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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 여행기17 - 낙산에서 대학로까지

by 장돌뱅이. 2013. 1. 18.

서울 도성의 역사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 수도 방위와 인원 통제, 도적 방지 등을 목적으로 도성을 축조하게 된다.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여 한양의 산세를 살피고 왕 스스로 축성 예정지를 여러 차례 답사한 끝에 백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의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타원형의 성곽 공사에 착수하여, 1년 만인 1396년에 총연장 59,500척(19km)의 축성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고려시대의 천리장성에 비하면 그 크기가 작으나 수도를 방위하는 도성으로서는 세계에서 또 다른 유례가 없이 큰 성이라고 한다. 축성공사는 1, 2차로 나누어져 실시하였으며 공사에 동원된 총인원은 20만 명에 달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겨우 5만이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책사업이었다.

1차공사는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동안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11만여 명을 동원하여 실시하였다. 그러나 농한기를 이용하려고 공사시기를 추운 겨울로 잡은 데다, 서울 인구의 배가 넘는 대 역군을 위한 제대로 된 편의 시설을 제공할 수도 없어 동원된 역군들의 생활은 참혹하였다. 이때 부상과 동상 등으로 6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무리하게 강행된 1차 공사는 여름 장마를 넘기자 도성의 많은 부분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태조는 민심의 동요와 재정적인 문제를 염려하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차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경상, 전라, 강원도의 인부 79,000명을 동원하여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역시 49일간의 공사를 실시하여 무너진 부분을 개축하고 1차에 미완성된 부분을 완성하였다. 이때 사대문(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그리고 숙정문)과, 사소문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그리고 창의문)도 완성하였다.

이때 완성된 도성은 이후 수차례의 수축과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개축이 세종 때와 숙종 때 있었다. 특히 세종 4년(1422)에 이루어진 개축은 전국에서 3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정월 15일부터 2월 23일까지 38일간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다. 사망자가 무려 872명에 달했다고 한다.

흔히 중국의 만리장성은 그 공사 중 죽은 사람들의 길이와 같다는 말을 하는데 그와 비견할만한 일이겠다. 세상의 많은 유물과 유적은 그렇듯 이름 없는 민초들의 숱한 고난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아무튼 축성의 역사를 통하여 그 시대에 수도를 지키는 도성의 의미가 얼마나 절실하고 시급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낙산전시관에는 각 시기별 축조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태조 때 처음 쌓은 성벽은 가공하지 않은 크고 작은 자연석을 뒤섞어서 사용하였으며, 기초석에는 특히 길고 큰 돌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성벽은 대체로 수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종 때의 성벽은 중앙부가 밖으로 굽어 있으며, 돌은 장방형이나 방형으로 가공하였고, 허리 부분 위로는 점점 작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습니다. 숙종 때 쌓은 성벽은 모든 돌을 2척 사방으로 다듬어서 사용하였으며, 성벽은 수직선을 이루고, 굄돌을 전혀 쓰지 않았으며, 돌과 돌 사이가 꼭꼭 들어맞아서 빈틈이 없습니다.”

조선 말기까지 500여 년간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시설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도성은 광무3년(1899) 서울 시내에 전차노선이 깔리면서 성벽의 일부가 헐리기 시작한다.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도시계획이라는 명분으로 곳곳의 성곽과 성문이 파괴되었다. 돈의문(서대문)과 서소문은 각각 1915년과 1914년에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다. 해방 후 정치적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이 진행되면서 도성의 파괴는 심화되었다.

나라에서는 1975년부터 1981년에 걸쳐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 온전히 옛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결과 현재 원래의 절반 정도인 9.8km가 서울 시내 곳곳에 산재하여 남아 있게 되었다. 현재 성곽의 자취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은 동대문구 창신동의 낙산공원 일대, 혜화동에서 성북동에 이르는 길, 인왕산길 그리고 남산길 주변 등이다. 서울 성곽은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산에 오르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듣는 풍수지리상의 용어이다.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도 마찬가지이다.
각각 동서남북의 네(四) 방위를 지키는 신령의 상징물을 일컫는다.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은 낙산(駱山)이다. 산의 형상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 낙타산 혹은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부른다. 타락(駝酪)은 우유를 의미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乳牛所)가 이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낙산은 종로구의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과 동대문구의 신설동, 성북구의 보문동, 삼선동에 걸쳐 있다.

(오늘 날에야 낙타의 등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겠지만 그 옛날 이 땅에 낙타의 등을 본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런 이름을 붙여진 까닭이 문득 궁금해진다. 오늘 날 서울 시내 곳곳에 ‘로데오거리’라는 생소한 이국적 이름이 붙여진 것과 같은 의미일까? )

지하철 동대문역 5번 출구를 나와 이화여대 부속병원 쪽으로 향하다 보면 낙산공원이란 이정표와 함께 우측으로 난 언덕길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이내 푸른 용의 등처럼 굽이치며 길게 뻗어나간 서울 성곽(城郭)을 만나게 된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은 게 신기할 정도이다.

길 초입은 왼편으로 성곽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동대문구 창신동을 내려다보며 걷게 된다. 약간 오르막이지만 잘 다듬어져 어린 아이도 걷기에 문제없는 평탄한 산책로이다. 중간쯤 성벽에 쪽문이 나있다. 원래는 없던 거지만 복원을 하면서 동대문구 창신동과 종로구 충신동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쪽문을 통해 나가면 이번에는 성벽을 오른쪽에 두고 걷게 된다. 왼쪽으로는 서울시가 내려다보인다. 충신동과 창신동의 언덕길에는 6, 70년대식 풍경 같은 집들이 아직도 오종종한 모습으로 많이 남아 있다.
골목은 좁고 경사가 가파르다. 급경사에 집을 짓다보니 어떤 집들은 위쪽 도로에서 보면 처마가 땅에 닿을 듯 낮아 보인다.
그러나 이곳도 곧 개발이 예정되어 있는지 곳곳에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과 의견을 적은 종이들이 눈에 뜨였다.

동대문 쪽에서 천천히 걸어도 채 삼사십 분쯤이면 낙산(공원)의 정상에 닿을 수 있다. 낙산의 높이는 겨우 125미터에 불과한 낮은 산이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봉산과 북한산에서 인왕산과 남산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주요 산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지고 그 사이에 병풍처럼 펼쳐진 빌딩군들도 손에 잡힐 듯하다. 동대문 쪽에서 힘들게 산을 거슬러 올라온 성벽 줄기가 북쪽의 혜화문을 향해 구불구불 내려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홍덕이밭(弘德田)
정상 근처의 놀이광장에서 중앙광장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홍덕이밭”이라는 안내판을 보게 된다. 몇 그루의 소나무 아래에 있는 작은 밭으로 자칫 지나치기 쉽다. 안내판에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다.

홍덕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 궁중의 나인(內人)이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에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갈 때 함께 중국 선양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홍덕이는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 날마다 효종의 상에 올렸다. 8년 동안의 볼모에서 풀려난 봉림대군은 본국으로 돌아와 임금(효종)이 된다. 효종은 임금이 된 후에도 홍덕이의 김치맛을 잊을 수 없어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그게 했다고 한다.

추수가 끝나 겨울바람소리만 무성한 텅 빈 밭에서 잠시 홍덕이란 여인을 생각해 본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떠밀려 효종과 먼 나라까지 동행한 여인. 그곳에서 상전을 위해 김치를 담근 것으로만 전해지는 여인.  그녀는 어떤 사연으로 나인이 되어 있었으며 나이는 얼마였을까? 고향은 어디였을까? 먼 이국의 밤마다 무엇을 그리워하며 무엇을 꿈꾸었을까? 그녀에게 나라는 무엇이었으며 임금은 무엇이었을까? 돌아온 뒤에도 나인으로 변함없이 채소를 가꾸고 김치를 담근 그녀는 스스로 얼마만큼 행복하다고 믿었을까?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보다 기록 밖에서 이름 없이 명멸해 간 무수한 ‘홍덕이’들의 사연은 늘 풍성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살갑게 와닿는다.정사이건 야사이건 그들의 해묵은 사연들은 언제나 아내와 내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운다.
‘그들도 우리처럼 한 세상 힘들게 살다 갔구나!’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일에 좀 더 경건해져야 할 이유가 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숙소, 이화장(梨花壯)
낙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대학로 쪽으로 잡았다. 중간에 이화장을 지나게 된다. 이화장은 이승만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 1947년부터 경무대로 가긴 전까지 머물던 숙소이다.
1948년 8월에는 우리나라 초대 내각이 이곳에서 조직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이승만 찬가를 아내와 나는 아직 기억한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하여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대통령 우리 대통령
우리는 길이길이 빛내오리다

「우리 대통령」이란 노래로 박목월 씨가 작사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행사에 참석하면 학생들이 합창하곤 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4.19를 기하여 없어졌다.
그러나 강도 높은 우상화교육의 여파 때문인지 60년대 후반까지는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불려졌다.

이승만은 1875년 몰락한 양반가문의 6대 독자로 태어나 13살 때부터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20살 때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문명에 접하기 시작했다. 1904년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하버드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세영의 글에 따르면(한겨레신문1995년) “적어도 그는 1918년까지 반일 독립운동과 무관했다.”

1908년 3월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슨 격살 사건’ 때 법정 통역을 요청받은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죄를 범한 범죄자를 변호할 생각이 없으며, 내게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스티븐슨은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나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의 다행이다” 등의 망언을 일삼던 인물이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서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총리호칭을 거부하므로, 임정에서는 대외적으로 임정이 둘이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임정조직을 대통령 중심제로 개편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행세를 합법화했다."(송건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문 것은 겨우 6개월뿐이었다. 미국과는 다른 중국의 생활이 그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정은 거듭된 요청에도 상해로 복귀하지 않자 부득이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로 선출했다. 이에 이승만은 임정에게 보내던 재미동포의 자금지원을 끊어버렸고 임정은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하였다.

그는 미주와 상하이 등에서 가는 곳마다 특유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에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일으켰다. 『재미한인오십년사』를 쓴 김원용에 따르면 그는 어느 모임에서든 자기를 장으로 추대하지 않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 싸움들의 원인이 민족운동이나 단체 발전에 관한 정견 차이가 아니었고 이승만이 단체를 억압하며 재정과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심으로 일으킨 싸움”들이었다.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이란 곧 미국의 동정과 지지를 얻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언제나 무관심과 냉대를 받을 뿐이었다.” 미국의 정보(문서)는 그를 독립운동가가 아닌 ‘목사’로 불렀고, ‘이승만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당시 독립운동의 방향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었다.
이승만식의 외교적 호소형, 안창호식의 실력양성을 통한 준비형, 그리고 이동휘, 신채호, 박용만 등이 주장한 무장투쟁론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와이 ‘국민회’의 박용만을 야만적이라 비난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하며 다시는 반복하지 말라고 김구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독립운동에 어느 방법이 더 효과적이며 주체적이었던가 하는 문제는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겠다. 

이승만은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라기보다는 대통령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을 갖고 있는 '정략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본심과 노선을 정확히 파악한, 미국의 ‘한국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이세영의 글, 한겨레신문 1995  -

이러한 배경 하에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남북통일정부란 국민적 염원을 뒤로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초대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일제하 민족 반역자들의 처벌을 위한 국회 특별기구인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친일세력들과 손을 잡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기집권을 꿈꾸며 부정선거를 저지르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고 만다.

우리 현대사의 굴절과 파행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군 장교 출신의 일급 ‘황국신민’인 박정희가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군의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겠으며,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오르는 부끄러운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화장의 대문 옆에 부착된 동판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기념관”이라 쓰여 있다.
‘건국 대통령’?
그 표현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분단된 조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일 뿐이다.

복잡한 생각과 함께 이화장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밀어보니 굳게 닫혀 있다. 원래 관람이 불가한 것인지 아내와 내가 간 날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초인종을 눌러 알아볼까 하다가 아내와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

대학로(大學路)
대학로는 종로 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로터리에 이르는 1.5km의 도로를 말한다. 1985년 이 일대의 특성을 살려 문화예술의 거리로 개방하면서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아내와 내가 연극을 보기 위해 자주 찾는 거리이기도 하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그 자리에 마로니에공원이 들어서고 연극, 콘서트, 뮤지컬 등의 공연이 끊이지 않는 거리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거리공연 등이 있어 늘 활기차고 흥겨운 분위기의 거리이다.
특이한 외양의 건물과 거리를 장식한 조각물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곳이다.

대학로에 들어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샘터사 앞을 지나는데 나무에 온통 노란색 리본을 달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봤더니 오천석 씨가 지은 책, “노란 손수건”의 발간 30주년과 200쇄 출간 기념행사가 있다고 했다.
'
200쇄라......'
2년 전 우연히 아내와 함께 한 국토 여행기를 책으로 출간해 본 나로서는 그 꿈같은 숫자가 조금은 부러웠다.
“당신이 쓴 책은 언제 저런 거 하는 거야?”
짓궂게 장난을 거는 아내의 얼굴로 어느새 얇아진 저녁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성북동의 맛있는 칼국수집 "국시집"
국시집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주 작고 점잖은(?) 색상의 간판이다.
식당이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어 큰길 쪽에선 주의를 해서 보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다.
무엇이건 눈에 잘 띠게 크고 튀는 색상으로 만드는 세태에 그 작은 겸손함이 당당하고 귀해 보인다.

서울 시내에 칼국수로 이름을 날리는 집이 많지만, 국시집은 칼국수에 관한한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연륜과 명성과 맛을 지닌 집이다. 양지머리 국물에 약간의 고명과 양념장을 더한 국수인 것은 어디나 같으나 이 집의 맛은 다른 곳과 확연히 다르다. 칼국수와 더불어 아내와 내가 이 집에서 좋아하는 메뉴로는 수육과 전이 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는 날이면 늘 이 집을 가게 되어 주변의 다른 식당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삼선교(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로터리에서 혜화동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베드로병원 골목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있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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