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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 여행기19 - 소록도

by 장돌뱅이. 2013. 1. 20.

아름다움과 아픔의 섬

소록도는 전남 고흥군의 녹동항을 마주보고 있는 섬이다.
녹동항은 고흥반도의 끝에 있어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해남의 땅끝이 육지의 최남단이라고 하지만 서해안 고속도로 덕분에
접근성 면에서는 오히려 녹동항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을 기점으로 잡을 때 녹동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를 지나 남해안 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순천 나들목을 빠져나온 다음,
벌교, 고흥을 거쳐야 한다. 그 녹동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소록도에 갈 수 있다. 
(이 여행의 시기는 2006년이다. 2011년 12월부터는  거금대교가 완공되어 이제는 차로 갈 수 있다.)
 

녹동과 소록도사이는 6백미터 남짓하여 배편으로 5분이 채 안 걸리는 지척의
거리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한센병(나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기 위해
육지와 자연적으로 격리되는 섬 중에서 기후가 온화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이
많으며, 육지와 가까워 물자를 나르기 쉽다는 이유로 소록도를 선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때 이 바다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강제와 구속의 수용소로 들어가는 악몽의 경계선이었던 셈이다.

소록도(小鹿島)는 둘레가 14km이고 면적은 여의도의 1.5배인 150만 평의 작은 섬이다.
‘작은 사슴섬’이라는 이름은 이웃한 녹동이 원래 풍수지리적으로 사슴 머리에 해당하는
지형(鹿頭)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소록도의 풍광은 그 이름처럼 아름답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지어선 솔밭에 사이로 호수처럼 맑은 바다가 보이고 들고남이
아담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흰 모래사장은 아기자기하고 더없이 정겨워 보인다.
그래서 “섬 이름이 소록도라고 지어진 것은 섬의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이 좋은 풍광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섬과 섬에 살던 사람들이 겪어온 잔인한 역사를 알게
되면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은 잠시 보류하게 된다.  

녹동항을 출발한 배가 소록도 선착장에 다가 설 때 앞쪽으로 나가보니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보건복지부 국립소록도 병원”이라고 쓴 흰 색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여느 병원과는 달리 안내 비석을 보는 마음이 왠지 묵직해져 왔다.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섬의 내력에 더하여,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한센병 환자들이
기거하며 투병 생활 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입구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방문 목적을 기록하는 간단한 절차로 입도(入島)
허가를 받아야 했다. 직원은 6시가 마지막 배니 그때까지는 나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섬의 약도와 주의사항이 적힌 안내종이를 건네주었다.
현재 원생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나의 질문에 안내소의 직원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칠팔백 명쯤 된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고 자신 없는 어투로 말했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가장 낮은 병이며 일반인의 95% 이상은 한센병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어 환자와 접촉해도 전염될 가능성은 거의 낮다.
또 환자들도 ‘리팜피신’이라는 치료약 한번 복용으로 나균의 99.99%가
살균되어 전염력을 잃는다. 한센병은 유전이 되지 않고 완치가 가능한
일반 피부병인 것이다.

현재 소록도에 있는 한센병 병력자들은 대부분 완치된 상태라는 텔레비전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 나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센병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와 편견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입구 오른쪽에 흰 색의 탑이 서 있어 다가가보니 한자로 순록탑(殉鹿塔)이라고
적혀있다. 한국전쟁 때 소록도를 지키다 순직한 사람들을 기리는 탑이라고 한다. 

탑을 나와 경사진 차도와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길 왼편으로 작고 아담한
교회가 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소록도교회였다. 깔끔한 모습에 끌려 잠시
안으로 들어가 마당을 거닐어 보았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소록도에는 천주교성당이 2개소, 개신교교회 8개소, 원불교
교당 1개소 등 섬의 규모에 비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예배당이 있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분교 2개교와 유치원과 간호보조원양성소가 각각 1개소씩 있다.
섬에 주재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택으로 보이는 집들이 도로 양편으로 많이 보였다. 

성당을 지나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제2안내소와 만나게 된다. 안내소부근은
60년대까지 철조망으로 이른바 병사지대(病舍地帶)와 직원지대로 나누어지는
경계선이었다고 한다.

병사지대의 원생에게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에는 전염을 우려하여 자녀를
부모로부터 격리시키고 한달에 한번만 면회를 허락했다. 그것도 도로 양 옆에
갈라서서 마주보아야만 할 뿐 서로 만지거나 안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불렀다.

   면회 시간은 5분간이었다. 하지만 그 5분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어른들은 철조망 너머로 먼저
   자기 아이의 건강을 확인하고 학교 성적이라든가 그간에 있었던 다른 궁금한
   일들을 묻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면 다음번엔 병사 지대의 집안
   소식과 면회를 나오지 않은 쪽 부모의 안부 같은 걸 전하고, 그리고 돌아오는
   날까지의 안타까운 당부들을 남긴다. 그러는 중간중간에도 감시 직원의 눈을
   피해 옷깃 속에 숨겨가지고 온 음식
뭉치나 용돈 따위를 몰래 건네주는 일은
   빠뜨릴 수 없는 면회 행사의
하나였다
                                                     -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수탄장을 지나면 해안선은 섬 안쪽으로 후퇴하며 오목하게 휘어지게 된다.
해안선과 소나무 숲을 사이에 두고 중앙리 쪽으로 뻗어나간 길에는 바닷바람에
실려온 마른 해초의 냄새가 가득 했다. 소나무 숲길 끝에서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으로는 병원본관을 끼고 중앙공원으로 이어지고 직진을 하면
원생거주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반인들은 더 이상 원생거주지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 

 

병원 본관 맞은 편 바닷가에는 근래에 만들어진 듯한 비석 한 기가 서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애한의 추모비’라고 새겨져 있다. 안내문에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자치권을 요구하던 원생들의 대표 84명이 병원 직원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섬의 입구인 선착장에
세워진 순록탑에서 보았듯 지난 날 이 섬에서는 병 자체의 고통보다도 사람들
끼리의 관계에서 파생된 고통이 더 컸던 것 같다. 

중앙공원은 이름 그대로 소록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공원이다.
공원과 공원 일대는 지난 날 소록도의 잔인했던 흔적이 집약적으로 몰려 있는 곳이다.
공원으로 오르는 길의 오른편으로는 1935년에 지어져 진 붉은 벽돌의 감금실과
검시실(檢屍室)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는 1935년 조선나예방법을 제정하여 한센환자의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했다.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감금실에 갇혀 갖가지
체벌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많은 환자들이 이곳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건물은 물론 건물에 사용된 붉은 벽돌이 환자들의 강제 노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니 환자들에게 가해진 이중삼중의 복합적인 고통이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모든 사망환자는 본인이나 가족의 뜻과는 상관없이 검시실에서 사망원인을 파악을
위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섬 내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 옆의 방에서는 환자들에 대한 단종수술(斷種手術)이 행해졌다. 소록도에서는
남녀 별거제가 적용되었으나 단종수술을 한 경우에 한해서 부부동거를 허용하였다.
나중에 단종수술은 감금실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모든 환자들에게 실시하는
일종의 벌칙 수단이 되기도 했다.

단종수술을 행하던 방에는 단종대라고 부르던 작업대가 놓여있어 보는 사람을
비감하게 만들었다. 사지가 온통 허물어져 나가는 심한 병세의 양성 한센병
환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생식기능 하나만은 항상 깨끗하게 보존된다는 점에서
환자들에게 가해진 단종수술은 가장 비인간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술실의 한쪽 벽에는 감금 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강제로 단종수술을 당한
환자가 쓴 시가 절규처럼 붙어 있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 이동(李東)의 시,「단종대」중에서-
 

감금실을 나와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한센병은 낫는다” 라는 글이 쓰여 있는
흰색의 구라탑(救癩?)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잔디밭과 소나무,
향나무에 남국의 정취를 풍기는 이국적인 관상수들이 잘 가꾸어져 서 있는 공원 한
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6,000여 평에 이르는 이 아름다운 공원은
일제시대 강제로 동원된 소록도 환자들의 고통스런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33년부터 10년 가까이 제4대 원장으로 재직한 일본인 슈호(周防正秀)는 재임 기간 중
강압적인 방법으로 환자들을 온갖 공사에 내몰았다. 등대와 종루, 납골당, 선착장
그리고 중앙공원이 그의 재임 시절에 만들어졌다. 슈호는 또 연간 6천 킬로의 송진
채취와 30만 장의 가마니 짜기, 1500장의 토끼가죽과 3만 포대의 숯 제조 등, 전쟁
군수 물자 조달에 환자들을 동원 했다. 강제노역과 매질을 견디다 못한 원생들은
자살을 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혹한 속에서도 원생들은 또다시 노역장으로 끌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계속된 노역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은 병세가 악화되고 상처투성이의 손발이
   궤양으로 패여 들어가고 있는데도 노역을 피할 길이 없었다. 원생들은 이제
   어김없는 노예였다. 병원 처사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비판이 허용되지 않았다.
   항거를 해볼 기력도 없었다. 기계처럼 산을 허물고 진탕을 메우고 산봉우리를
   찾아 올라가 공원을 꾸밀 거목 거석 들을 떠메어 나르곤 했다. 사또(佐藤 원장
   밑의 간호장)의 채찍 아래 원생들은 짓무른 육신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방울
   의 힘까지도 어김없이 짜내야 했다. 그 마지막 한 방울의 힘을 소모하고 나면 그
   들은 매정스런 사또의 채찍 아래 쓰러져 누운 채 조용히 숨길을 거두어가곤 했다.
                                                 
-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

슈호는 환자들로부터 기금을 강제 징수하여 급기야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매달 20일을 소위 ‘보은감사일’로 지정하여 원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하는 미치광이 짓도 서슴치 않았다. 그 날엔 “원생들은 남녀노소나 병세의 경중을
가릴 것 없이 공원 광장으로 모여와서 살아 있는 슈호 원장과 그의 동상 앞에 경례를
바치고 훈시를 들어야 했다.”

극악을 떨던 그는 1942년 자기 동상 앞에서 환자들의 사열을 받다가 한 환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없어진 그 환자는 주운 쇳조각을 갈아 만든 칼을
자신의 팔뚝에 동여맨 채 슈호를 찔렀다. 그는 경북 성주(星州) 태생의 청년 이춘상이었다. 

이춘상은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았다. 그는 법정진술을 통해
"슈호 원장을 죽인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의분에 의한 것이다.
원장이 총애하는 사또 간호장이 원장의 앞잡이가 되어 확장 공사 등 각종 사업에
동료 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켰기 때문에 원장을 살해했다. 이것이 여론화되면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 공개하여 시정을 바라고 싶었던 것" 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슈호의 동상은 일제 말 구리 공출 대상이 되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병원개원 40주년
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슈호가 단상으로 사용했다는 좌우 길이 4미터, 상하 길이 2미터
가량 되는 거대한 바위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 바위는 ‘메도 죽고 놓아도 죽는 바위’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완도에서 옮겨올 때 목도를 메면 허리가 부러져 죽고 목도를 놓으면 맞아서 죽는다는
뜻으로 당시 원생들의 참상을 상징하는 바위라고 할 수 있겠다.  

바위의 윗면에는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센병이라는 절망스런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서정적인 가락으로 생명과 건강한 삶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던 시인.

아내와 나는 한하운과 소록도에 살다간 또 다른 모든 한하운들에게 마음 속으로
깊은 위로로 함께 어느 세상에서라도 소록도에서 누리지 못한 평온과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며 그 시를 읽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피ㄹ 닐늴리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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