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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5 - 부여

by 장돌뱅이. 2013. 1. 25.

READ BETWEEN THE LINES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까지 폭넓은 국제관계를 유지하며 왕성한 국운을 자랑하던 백제는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에 700년 가까운 역사를 접고 멸망했다.
마지막 12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泗沘, 지금의 부여)는 한 때 가구 수가 무려 13만호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백제나 부여에 걸맞은 유물이나 유적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기록으로 전해오는 백제의 옛모습도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다.

단순히 망국(亡國)이기 때문이라면 고구려도 신라에 망했고, 그 신라 역시 고려에 망했지만 백제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르다. 보통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기억하는 백제의 모습은 의자왕, 황산벌, 계백장군, 낙화암, 삼천궁녀 등 주로 그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백제의 번성보다 패망의 순간과 패망의 이유가 강조되는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기록은 흔히 승자의 기록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기록의 ‘행간을 읽어내는' 끈기와 지혜일 것이다. 역사는 옛 도서를 모아둔 창고가 아니라 남아있는 기록에 비추어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31번째 왕인 의자왕 재위 20년 만에 멸망하였다.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정설처럼 배웠다.
그것은 의자왕의 실정이다.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후 화려한 놀이터를 만들고 삼천을 헤아리는 궁녀와 함께 방탕한 세월을 보내며 충신들의 간언을 멀리하고 간신배들과 어울리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아 국정이 문란해지고 민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기록이 전하는 바 백제 멸망의 원인은 의자왕의 “탐요주색 정황국위 (耽媱酒色 政荒國危)”였다. 그러나 백제보다 훨씬 인구가 많았던 조선시대에, 그것도 역사상 가장 많이 거느렸던 연산군도 불과 수백의 궁녀를 거느렸다는데 백제의 삼천궁녀는 그 과장의 정도가 너무 심해 보인다.

어쩌면 낙화암에서 삼천의 여인이 몸을 던졌을 수도 있으리라.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당군에 짓밟혀 7일 밤낮을 불탔던 13만 가구, 인구 70만의 대도시 부여에서 한번 죽어 절조를 지키고 당의 노예로 살기를 거부한 여인들이 겨우 삼천 명뿐이겠는가. 그렇게 ‘삼천 여인’이 낙화암에서 자결을 했다 하더라도 이 또한 (기록이 전하는) 임금의 패덕과 실정으로 신음해왔던 궁녀와 백성들이 취할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랬다면 도리어 ‘해방군’인 나당 연합군을 환영했어야 옳지 않은가?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 일찍이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용맹스럽고 담력이 있었다.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時百濟末義慈 乃虎王之元子 雄孟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성현 공자의 제자로까지 불리던 의자왕은 재위 2년 만에 신라 서쪽을 공략하여 사십여 성을 함락시킨 뒤 합천을 넘어 낙동강변까지 진출하였다. 기록처럼 주색을 탐하고 방탕한 세월을 보내는 임금으로서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졌어야만 가능한 일이겠다. 의자왕의 공세에 지금의 경산까지 밀려나야 했던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외세와 어울려야했던 역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자왕의 무능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의 실정이 아니더라도 백제는 저절로 망할 나라였다.
기이한 조짐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의자왕의 실정은 간단하게 ‘탐요주색 정황국위’뿐이지만 불길한 징후는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사찰에 느닷없이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절 안팎을 헤매고 돌아다녔고, 뭇 여우들이 궁중에 들어왔는가 하면, 참새와 암탉이 흘레를 붙었으며, 사비강 언덕에 세 길이나 되는 고기가 나와 죽었고, 이것을 먹은 사람 역시 모두 죽었다. 회나무가 사람처럼 울고,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으며, 바닷가에 고기가 수도 없이 밀려와 죽었고,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올라앉았다. 또 귀신 하나가 대궐에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며 크게 외치고 땅속에 들어가므로 그 땅을 파 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있고 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네(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라고 쓰여있었다. 둥근 달의 백제는 기우는 일만 남았고 새 달 같은 신라는 점점 커가는 일만 남았다는 뜻이겠다.

 “징조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망할 조짐이 2년에 걸쳐 매달 나타나는 백제의 무엇이 두려워서 신라는 먼 당나라까지 원병을 청하러 갔던 것일까? 

백제의 강렬한 저항.
의자왕이 항복한 후에도 백제 유민들의 항거는 계속되었다. 왕족 복신(福信)과 중 도침(道琛) 등에 의해 주도된 부흥운동은 부안 변산을 중심으로 만 3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벌어졌다. 저항은 매우 강력하여 한 때 백제의 국토의 대부분을 회복하기도 했다. 신라가 고려에게, 고려가 조선에게 멸망을 할 때에도 이런 항전은 없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부여 은산(恩山)의 은산별신제는 당시에 숨진 복신을 포함한 백제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백제의 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데는 그 강력한 저항에 대한 잔인한 진압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200여년 뒤 견훤에 의해 후백제의 이름으로 다시 부활했을 때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때문에 고려를 훗날 개국한 왕건조차도 후백제에게는 여러 번의 패전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후백제에게 당한 뼈저린 아픔 때문에 왕건은 후손들에게 남기는 열 가지 가르침(훈요십조) 중에 ‘지역차별 발언의 원조’ 격인 8항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바 그 내용은 “차령산맥 이남의 땅 및 금강 이남의 산형과 지세는 풍수학상으로 본주(本主)를 향해서 배역(背逆)의 추세를 띠고” 있으므로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이곳 사람들은 결코 등용길을 열어 벼슬길을 주지 말고 각별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왕건에게 순순히 신라 천년의 사직을 넘기고 왕건의 늙은 사위가 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많은 기록에서 칭송되고 죽은 후에 곳곳에 사당까지 지어 ‘경순왕신(敬順王神)’으로까지 추앙받는 것과 비교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의 영광을 드러내는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기록이 온전히 전해오길 기대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일는지 모른다. 200여 년 넘게 백제를 통치했던 통일신라도 백제 땅에는 무엇 하나 기억할만한 것을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부여에서
어디서 부여로 오건 제일 먼저 능산리 (陵山里) 고분군을 들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부소산을 산책하며 누정마다 올라 굽이치는 백마강과 부여 읍내를 내려다본 후 (시간이 허락하면 규암선착장에서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 고란사 선착장에서 내려 부소산성에 오르거나), 이튿날 아침 일찍 여유롭게 궁남지와 정림사 오층탑을 답사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 부여을 알차게 돌아보는 순서라고 여행 안내 책에는 쓰여있다. 부소산성은 저녁이 좋고 궁남지와 정림사 탑은 아침 안개에 덮여있을 때가 아름답기 때문이란다. 그대로 하면 좀 더 뜻깊은 여정이 되겠지만 주말의 하루거리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로는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공주 우금치를 지나 부여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정림사터로 향했다. 정림사터라 했지만 정확히는 그 안에 오층석탑을 보러 간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문자 그대로 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휑한 빈터이기 때문이다. 정림사란 이름 자체가 고려 때 불리던 이름으로 원래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알려진 바 없다.
그런 사실 자체만으로도 ‘백제다운’(?) 유적지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서있는 오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원조격으로 온전히 백제의 것이다.
몸통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적어 넣었다는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 흉터처럼 남아 있어 한 때 ‘평제탑(平濟㙮)’이라 잘못 불리기도 했다.

정림사터 입구에 들어서 절터 한복판에 서 있는 탑을 향해 걸어가면 탑은 마치 화면 속에 클로스업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시야에 점점 크게 다가온다. 탑에 다가서는 도중 어딘가에선가 탑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한 번쯤  아! 하는 탄성를 마음속으로 지르게 될 것이다.
짜임새가 빈틈없어 보이면서도 경쾌하게 솟구친 탑 아래에 서서 겹겹이 올라간 탑날개를 쳐다보면 그간 백제에 가졌던 안타까운 마음이 씻어지고 탑처럼 당당한 기운이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유홍준은 가장 백제적인 유물로 서산마애불,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산수문전과 함께 정림사 오층석탑을 꼽으면서 정림사 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검이불루儉而不陋)는 백제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눈에 들어오는 명품은 어쩌면 명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처럼 지식이 없는 사람도 가만히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 - 불국사의 석가탑이 내게 그런 의미의 ‘미스 신라’ 같은 탑이라면 백제만의 절제된 미적 감각이 배인 정림사 탑은 동일한 의미의 ‘미스터 백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 사진 : 오래 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정림사터 가까이 있는 백제의 연못 궁남지는 서동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가 스민 곳이고 일본 조경의 원류라고 하나 우리가 갔을 때는 대규모 보수공사 때문에 칸막이로 에둘러 막아놓아 아쉽게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차를 돌려 서둘러 간 곳이 구드레나루였다. 백마강을 오르는 마지막 유람선을 타기 위해서였다. 박물관을 뺀 부여행은 유흥지를 돌아보는 단순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박물관행은 시간 관계상 예전에 딸아이와 왔던 기억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구드레나루의 유람선에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타고 있었다.
백제문화의 흔적은 우리 땅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들 문화의 ‘원조’ 격인 옛 백제 땅에서 무엇을 느끼고 가는 것일까? 혹 삼천궁녀의 비극적인 전설을 들으며 백제왕의 실정(失政)에 혀만 차다 가는 것은 아닐까?

유람선은 백마강을 거슬러 오르며 낙화암을 지나 고란사선착장에 닿는다. 사실이 아니라고 추측하면서도 감정은 귀에 익은 전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낙화암을 지날 땐 그곳에서 '꽃처럼 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애틋하고 서러운 마음이 일기도 했다. 아비규환이었을 백제의 마지막 날을 상상해보기도 하면서.


낙화암뿐만이 아니라 부여에는 곳곳에서 그런 감정이 느껴진다.
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로이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돌아오는 돛단배 등 - 이른바 '부여 팔경'에는 어떤 쓸쓸한 느낌이 스며 있는 듯하다.

그것은 나약함일까? 아내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지금 당장은 나약함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현실 세계의 논리로 힘의 우위에만 가치를 부여한다면 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살벌하고 잔인한 장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온 강과 모든 들과 언덕이 그 나약하고 보드라운 정서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약함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동엽 시비
구드레나루를 빠져 나오니 짧은 겨울 해는 산을 넘고 날은 벌써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신동엽의 시비를 지나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창 시절 뜨거운 가슴으로 읽었던 장시 「금강」의 시인.
소설가 박태순의 표현에 따르자면 “39세로 요절하지만 그의 생애는 한국문학사의 지형을 바꾸었다.”
백마강가 솔숲에 서 있는 그의 시비 앞에서 아내와 나는 비에 새겨진 그의 시「산에 언덕에」를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어 보았다.

1963년 시인의 생전에 나온 유일한 시집 『아사녀』에 실린 이 시에는, 보드랍고 여린 서정이 가득했지만, 현실에선 사라진 그리운 얼굴과 노래가 산에, 언덕에, 들에, 숲속에, 꽃으로 피고 맑은 숨결과 영혼으로 살아있으리라는 구절에서 마치 역사 속 백제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은, 때로는 솟구쳤으나 때로는 ‘돌속을 흐르는 물처럼’ 침잠하는, 그러나 끊이지 않고 면면이 이어온, 우리 역사의 본질 같은 것을, 그 진실의 거대한 힘 같은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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