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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4 - 내포땅 사람들2

by 장돌뱅이. 2013. 1. 24.


세도정치와 대원군
조선 제 22대왕 정조(1752-1800)가 죽고 난 후 11살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고
이로써 경주 김씨의 이른 바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순조는 15세가 되자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하였으나 이번엔 왕비인 순원왕후가 속한 안동 김씨 문중의
세도정치가 이어져 중앙의 요직을 이들 일족이 독점하게 되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조를 대신해 안동 김씨의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회복을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8세의 헌종이
왕위에 올랐다. 신정왕후는 남편인 효명세자의 요절로 왕비의 자리에는
오르지는 못했으나 아들 헌종을 낳은 덕에 자신이 속한 풍양 조씨 가문을
잠시 권력의 실세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헌종마저 젊은 나이에 죽자 이번엔 순원왕후가 다시 재빠르게 움직여
강화도에 있던,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궁으로 모셔와
왕(철종)으로 옹립하고 스스로 수렴청정을 하며 안동 김씨 문중의 처녀를
철종의 왕비로 만들었다.

신정왕후의 풍양 조씨를 견제하기 위한 재빠른 발놀림이었던 것이다.
‘강화도령’ 철종은 왕위로 오른 지 3년 후 친정을 하게 되자, 처음에는
나름대로 백성을 구제하고 선정을 펴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의 서슬에 눌려 뜻을 펴지 못하고 서른 둘의 나이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는다.

영조의 증손자이자 남연군의 넷째 아들인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력의 왕족에 대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구걸을 하는 등 파락호(破落戶)처럼 지냈으나 마음속으로는
안동 김씨를 권력에서 제거하고 왕권 회복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철종이 죽자 그는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와 힘을 합쳐 12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조선 제26대왕 고종으로 세우고 대원군이 되어
어린 왕 대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가 없이 죽으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 경우 신왕의 생부에 대한 호칭을 대원군이라 하는데, 조선 역사상 4명의
대원군 가운데 오직 흥선대원군만이 생전에 대원군이 된 것이다.
나머지 3명은 모두 죽은 뒤에 추존되었다.

세도정치에 대한 폐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껴왔던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기치 아래
강력한 혁신 정치를 추진한다.

세도정치를 근절시키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당쟁의 뿌리인 서원을 없애려고 1871년 600여 곳의 서원을 정리하여
47곳만을 남겨두었다.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軍布)를
내게 하여 일반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을 펴내 통치규범을 다시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투를 물리치기 위해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강화하며 프랑스, 미국 등의 침략에 맞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근대지향적인 새로운 시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왕권강화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몰아
냈다고 하나 그 자신이 또한 세도정치 세력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외척 세력의 대두를 경계하여 며느리(왕비)의 간택에도 신중을 기하였으나
집권 10년만에 바로 그 며느리에 의해 실각하게 된다.


산 자의 야망을 위한 '명당', 남연군묘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에 이르는
상세한 이정표는 없었지만 덕산에서 아무에게나 물어도 잘 알고 있는 터라
찾아 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묘 바로 아래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게
도로도 잘 닦여 있었다.

남연군 묘의 지세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묘를 등지고 2개의 석주(石柱) 사이에 서서 앞을 내려다보면
탁 트인 전망 속에 멀리 펼쳐진 예산의 들판이 매우 통쾌할만큼 시원하다.
그 느낌만으로 아내와 내가 풍수지리에 대해 아는 것이 배산임수(背山臨水)요,
좌청룡, 우백호뿐이라 해도 그곳이 좋은 자리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안동 김씨 세력에 눌려 절치부심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흥선군 이하응은 가슴 속에 늘 권력에 대한 야망을 품고 지냈다.
남연군의 묘는 그런 그의 야망이 부친의 넋과 함께 묻혀 있는 곳이다.

남연군이 죽은 후 어느 날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주었다(혹은 흥선군이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찾아 달라고
했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
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이 택한 것은 가야산이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가야사라는 절이 있다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우선 가야사 근처로 이장을
한 후 기회를 엿보다 가야사의 중들을 내쫓고 불을 질러 가야사를 폐사로
만들었다. 대원군의 나이 불과 26세 때의 일이라고 하니 집요한 그의 야망이
무섭게 느껴진다. 어쨌든 부친의 묘를 이장한 뒤 흥선군은 17년 뒤 아들을
고종으로 만들 수 있었고 자신은 대원군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까지 2대의 천자를 본 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묘의 조성에 얽힌 내력처럼 그 뒤에 전개된 우리의 역사 역시 유쾌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명당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장소였다. 2명의
천자를 낳았다고 하지만 묘 자체가 다른 사람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나아가 일제의 침략에 나라마저 망국에 이르는 치욕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1868년 프랑스 신부 페롱과 미국인 자본주 젠킨스의 후원을 받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인 모리배 2명을 포함한 유럽인과 동남아인,
중국인등으로 구성된 도굴단을 구성하여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덕산군의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밤을 이용하여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묘를 감싸고 있는 강회 때문에 도굴이 여의치
않고 구만포에 매어둔 자기들의 배가 썰물에 갇힐까 걱정이 되자 철수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고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이제 남연군묘를 찾는 모든 사람은 대원군의 야망과 묘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죽은 이의 영혼은 편안한 잠을 방해받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진정 혼탁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의 권위를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다면, 그리고 더불어 외세의 침략에 위태로운 나라를 구해내고자
했다면, 죽은 부친의 안식까지 깨뜨려야 가능했던 명당에 대한 집착 대신에
좀더 다른 방법으로 그 지혜를 찾아야 했다는 생각이다.  

삶이 가꾸는 명당
옛사람들에게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였다.
사람의 몸에 피가 흐르듯 땅 속에도 일정한 경로로 지기(地氣)가 흐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땅의 기가 왕성한 곳에 터를 잡아야 길(吉)하고
복(福)한 일들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큰 인물의 탄생에 붙여지는 흔한 수사구인
“무슨무슨 산의 정기를 타고 난......”이라는 표현도 이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름하여 풍수지리(風水地理)이다.

풍수지리의 풍(風)은 기후와 풍토를, 수(水)는 물에 관한 모든 것을 가리키고
지리(地理)는 이들을 평가하는 과학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람이 자연에
적응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려는 생각으로 기원전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풍수사상은 우리나라에 건너와 우리의 산천에 맞게 토착화 되었다.

일테면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양) 만일 ‘높은집’(양)을 지으면 반드시
쇠퇴한다”하여 궁궐도 일반 백성의 집도 2층 이상으로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반영한 것인데, 이러한
생각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정원에서 도자기 등의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일관되게 견지되어온 철학이기도 했다.

풍수지리는 크게 도읍이나 군·현 또는 마을의 터를 잡는 양기(陽氣)풍수,
집 등의 터를 잡는 양택(陽宅)풍수, 묘터를 잡는 음택(陰宅)풍수의 셋으로 나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이 확립되면서 효(孝)가 강조되어 음택풍수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땅 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얻는
생기는 산 사람이 얻는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하며 이것은 그대로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속의 시신이 길기(吉氣)에 감응하면 그 자손이
복을 누리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과 가문의 부귀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풍수지리의 적용이
성행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 바
‘명당’이 나타난 경우, 남에게 빼앗길까 부모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깊은 밤중에 몰래 묻거나, 권력의 힘으로 약한 사람의 무덤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남의 무덤에서 시신을 들어내고 자기 조상의 뼈를 묻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이에 실학의 거두인 다산 정약용은 잡술로 변해버린 듯한
풍수지리를 비판하면서 “내가 죽으면 뒷동산에 묻고 지사(地師) 따위에게
좋은 터를 찾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앞서 말한 바, 풍수사상은 허무맹랑한 사술(詐術)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살고자했던 선조들의 심오한 지혜이자 철학이었다. 풍수에서
땅을 보는 안목이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것을 ‘개안(開眼)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땅의 생기가 뭉쳐있는 올바른 혈을 찾는 기능적인 행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땅 어느 상황에서건 올바른 삶의 자세를 견지하여 그곳을
복된 땅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정신의 올곧음을 말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좋은 터를 얻으려면 선을 베풀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풍수의
가르침이다. 스스로 음덕을 베풀지 않은 자는 결코 명당을 찾을 수 없고,
찾는다하더라고 오히려 해만 입게 될 뿐이라고 한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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