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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0 - 오래된 서울, 북촌

by 장돌뱅이. 2013. 1. 21.

그곳에 우리들의 집이 남아 있다
서울은 기원전까지 올라가는 백제의 역사를 제외하더라도(제외할 어떤 이유도 없지만)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이래 한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육백년의 역사를 가꾸어 온 고도(古都)이다.
고난의 우리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상처 받고
왜곡되긴 하였지만, 서울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의 궁궐과 성곽을 비롯하여
지난 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왕이 거처하였던 궁궐이 아닌 여타의 사람들이 살다간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만의 특징과 정서를 반영하는 주거문화로서의
한옥이 개발에 밀려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땅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아파트로 통일 된 듯하다. 아파트는 더 이상 도시만을 위한 주거 형태가 아니다.
농촌 지역에까지 직사각형의 아파트가 파급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먼 산이 보기엔 밤에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줄 모른다 
 
  같은 시각 같은 위치, 주방에 서서 수천 명의 여자가 밥상을 차리고 
   같은 시각 같은 위치, 양변기에 쪼그리고 수천 명의 남자가 똥을 눈다 
   먼 산이 보기엔 밤에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줄 모른다 
   같은 시각 같은 위치, 소파에 앉아 수천 쌍의 부부가 티브이를 보고 
   같은 시각 같은 위치, 침대에 누워 수천 쌍의 부부가 성교를 한다 
   먼 산은 끔찍해져서 자신도 그런가 싶어 살펴보면 
   산자락에는 작은 나무들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큰 나무들이 있고 
   나무들은 서로 피하여 다른 쪽으로 가지들을 뻗어 있는데 
   새들은 저마다 다른 날개를 접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집에 들어 있다 
   어떤 산은 치솟아 있기도 하고 어떤 산은 펑퍼짐하게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산은 아예 딴전을 피우며 동그마니 있기도 한다 
   먼 산이 보기엔 아침에 수천 명의 아이들을 부려놓은 엘리베이터는 
   간밤 엎치락뒤치락하던 수천 명의 남녀들의 오르가슴을 싣고 
   낮에는 위로 위로만 솟구쳐 올라간다 
   먼 산은 그들을 보면서도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자신은 못 본다. 
     - 하종오의 시, 「고층아파트」 -

물론 우리 집도 아파트이다. 나는 편하고 안전함을 좇아 현대식 아파트에 살면서 남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한옥을 지키며 살았으면 하는 바램은 할머니집은 시골에
있어야 좋다는 발상처럼 이기적인 욕심이 되겠다.
그래도 서울의 어느 한 곳에는 개발과
보존이 조화를 이루어 직선의 콘크리트 건물 옥상과 곡선의 한옥 지붕선이
함께 하늘을
떠받들고 이어진다면 장구한 서울의 역사가 한층 더 깊고 든든해 보이지 않았을까.  

 

서울의 북촌은 그런 이유 때문에 더욱 귀해 보인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의 이북 지역, 즉 재동, 계동, 가회동, 원서동, 등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이곳은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곳이다.
‘궁과 궁 사이’의 명당으로, 그 시절에는 몇 십 채의
한옥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는 윤보선고택과
백인제의 집, 이준구의 집, 뱍홍범의 집 등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도심주거형 한옥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에서 궁을 제외하고
전통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남산 한옥마을이 있지만 그것은 인위적으로
한옥을 옮겨와 조성한 ‘마을’이고,
북촌은 실제 사람들이 주거하는 생활공간이기에 건축학
적이 아닌 정서적인 측면에서 앞선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북촌 언저리에 인연이 많다. 먼저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서면 눈에 들어오는 한 대기업의 본사 건물은
우리나라 수출을 주도하던 종합상사가 있어 무역을 처음
시작하던 초년병 시절 자주 찾던 곳이다.
그때 종합상사로부터 배운 업무와 종합상사의
업무 관행에 대한 다소의 실망이 나로 하여금 직수출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북촌을 돌아보다
헌법재판소를 지나 오르면 재동초등학교가 나온다. 재동초등학교는 1895년 고종 황제의
칙령에 의해 계동소학교로 문을 연 우리나라에선 손꼽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넓은 운동장에 흰 색의 3층 건물이 눈에 띄는 곳이다. 
 


*위 사진 : 재동초등학교의 모습

이곳은 아내와 내가 학창 시절 속해 있던 동아리에서 얼마동안 모임을 갖던 곳이기도 하다.
그 무렵 아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나의 마음 속에는 아내를 향한 남다른 감정이 의뭉스럽게 자리 잡기 시작했었다.
모임을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 질러 나올 때면 나는
늘 들떠 있었고 아내를 향하지는 않았지만 다분히 아내를 의식한
말과 웃음을 다소
과장되게 흘리곤 했었다.
아내와 나는 모처럼 찾은 재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우리들의
젊은 시절의 기억을 꺼내 보았다.
한겨울인데도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큰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오르면 왼편으로 북촌미술관이 나온다. 그 앞에 의자의 모습이 재미있다.
두 개의 얼굴상을 양 끝에 세우고 입과 입을
나무판으로 연결하여 의자로 만들었다.
다리가 아프지 않아도 앉았다 가고 싶어졌다.
지치지 않아도 쉬고 싶게 만드는 문화.
효율의 논리가 앞서는 경제만능의 시대에
예술이 할 일은 그런 것 아닐까 잠시 비약시켜 생각해 보았다.  

 

북촌미술관 위쪽의 가회동 성당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골목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북촌마을의 한옥이 나온다.
사람이 살고 있어 아무 곳이나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처마선이 날렵하게 젖혀진 한옥들을 에워싼 벽들이 골목길에
소담스런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골목은 오고가는 통로이자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고 집과 집을 연결하는
혈관이기도 했다.
아파트가 생기면서 사라진 것은 전통의 한옥만이 아니다.
 

 

그 골목에 심영미(동림)매듭공방이 있었다. 매듭은 아내가 관심이 있는 전통공예품이다.
매듭은 잘 알다시피 끈목을 사용하여 맺고 죄는 방법으로 여러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주인장은 교육 중이었음에도 아내와 나를 선선히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남자인 내가
앉아 있기에는 다소 어색한 점도 있었지만 화려한 색상으로 만들어진 갖가지 모양의
매듭에 감탄하는 아내를 보며 어색함을 눅이기로 했다.
  

가회박물관은 부적과 민화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2002년에 문을 열었다.
전시장으로 가기위해서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관람의 마지막에는 전남 나주에서 가져왔다는 녹차를 한 잔 할 수 있다.
기회박물관 위쪽에는 한국자수박물관이 있다. 북촌에서 만나는 모든 박물관은 규모면에서 크지 않고 전시 품목도 한정되어 있다.
전시품에만 주목하기 보다는 그저 한옥마을 구경의
일환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그러기에는 입장료가 3천원으로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위 사진 : 텔레비젼 드라마 "겨울연가"에 나오는 주인공 준상이네(?) 집. 

중앙고등학교는 북촌의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정문 앞 문구점에 연애인의 사진이
눈에 띄게 많아 이유를 알아보니 중앙고등학교가 연속극 “겨울연가”의 촬영지였다고 한다.
근처의 양옥집이 극 중에 남자주인공의 집으로 나오기도 했단다.

한류. 요즈음도 여전한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좀 더 치밀하게 관리 되어도 좋을 호재임이 분명하다.

중앙고등학교에서 안국동쪽으로 내려오는 계동길 주변은 ‘7080’ 시대의 모습들이 더러 남아 있다.
요즈음 세태와 동떨어진 듯한 허름한 외관의 목욕탕과

참기름집의 간판이 정겹게 느껴진다.
영진문구 앞 사거리에서 창덕궁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담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향하면 그 끝에 궁중음식연구원이 있다.
궁중음식은 텔레비전 연속극 「대장금」이 인기를
끌면서 그 다양하고 화려함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궁중음식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과 순종의 주방 상궁이었던 한희순과
그로부터 궁중 음식을 전수 받은 황혜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황혜성은 옛 문헌을 연구해가며 궁중 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정리했다고 한다.

궁중음식연구원은 “조선왕조 궁중음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1971년 황혜성에 의해 설립되어
궁중음식을 비롯한 우리 전통 음식의 연구와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아내와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도 많은 ‘장금이’들이 음식 조리 교육을 받고 있었다.

궁중음식은 약과 음식은 근본이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져
12첩 반상의 궁중 수라상은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한 상차림이라고 한다.

친절한 연구원의 직원이 내준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아내에게 나도 수라상을 받고 싶다고 말하자
아내는 수라상 대신에 TV 탈렌트 이정섭씨가 운영하는 순수 ‘서울 향토음식점’인
“종가”로 나를 이끌었다.
서울의 향토음식? 그 말이 조금 특이하고 생소하게 진 이유는
흔히 서울이란 단어가 흔히 ‘향토적’인 것과는
대칭에 있는 말처럼 사용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위 사진 : 식당 종가집 내부와 음식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기능해온 곳인 만큼 서울만의 고유한 문화적 특징이 없을 리 없겠다.
다만 서울에서 서울 고유의 음식을 맛보기 힘든 이유는 해방 이후,
특히 한국전쟁과 경제 개발기 동안 나타난
서울로의 인구집중이 서울 토박이들이 가꾸어온
음식문화의 특징들을 희석시킨 탓일 것이다.

  
그리하여 바깥인구가 늘어난 만큼, 서울 토박이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이 도시에
  
고유하게 전해 오는 생활양식도 무게가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다양한 
   출신들의 주민들이 전주와 진주의 비빔밥도, 평양과 함흥의 냉면도 서로 함께 즐기는 
   화합의 처소가 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말해 서울 토박이들이 전통 사회에서 즐기던 
   덜 짜고 덜 매운 김치를 맛보기보다는 남쪽 사람들의 짜고 매운 ‘짐치’에 가까운 김치를 
   - 그것도 멸치젓국까지 넣은 것을 - 맛보기가 더 예사인 곳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음식점에서 파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대구에서 올라온 ‘따로국밥’은 흔해도 무교동에서 
   팔던 ‘맑은 장국’은 없어졌으며 경상도 ‘추어탕’은 많아도 서울 ‘추탕’은 드물고, 육이오 
   뒤로 전국 음식점에서 파는 ‘곰국’의 이름을 제 이름에 동화시킨 ‘곰탕’은 드물고 ‘매운 
   곰탕’이 쌔고쌨으며, 생선찌개는 어디 가고 그 이름도 느닷없는 매운탕이 나왔다. 형편이 
   이런 터라 경상도식이나 전라도식의 ‘한정식’은 쉬 사먹을 수 있어도 서울식 한정식을 
   파는 밥집을 없다시피 하게 되었다. 마침내 서울은 본디 밥과 국을 더 많이 먹던 시골 
   출신 주민들이 밥보다 반찬을 더 많이 먹기 시작하고, 너비아니를 밖에 나가 새로 배운 
   대로 불고기라고 부르기 시작한 토박이들이 그 시골 이웃들의 밥상과 부엌에서 그전에는 
   못 보던 음식의 맛과 만드는 솜씨를 익히는 곳이 되었다. 
      - 뿌리깊은나무 발행, 『한국의 발견 서울』중 -


아내가 안내한 종가에서 그 서울식 ‘불고기’인 너비아니를 맛볼 수 있었다.
너비아니에는
소고기, 밤채, 잣, 대추와 참깨 등이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통북어튀김과 찹쌀로 빚은
이화주를 먹었다.
전통
서울반가의 음식맛의 특징은 자극적이지 않고 은근한 데 있다고 한다.
직원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아내와 함께 먹는 종가의 서울의 맛은 궁중음식이 과히
부럽지 않았다.


삼청동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삼청동(三淸洞)은 문자 그대로 세 가지가 맑은 - 바로 “물이 맑고 수풀이 맑고 사람들의 마음 또한 맑은”- 동네라는 뜻이다.
지금의 삼청동에도 그 ‘맑은 세 가지’가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 가지가 많은 동네임은 분명하다.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맛있는
음식점들이 그것이다. 
 


*위 사진 : 경복궁 담장길

경복궁역에서 내려 경복궁의 담장을 끼고 돌아 삼청동으로 향하다보면 길 건너편으로 수많은 미술관이 줄지어 서있음을 볼 수 있다.
금호미술관을 비롯하여 갤러리조, 갤러리
베아르떼, 금산갤러리, 갤러리빔 등등 삼청공원에 이르도록 많은 화랑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위 사진 : 삼청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줄 지어 있는 화랑들.

미술관 중 아트선재센터를 들렸다면 그 맞은편의 정독도서관을 거니는 것도 좋다.
70년대 강남 개발을 위한 시범 케이스로 삼성동으로 옮겨진 옛 경기고교의 자리에 들어선 정독도서관은 수십만 권에 이르는
장서와 만여 점의 비도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구파’가 아니더라도 정독도서관의 안마당은 동굴을 이룰 정도로
넝쿨이 무성한 등나무나무와 은행나무 아래 줄 지어 놓인 긴 나무 의자의 모습이 편안함을 주는 곳이다.  

 


*위 사진 : 정독도서관

작고 아담한 크기의 이색적인 박물관이 삼청동에 몰려 있는 것도 특이하다.
티베트박물관, 실크로드박물관, 북촌생활사 박물관, 세계장신구박물관, 부엉이박물관,
에로스박물관, 등이 삼청동길 주변에 산재해 있다.  

 


*위 사진 : 삼청동에 있는 여러 박물관

그곳 중에서 정독도서관 옆에 있는 티베트박물관을 둘러보았다.
2000년에 설립된 티베트박물관에는 불교미술, 생활용품, 복식으로 나누어져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규모가 아담하여 마치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박물관이었다.

사전 지식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티벳의 물품을 모아놓은 박물관 관람이란 자칫 무료할 수도 있었지만,
지적 욕구의 욕심을 버리고 나니 그런대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들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티벳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고 싶었던가.

아내와 나는 박물관 관람을 그 예고편쯤으로 생각하고 돌았다. 


*위 사진 : 티베트박물관

박물관을 나와 삼청공원 방향으로 길을 오르다보면 언덕 아래로 ‘ㅁ’자 형태의 옛 한옥집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옛 모습이 대견해 보인다.
 

 

 

삼청동의 끝은 삼청공원이다. 삼청동 숲길은 이름처럼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다.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깊은 맛이 난다.  

 


*위 사진 : 삼청공원과 삼청동의 '맛집'들.

삼청공원을 걸어 나왔다면 삼청동을 떠나기 전에 '맛집'을 찾아보아야 한다. 삼청동에 관한한 ‘추천맛집’이 무의미하다.
거의 모든 음식점이 추천 대상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치말이국수, 수제비, 팥죽, 두부요리에서부터 갖가지 서양음식까지 어깨를 맞댄
다채로운 음식점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어떤 이는 그래서 삼청동을 ‘강북의 강남’
이라고도 부르지만, 삼청동엔 강남의 새로운 세련됨이 지니지 있지 못한
해묵은 연륜이 
것이 스며있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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