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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2 - 강원도 속초에서 강릉까지

by 장돌뱅이. 2013. 1. 23.

 

 

 

딸아이의 동행
작년 여름 한 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은 딸아이의 사고와 행동에 크고 작은
변화를 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국의 낯선 풍물들과 서툴게 만나면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받는 (받아온) 당연한 것들에 대한 그립고 고마운
감정은 그것이 여행이 주는 상투적인 교훈이라 하더라도 소중해 보인다.

건강한 몸과 즐거운 집, 나아가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등등.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자신이 누리는 ‘당연한’ 것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조건이라는)
깨달음은 바로 그 당연함 때문에 나 역시도 종종 망각하는 것이어서 기특할 뿐이다.

딸아이가 가족여행에서 최초로 이탈 의사를 표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가을 무렵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말여행을 준비하는 아내와 내게
딸아이는 난생 처음 “이번 주말에는 내가 빠지면 안될까?”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내와 나는 잠시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딸아이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딸아이가 자신만의
생활을 갖기 시작했다는 데서 분명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론과는
달리 아내와 내겐 어딘가 좀 당황스러우면서도 섭섭한 느낌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뒤로도 딸아이는 가족여행에 줄곧 참여를 했다.
하지만 점차 선별적이 되어갔다. 우리 가족의 등반대장이라는 직책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산에 ‘게으름뱅이 언덕’(숨이 차거나 다리가
아파 더 이상 오르기 힘들 때나 그만 중간에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
바로 게으름뱅이 언덕으로 딸아이가 어릴 적 산행 중에 내가 딸아이를
독려할 때 쓰던 말이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난
뒤부터는 즐겨하던 산행도 불참이 잦아졌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딸아이는 더욱 아내와 나의 여행에서
멀어졌다. 그것은 딸아이의 성장에 더해 오로지 대학입시라는 '지상과제'에
올인해야 하는 한국적 교육환경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다만 그 속에서도 고3 때까지 매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중에 짧은
기간일지언정 온 가족이 함께 해외여행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

대학생이 되면서 딸아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족여행에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노는’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늘 바빠 보였다. 가끔씩 함께 연극이나
영화를 보거나 외식에 동참을 하는 것이 그녀가 우리에게 베푸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자신이 빠져주는 것으로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을 더욱
오붓하게 만드는데 공헌했다고 억지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던 그녀가 두 달에 한번 정도는 함께 가족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뒤였다. 여행 내내 당연히 존재하고 주어진 것들에 대한
고마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이 아니라도 대학교 3학년이라는
그녀의 나이가 그런 정도를 생각하기에 충분한 나이였겠지만 최소한도 여행이
그런 깨달음을 앞당기는 촉매작용을 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현지에서 만난 몇몇의 한국학생들과 얼마동안 동행을 하게 되면서 딸아이는
자신 역시 그곳이 초행길이고 누가 공식적으로 임명한 것이 아니었었음에도
어쩌다보니 인솔자처럼 앞장을 서게 되었다고 한다. 딸아이는 그것을 두고
어릴 적부터 방학 때마다 있었던 해외여행 경험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날마다 낯선 곳에서 보내야하는 여정이다 보니 누적된 긴장과 피곤함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동행인 간에 간혹 사소한 일에도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지친 딸아이에게는 수고로움에 비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볼거리와 찌는 듯한 날씨에 대한 동행인의 하소연이 마치
인솔자인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딸아이는 그때마다
가족여행 중 가족여행 중에 자신이 부렸던 투정과 게으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내를 했다고 한다.
“엄마 아빠도 나와 여행을 할 때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딸아이는 나보다 속이 깊다. 어릴 적부터 딸아이는 너무 수다스러운
것이 문제일 정도로 명랑했다. 여행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억지나 게으름을
피울 때도 있지만 그런 빈도나 정도는 어린 아이로서 자연스러운 수준이었다.
문제는 딸아이를 대하는 나의 서툰 태도에 있었다. 나는 불만스러움을 여과 없이
표출하여 여행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해 타인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감정과 불만을 객관화하고 그것이 주는 교훈을
내면화한 딸아이의 자세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아무튼 겨울방학 중에 자신을 생각을 밝히며 가족여행에 정기적인 동참을
말하는 딸아이 때문에 아내와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감동까지 했다. 자신의
생활 속에 그런 규칙적인 계획을 넣는다는 것은 부모가 사는 방식을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거나, 적어도 이해를 모색해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 첫 여행길, 뒷좌석에 앉아 있는 딸아이를
힐끔힐끔 실내거울로 쳐다보며 달리는 영동고속도로는 내내 행복한 길이었다.


속초의 저녁

저녁 무렵 속초의 한 콘도의 복도에 들어서자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복도 좌우로 늘어선 방에서 사람들이 저녁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나라를 삼겹살의 블랙홀이라고 그랬다던가. 돼지의 다른 부위는 남아
돌고 유독 삼겹살만 모자라다고 한다. 나 역시 삼겹살에 소주를 매우 좋아하지만
콘도의 복도에서 맡는 기름 타는 냄새는 역할 정도였다. 봄에서 가을까지 산과
계곡과 바다를 메우던 그 냄새가 추운 겨울이라 방안으로 몰려든 것이리라.
기왕지사 먼 길을 떠나 온 것이라면 좀 더 다른 먹거리를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일 터인데.

짐을 풀고 오징어를 먹으러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지 않아도 바닷가에 왔으니
횟감을 찾았겠지만 며칠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1월임에도 예년과 달리 오징어가
한창이라는 보도를 보았던 것이다. 바닷물 온도가 뜨뜻한 탓이라고 하던가.
오징어의 크기는 전체 길이가 손바닥만 하여 크지는 않았다. 횟집의 주인아줌마는
대신에 맛이 아주 달다고 했다. 우리는 오징어순대와 오징어회에 통오징어찜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속초항 주변을 돌아보았다.  

 

 
*위 사진 : 텔레비젼 연속극 "가을동화"의 무대가 된 갯배와 은서네 슈퍼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연속극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청호동
아바이마을은 이제 곧 개발로 인해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온 국토가 아파트
짓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 한 요즈음 속초의 전망 좋은 바닷가가 무풍지대로
남을 수는 없는 일이겠다.

그것이 분단의 아픈 내력을 갖고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누군들 그곳 주민에게
불편한 주거환경을 인내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개발로 인한 이익
에서  눈을 돌린 채 수도승처럼 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옛것이라고, 낡았다고, 불편하다고 지난 시기의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면
우리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위 사진 : 아바이마을 풍경

옛것과 현대것이, 낡은 것과 새것이, 불편과 편리가 어울리고 공존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에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손쉬운 개발정책
대신에 좀 더 먼 길을 내다보며 고민하고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함이 우리에게
필요해 보인다.

일본 교토의 어느 마을에서 마을의 옛길을 보존하고 옛집도 수리만 하지
부수고 새로 짓지는 말자고 마을 회의에서 결의했다는 소식은 너무 신선하고
예뻐보인다. 땅속을 파헤쳐 수천 년 전의 유물을 발굴하여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만이 선진문화적인 정책은 아닐 것이며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놓는
것만이 창의적인 축제는 아닐 것이다. 문화는 결국 삶의 모습이 녹아있는 것에
다름 아니며 참다운 축제는 삶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바이마을의
처마 낮은 지붕과 좁고 휘어진 골목길은 분단시대의 지난한 삶을 드러내는
가슴 아프되 울림이 있는, 다른 어떤 문화적인 행위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상징물이다. 

날이 저물면서 오징어잡이 배 여럿 척이 불을 밝힌 채 수평선 위에 떠있었다.
청초호의 수면에는 네온사인 불빛이 풀어져 색색으로 어른거렸다.  

숙소로 돌아와 세 가족이 둘러앉아 매점에서 사 온 화투로 고스톱을 쳤다.
고스톱을 전혀 모르는 딸아이에게 서너 판의 연습을 곁들인 강의를 한 뒤,
수업료를 받아야 한다는 나의 주장으로 바로 돈을 건 실전에 들어갔다.
점당 백 원의 사투. 그러나 딸아이가 ‘흔든’ 것을 알려주지 않는 나의 치밀함
(아내와 딸아이는 치사함이라고 하지만)에도 불구하고 이 날 저녁의 1등은
딸아이가 되었다. 딸아이가 천부적인 '타짜'의 기질이 있는 것인지 나의 강의가
'쪽집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포항

원래 계획은 이튿날 아침 설악산 입구에 있는 계곡길을 걸어 비룡폭포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게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잠든 딸아이
깨우는 일이다. 덕분에 늦어진 아침을 학사평의 순두부집에서 먹고 설악산
입구로 들어서려니 벌써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눈 쌓인 설악의 모습에
못내 아쉬웠지만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아쉬워 차를 돌려 대포항으로 향했다. 

대포항은 타지에서 온 여행객들을 위해 마련된 포구이자 장터이다.
입구에서 튀김집부터 시작되는 가게들은 서로 지붕을 맞댄 채 이어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포구를 등진 채 활어 난전이 펼쳐져 있다.
그 반대편으로는 건어물가게가 마주보고 있다. 500여 미터에 이르는
통행로에는 방문객과 그들을 부르는 횟집 주인의 목소리에 횟감을 싣고
온 차량까지 섞여 온통 북새통을 이루었다.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또 구경거리가 되어
주며 그 길을 오르내렸다.

늦은 아침 덕에 싱싱한 횟감을 보면서도 별반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
아내는 건어물상에서 오징어 한 축을 샀다. 여행지에서 그 지방 특산물을
살 때면 아내는 늘 부자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강릉으로 향하는 도중에 잠시 주문진의 한 해수욕장에 차를 세웠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다. 딸아이는 차안에 남고 아내와 나는 해변을 거닐었다.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가 밀려오는 하얀 해변은 한적했고 거칠 것 없는
푸른 수평선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또 푸르렀다.
아내와 내가 보고 싶었던 겨울바다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강릉 선교장(船橋莊) 

강릉 선교장을 바라보면 시원스럽다. 밝고 가벼운 듯 하면서도 단정하고
위엄이 서려 보인다. 영조 때인 18세기에 효령대군 11대 손인 이내번이
족제비떼를 쫓다가 우연히 우연히 발견한 명당터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풍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바라보거나 그곳에 들었을 때 무엇인가 시야가
편안하고 맑은 공기가 느껴져 숨쉬기가 상쾌한 곳이 명당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선교장이 딱 그렇다. 이름난 고찰의 본당이 대개 그런 맛을 느끼게 하지 않던가.
명당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보니 야트막한 언덕과 그 위에 병풍처럼
서있는 늙은 소나무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계급적 의미에서 옛 시대의 양반을 치켜세울 것은 없겠지만 집터의 선정과
집건물의 설계에 ‘값’만을 따지는 우리 시대의 천박한 논리와는 다른 철학적
이고 미학적인 의미를 심었던 지혜만큼은 되새김질하고 칭송해도 좋을 일이다.

   총건평이 318평에 달하며, 긴 행랑에 둘러싸여 있는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밖에 활래정까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장의 특징을 살펴보면 , 우선 전체적으로는
   일반 사대부집과는 달리 일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긴 행랑채 가운데에 사랑으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을
   나란두었다. 선교장의 또 다른 특징은 추운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지방의
   개방성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살림집은 대개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 곧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산골짜기 집과 따뜻하고 넓은 들판에 자리 잡은
    남쪽 집의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선교장 사랑채의 높은 마루와 넓은
    마당은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며, 안채의 낮은 마루와 아늑한 분위기는 사랑
   채와 대조를 이룬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릉의 옛 절터 두 곳
“폐사지에 가는 이유는?”
강릉의 폐사지 신복사터와 굴산사터를 찾아가는 길에 딸아이가 물었다.
“글쎄...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린 것들을 보며 느끼는 무상함이나 쓸쓸함?”
“비어있는 공간에 대한 상상의 매력?”
“무너진 성터나 버려져 잡초 무성한 빈집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만 폐사지
에서는 단순한 비애감만이 아닌 어떤 경건함이 함께 느껴진다고 할까?”
“무언가를 절실히 갈구하던 기도의 장소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딸아이의 질문에 아내와 나는 정리되지 않은 대답을 한참 쏟아내야 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법인가 보다. 마치 우리가 사는 이유처럼.

신복사(神福寺)터는 낮은 야산에 동그랗게 둘러쌓여 있어 아늑하다.
한 기의 삼층석탑과 그 앞에 석불좌상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석불좌상은
탑을 향해 기도라도 올리는 듯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다. 옅은 미소가
감도는 통통한 얼굴에 눈을 감은 모습이 귀엽다.  

삼층석탑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과 달리 특이하다.
탑의 중간중간에 네모 반듯한 괴임돌이 하나씩 들어가 조금 복잡한 형상이다.
그러면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양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탑돌이를 하고 잠시 말없이 절터를 걸었다. 크지 않은 절터였다.
솔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소리가 버려진 절터의
정적을 더욱 깊게 했다.

굴산사(掘山寺)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넓은 들 가운데에 서 있었다.
추수가 끝난 지 오래되어 텅 빈 들판에 우뚝 서있는 당간지주는 우람하고
튼실해 보였다. 높이가 5미터가 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은 (幢竿)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절의 표시인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을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기둥을 고정하는 일종의 받침대이자
절의 영역 표시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의 길이는 지주의 서너 배가 된다고 하니
이곳에는 매우 높은 당간이 서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옛 굴산사의 위용이
엄청났음을 추측케 한다.

실제로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847년에 창건하여 한 때 승려가 200여명에 달해
쌀 씻은 물이 동해까지 흐를 정도의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절이 어떻게 해서 사라지고 이제 이렇게 당간지주를 비롯한 몇몇 석재
유물 몇 점만 남게 되었는지 전하는 기록은 없다.  

"모든 것에 마지막이 있어 더 없이 편안해 보인다"는 노래를 부른 가수가 있다.
우리가 무너지고 사라져버려 남은 것 없는 절터를 서성이는 이유는 허허롭고
쓸쓸한 그 공간이 태어나고 성장했다간 쇠퇴하여 결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뿐인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가슴 저미는 아픔이지만 존재가
사라진 후 지나가는 바람에 길을 내줄 뿐인 빈 공간도 저토록 아름다움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우리는 그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누구나 지금도 맹렬하게 달려가는 그 마지막 순간을
자각한다면 우리가 남아있는 시간에 해야 할 일도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리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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