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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 여행기18 - 인왕산과 북악산

by 장돌뱅이. 2013. 1. 19.

호랑이가 살던 인왕산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등산로로 오르는 길은 아파트 건설공사로 부산하다.
인왕산이 지척이라고 하지만 이미 들어서 있는 고층아파트들로
하여 산의 모습은 시야에 잡히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매력이 없는 길이다.
산머리라도 보려면 좁고 특색 없는 골목을 잠시 인내하며 지나야 한다.
이 땅의 대부분의 산처럼 인왕산 역시 본래의 영역을 아파트와 상점 건물에 내어주고 자꾸 왜소해져 가는 형편이다.

 

어릴 적 인왕산 하면 내게 먼저 떠오르는 말은 “인왕산 호랑이”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인 일제 강점기에 멸종된 남한의 호랑이를 내가 인왕산에서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속담처럼 자연스럽게 한 단어로 얽힌
인왕산과 호랑이를 일상생활과 책에서 흔하게 듣고 읽어보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구한말 서울 한복판인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 주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호랑이가 가까운 인왕산에서 내려온 것이
라는 추측도 있지만 우리가 "인왕산 호랑이”라고 할 때 그 의미나 감정의 중심은
호랑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왕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왕산에 사는
호랑이’ 보다는 ‘호랑이 같은 기세의(혹은 호랑이도 사는) 인왕산’ 같은 의미가 되겠다.

사실 인왕산의 높이는 338m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의 다른 산에 비해서도 낮고 작은 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면 관악산이나 청계산 혹은 북한산에도 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청계산 호랑이’나 ‘북한산 호랑이’ 대신에 “인왕산 호랑이”
라는 말이 더 많이 쓰여 온 것은 산의 높이나 크기 때문이 아니라 화강암의 바위
능선으로 이루어진 인왕산의 우람하고 당당한 산세와 거기서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호랑이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겸제 정선이 호방한 기개와 박진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낸 걸작 「인왕제색도」는
그의 빼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부각시킨 인왕산의 매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듯 인왕산은 영감이 넘치는 명산으로 예부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매김
되어 왔다. 서울을 도읍지로 정할 때 ‘왕기(王氣)’가 서린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자고 하였던 무학대사나 임진왜란 이후에
인왕산 아래에 경희궁 (慶熙宮)을 세웠던 광해군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설혹 그런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 해도 모두가
인왕산에 서린 어떤 남다른 기운에 주목하고 인정하였던 것만은 사실이겠다.
실제로 산 아래 살았던 능양군(綾陽君)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仁祖)가 되었으니 ‘인왕산 왕기설’도 어쨌든 그 유효성(?)이 입증된 셈이다.

신경숙은 그녀의 소설 『리진』에서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긴다” 고 했다. 그녀의 말을 국토에 적용시켜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토를 여행하면서 누차 느껴온 것이지만 국토의 모습은 우리 삶의 정직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인왕산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고 우리가 인왕산에서
느끼는 점이 옛 사람과 다르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예전과 달라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국토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인왕산의 수난은 그 이름에서부터 나타난다. 원래는 인왕산(仁王山)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그 이름에 ‘日’자가 가해져 인왕산(仁旺山)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통치는 산 하나의 이름조차 지나치지 않을 만큼 집요하고 철저했던 것이다.
1995년에 들어서야 겨우 인왕산은 제 이름에 혹처럼 붙어 있던 ‘日’자를

떼어버리고 본래의 인왕산(仁王山)이란 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가 인왕산의 이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로는 군부대가 주둔하며
인왕산은 일반인들이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 이후로 93년 2월 다시 출입이
가능하기까지 우리는 25년 동안이나 인왕산을 잊고 지내야했다. 분단의 상황이
산에게 강요한 침묵이었다. 인기척이 사라지면서 세상을 맑게 해줄 인왕산의
정기도 출입금지의 살벌한 울타리에 갇혀 세상과 교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인왕산과 그 주변에 개발이란 화려하면서도 보다 강력해진
논리로 “숲을 향한 전방위적 공격”을 가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든 온갖 구조물
들이 산 정상을 향해 인왕산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인왕산은 이제 호랑이도 살지 못하고 ‘어진 왕’을 잉태하는 전설도 품을 수 없는
메마르고 건조한 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아파트의 숲을 벗어나자 인왕사의 일주문이 서있다.
일주문에 걸린 편액에는 아직 仁王山이 아닌 ‘仁旺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옛 선인의 표현을 빌자면 산이 산다워지기 위해 먼저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일주문에서 인왕사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 주변은 무속신앙의 집결처이다.
송림사, 천안사, 염불암, 미타정사 등등의 절이름을 달았지만 귀에 들려오는
굿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절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을 맨 윗자리에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국사당은 최영장군, 태조 이성계, 무학대사 등 여러 무신상을 모신 신당이다.
원래 국사당은 남산 꼭대기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목멱신사 (木覓神祠) 라고도 불렀다.

1925년 일제가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높은 곳에 있는
국사당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당하였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는 국사당의 안내판에는 “지금도 이곳에서 무당들이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지노귀굿 등을 한다”고 쓰여 있다.
아내와 내가 찾아간 날에도 무슨 굿인가가 있는 듯 무악(巫樂)소리가 요란하였다. 

국사당 바로 위에 선바위가 있다. 높이 7-8미터에 이르는 두 개의 바위가 기묘한
형상으로 나란히 서 있는 선바위는 마치 그 모습이 스님이 장삼을 입고 참선(參禪)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선(禪)바위’가 되었다. 이는 앞쪽에서보다 바위 뒤쪽에서
보아야 실감나게 느껴진다.
선바위는 또 부인들이 이곳에서 득남을 기원하는 일이 많아 기자암(祈子岩)
이라고도 부른다. 국사당이 옮겨오면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이 무속신앙과
더욱 밀접해졌다고 한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 선바위를 성 안에 두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한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두 사람 사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꿈속에 보았던 눈이 녹은 자리를 따라 성을 쌓다 보니 선바위는
성곽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에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기를 원했던 무학대사는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 다닐 것이다” 라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 기세가 작아졌다고는 하나 인왕산은 여전히 산이었다.
선바위를 지나 위로 오를수록 경사는 가팔라졌다. 오던 길을 돌아보면
남산과 사이에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산길에서 만난 초로의 한 사내는 인왕산에 집약되어 흐르는 천지운행의 이치와
기(氣)에 끌려 강원도 삼척에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며 어떤 깨달음의 경지를
기다려 수도를 하고 매일 산에 오른다고 했다.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나쁠 일은 아니었다. 

아내와 나는 산 중턱에서 방향을 꺾어 다시 인왕사로 내려와 부암동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걸었다. 가끔씩 길가에 보초로 서있는 의무경찰들이 조금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눈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네 와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출입금지를 시키던 옛날과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생겨난 사회적 즐거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감이 아닐까 한다. 정부는 국민에게
또 국민은 정부에게 예전에 비할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고, 인사를 건네는
젊은 경찰에게서 보듯 그것은 서로에게 더욱 겸손해질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 북악산(北岳山)

*북악산 탐방 안내도(출처- 북악산 서울 성곽 홈페이지)

인왕산과 같이 1.21사태의 여파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북악산이 마침내
올해 식목일을 기해 전면 개방되었다. 근 40년 동안의 갇힘에서 산도 사람도
풀려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악산 전면 개방 기념행사에서 “북악산을 막은 것도 남북관계
때문이었고 열 수 있게 된 것도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개선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거기서 비롯된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임은 여러 번 강조되어도 좋은 일이다. 대외적인 문제로 보이는 통일은
결국 대내적인 민주화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전면 개방이라고 하지만 북악산은 청와대 뒤쪽이라는 위치상 인왕산만큼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지는 않다. 원래 탐방은 인터넷과 현장 접수를 병행
하였으나 2007년 7월 1일부터는 인터넷접수가 없어지고 창의문이나 홍련사,
말바위 등의 출발지점에 직접 가서 출입 신청을 해야 한다.
(참조 : 북악산 서울 성곽 홈페이지 www.bukak.or.kr)

출입시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1회 탐방 인원은 각 출발점에서 100명 정도로 제한되어 있고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마지막 출발시간은 15:00이다.
인화물질의 휴대가 금지되고 사진도 허가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초소나
탄약고 등의 군사시설물은 촬영이 금지된다. 글로 적고 보니 백악산의 산행이
딱딱할 것 같으나 기본적인 사항일 뿐 실제 분위기는 자유롭다. 

아내와 나는 (7월 이전에 방문한 터라) 인터넷으로 신청한 뒤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창의문 (彰義門)에서 출발을 했다. 간단한 신분 확인 뒤에 목에 거는
출입증을 받았다. 산행은 북악산 산마루를 따라 이어진 서울 성곽을 따라간다.
창의문에서-백악마루-청운대-곡장-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쉼터까지 대략
4km로 2시간 30분 정도의 코스이다.
산행의 순서대로 사진과 글을 적어본다.  


*서울 성곽과 출입문(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서울 성곽에는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북대문)
의 사대문 (大門)이 있고 각 대문 사이마다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의
사소문(小門)이 있다.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한다’라는 뜻의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는
문으로 흔히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으로 부른다.
태종13년(1413) 이후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는 풍수상의 이유로 국가적인 필요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닫아두었다. 인조반정 때 인조의 편에서 거사에 가담한 군대가
이 문을 통해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가운데
홍예문은 늘 열려 있어 청운동과 부암동을 연결하고 있다.
지금의 창의문은 영조 17년 (1741)에 세워진 것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로 이어지는 길은 성벽을 따라 오르는 계단길이다.
팔백 여개의 계단이 급경사를 이루어 사람에 따라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둘 것 없이 중간 쉼터에서 쉬어 가며 천천히 걷다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정도이다.

북악산은 높이 342미터로 인왕산과 비슷하다.
경복궁 바로 뒤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부른다.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목멱산(남산)과 함께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리며 옛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내사산을 잇는 서울 성곽 안의 옛 서울은
면적 16평방km로 현재 서울의 약 37분의 1, 여의도의 2배 크기에 불과했다.  

북악산 정상인 백악마루에 서면 짙은 소나무 숲 아래로 서울 시내가 보인다.
시선을 멀리하면 남산과 청계산, 관악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이어지는 능선길에 ‘1.21사태 소나무’가 서 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외 30명의 북한 특수군이 청와대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였을 때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면서 이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자국을 남겼다. 소나무뿐인가. 피아간에 많은 젊은이들이 또한 죽었다.
분단의 세월이 남기는 것은 상처뿐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전쟁과 증오가 아닌 모든 형태의 남과 북의 만남은 선(善)이다. 

청운대에서 서울 시내는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경복궁과 광화문, 그 앞의
세종로가 직선으로 서 있다. 중국식으로 서울의 정 가운데에 궁궐을 지었다면
경복궁의 위치는 서울 도성의 중심인 지금의 종로 2-3가 근처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은 그렇게 짓지 않았다. 한사코 산의 품속에 기대어 지은
것이다. 그것은 자연 앞에 자신을 낮춘 겸손함이 있어 가능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자금성의 건물 크기로만 경복궁을 비교하여 기가 죽을 필요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대신 적어도 내사산 즉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이 감싸고 있는
공간과 같이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경복궁은 그 규모가 궐내에만 한정되는
자금성보다 훨씬 커진다. 도성 권역 전체가 경복궁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최준식의 글)

 

 

청운대에서 숙정문으로 향해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보초를 서고 있던 한 경찰이
촛대바위를 보고 가라고 한다. 전혀 촛대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하자 백악산
정상에서 보면 촛대처럼 보인다고 했다. 아내와 내가 가이드와 동행을 하지 않고
앞서 내려온 탓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
으로 촛대바위의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았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삼청각을 내려다보며 발걸음을 옮기니 서울 성곽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 나온다.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원래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숙정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문은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터라
일반인의 출입은 없었다.  

 

 

숙정문 지역은 풍수지리학상으로 음기가 강해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 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 두게 했다” 는 속설도 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쪽의 숭례문을 닫아두었던 이유도 북쪽은
음(陰)이자 수(水)이며 남쪽이 양(陽)이자 화(火)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즉 음과 수를 북돋우고 양과 화를 억제하여 가뭄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의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내와 나는 숙정문에서 말바위전망대를 경유하여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잊고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열린 4km 거리의 북악산 산행은 흥겹고 산뜻했다.
아래에 인용하는 황지우의 시처럼.


  
풍경 뻬레스트로이카
       -북악산 개방에 부쳐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크바에도 없는 산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을 제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 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르는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을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 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 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랴. 하지만, 
   제 빛깔과 향기와 이름을 되돌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아, 이제 가물면 북문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落款)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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