방문은 물론 접근으로부터도
철저히 고립된 절해고도가 되어있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동대문(흥인문)을
자주 보고 자랐지만 동대문과 얽힌 추억은커녕 사진 한 장 있을 리 없다.
추억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보물 제1호라는
‘공인타이틀’을 지닌 문화재는 꼭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야 옳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동대문시장과 먹자골목
글이나 사진으로 옮기고 보면 여간해서는 ‘작품’이 잘 안되어도
눈으로 확인하는 풍경이나 모습 자체는 무언가 가슴 밑바닥을 울리는
감동적인 ‘작품’이 되기 쉬운 곳으로 시장만한 곳이 있을까.  

우리나라 근대시장의 효시인 동대문시장은 전성기인 19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형백화점의 공세에 밀려 그 형세가 위축되었다.
동대문시장은 1970년에 전국 최대의 시장을
이루겠다는 야심찬 계획 하에
현대식 6층 건물로 탈바꿈을 하였다. 그 의도대로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태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든 재래식 시장이 겪고 있는 적응 문제에 동대문시장도 예외는
아니라는 소문이다.


1층의 중앙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이불과 혼숫감, 양복천 등을
파는 가게들이 통로 좌우로 줄지어 서 있다.
비록 전통적인 재래시장의 분위기와 맛은 사라졌다고 해도 들고나는
오토바이들과 커다란 짐상자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시장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는 남아 있었다.

아내는 그곳에서 작은 목 베개를 하나 샀다.
이제까지 어디서 파는 줄 몰라 사지 못했던 아내는 역시 시장으로 왔어야
했다며 반가워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거기에 맞장구라도 치듯 시장에 오면
깎는 게 맛이 아니겠냐며 베개 값을 자발적으로 깎아 주었다.  

중앙통로를 빠져 나오면 만나는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나있는
비좁은 골목 안에 먹자골목이 있다. 길 이름은 대학천길이라고 하나
‘대학’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젊고 상큼한 이미지와는 다른 ‘7080’ 풍의
낡고 허름한 식당들이 밀집된 골목이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 생선을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생선구이와 닭한마리, 그리고 곱창이 이곳 식당들의 주된 메뉴이다.
아내와 나는 그 중에서 ‘닭한마리’란 음식을 먹으러 들어갔다.
종업원이 육수에 닭한마리가 든 커다란 양푼을 가스불 위에 올려놓고
떡사리와 김치, 양념접시 등을 거의 기계적인 동작으로 놓고 가면
나머지는 손님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닭이 알맞게 익었다싶으면 가위와 집게로 적당하게 자르고 고추양념과
간장, 식초, 겨자 등을 적당히 버무려 소스를 만들어 찍어먹으면 된다.
닭고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큰 불만이 없는 맛이었으나 아내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백 명은 족히 넘게 수용할만한
크기의 식당 안은 손님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서울의 몇 곳은 이런 모습으로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서울의 모든 골목이 반듯하게 정리되고 푸른빛 투명유리로 외관을
장식한 세련된 빌딩들로 바뀌어 지난 시절의 모든 흔적을 거두어
가버리면 우리는 너무 긴장 속에서만 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전태일과 전태일거리
동대문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전태일’을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울시의 청계천복원사업 초기에 청계천6가에 있던 전태일열사 분신터
표지석이 철거되면서 청계천에서 ‘전태일’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세상엔 아직 ‘전태일’을 잊고 싶은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이에 많은 시민단체와 뜻있는 인사들이 항의와 진정을 거듭하여 서울시는 마침내 청계천 6가와 7가를
전태일거리로 지정하게 되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는
기념상과 기념동판 제작 등 전태일거리 조성에
필요한 성금 모금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2005년 9월 전태일다리 (버들다리) 위에 전태일 기념상이 세워졌고 시민들의 친필이 새겨진 동판의 설치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1월에 전태일거리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건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언제 어디서 반복하여 되돌아본다하더라도
결코 진부해질 수 없는, 명징한 새벽에 영혼을 울리는
종소리 같은 전태일의 삶 -
나는 몇 해 전 출간한 졸저(拙著)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 여행』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동대문 주변을 얘기하면서 평화시장을 빼놓을 수 없고 평화시장을 얘기하면서
   전태일을 빼놓을 수 없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그는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저임금에 점심을 굶는 나이 어린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다 주고 자신은 몇 시간씩 먼
   거리를 걸어 다녔는가 하면, 그들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실태 조사와 진정
   등에 힘을 쓰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께 자신의 일터 앞 청계천 거리
   에서 분신, 끝내 사망하였다. 분신 얼마 전부터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
   한 듯한 흔적을 일기장 곳곳에 남겼다. 결코 길지 않은 그의 삶과 죽음이 기록된
   글에서는 뭉클한 감동과 종교적인 경건함이 묻어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그는 지치고 병들고 힘없는 어린 존재들을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런 그의 지고하고 순결한 사랑 위에 있음을 믿는다.
전태일거리가 탄생할 때 바닥에 깔린 동판에 그 마음을 새겨 보았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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