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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3 - 내포땅 사람들

by 장돌뱅이. 2013. 1. 24.

예산, 서산, 홍성, 태안, 그리고 당진과 아산을 일컬어 내포지방이라고 했다.
이곳은 미소가 아름다운 서산 마애삼존불로 상징되는 고대 백제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근현대사에 뚜렷이 자리매김을 한 사람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헌 윤봉길, 백야 김좌진, 만해 한용운,
유관순 등이 내포사람들이다.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돌이켜보면 “항일투사
가운데서도 가장 과격한 분들만 골라서 배출”한 고장이라는 신경림 시인의
표현에 수긍이 간다.

거기에 추사 김정희, 고암 이응로 화백,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 등의 예술가는
물론,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핵심에 있었던 박헌영이 또한 이 지역 출신이고
보면
어떠한 의미로건 내포지방의 범상치 않은 저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길이란 사람들의 자취로 만들어진 것이고 여행은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는 여행이란 결국 사람의 자취를 좇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추사고택

서해안 고속도로를 당진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32번 국도를 따라 20여분을
달리면 예산군 신암면 다다른다. 추사고택이란 표지판을 따라 사과 과수원
사이로 난 길을 가다보면 야트막한 동산 아래 무덤 한 기와 그 옆으로 규모
있는 한옥을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며 실학(實學)과 금석학(金石學)에 큰 업적을 쌓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무덤이자 옛집이다.
유택(幽宅)과 고택(古宅)이 나란히 있는 것이다.  

김정희의 두 ‘집’ 모두 화려하지는 않으나 단정한 모습이었다.
잘 생긴 반송 한그루를 앞에 둔 묘는 봉분도 낮고 특별한 치장이 없어
선비의 그것다운 분위기를 풍겼고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채로 이루어진
옛 집은 비록 복원, 보수된 모습이라 하더라도 옛 한옥의 엄정한 맛이 풍겨나오는 듯 했다. 
다만 기둥마다 추사의 글씨들을 써 붙인 모습은 좀 과도하지 않았나 싶다.
차라리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추사의 작품을 전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추사 김정희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으리라.
어린아이 돌잔치 때에 상 앞에 무명실과 붓을 놓고서 “명은 길어 실 같고 붓을
잡으면 추사를 닮아” 하고 옛 할머니들이 빌만큼 한국인들에게 그는 널리 알려져
있다. 1786년 태어난 그는 불과 대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글씨로 유명했다.
학문도 뛰어난 재질을 보인 그는 당시 실학의 대학자였던 박제가로부터
실사구시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물네 살에 동지부사로 연경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서 중국의 학자 옹방강
(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당시 78세로
청나라 최고의 석학이었던 옹방강은 추사의 솜씨를 가리켜 “경술과 문장이
해동 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 이라고 평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그의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는 등 금석학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의 고속행진을 하며 “기고만장하게 30대와 40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고만장함’의 이면에는 ‘조선을 답답하고
촌스러운 나라’로 여기며 끊임없이 연경의 화려한 문물을 그리워하였던
비주체적인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거칠 것 없이 내닫던 추사의 인생에도 시련은 닥쳐왔다.
추사 나이 54세인 1840년 동지부사로서 꿈에도 그리던 북경행의 꿈에 부풀어
있던 차에 정치적인 판세가 변하면서 추사는 가까스로 사형을 면한 채 9년
동안의 긴 제주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젊은 날의 모든 영광과 앞날의 희망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그 참담한
시간을 추사는, 아내마저 세상을 뜨고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로움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사체라고 부르는 그만의 글씨를 만들어내는 성취의
기회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더불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넉넉함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추사는 제주도로 귀향을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그는 대흥사에 걸린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보고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며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를 달게 했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였으나 추사에게는 ‘촌스럽게’만
비쳤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며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다시 원교의 글씨를 걸게 하였다.
지금도 대흥사에는 두 대가가 쓴 현판이 걸려있다.  

추사는 유배 생활 중 냉담해진 세상의 인심과는 달리 자신을 잊지 않고 보살펴
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에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주었다.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歲寒然後)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 는 그의 발문은 제자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과 함께 뼈저린 아픔의 시간을 통해 삶과 글씨에 새로운 눈을 뜬
스스로에게 부친 말인 것도 같다.


수덕여관

1998년 나는 가족과 함께 수덕사를 오르는 길에 일주문 바로 아래에 있는
수덕여관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초가지붕의 따뜻한 외관과 단아한
글씨체의 ‘수덕여관’이란 현판, 옛집의 정취가 느껴지는 내부의 모습에 반해
다음번엔 꼭 이곳에서 묵으리라 식구 모두가 다짐을 해보기도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여관을 두고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곳은 수덕여관을
제외하면 해남 대흥사 앞의 유선관(유선여관)뿐이다. 그곳에는 붉고 푸른
네온사인이 없어 부정한(?) 느낌이 들지 않는 - 아마도 여관 본래의 모습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심을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수덕여관은 사람의
손길이 스친 지 이미 오래인 듯 흉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이다.
바깥쪽의 모습은 그래도 아직 보아줄만 했으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창호지가
찢긴 채 부서진 방문 안쪽으로는 천장이 내려 앉아 있었고 부서진 가재도구와
온갖 쓰레기들이 함부로 널려 있어 괴기스러울 정도였다.

1944년부터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운영해온 박귀희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돌
볼 사람이 없어 수년간 방치된 것이다. 박귀희여사는 고암 이응로화백의
본부인이었다. 수덕여관에서 멀지 않은 홍성이 고향인 이응로화백은 이곳에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다 1958년 이화여대 제자였던 21세 연하의
박인경씨와 함께 그림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떠났고 재혼을 했다. 홀로 남게 된
박귀희여사는 그 후 줄곧 이곳 수덕여관을 운영하면서 살았다.

1967년 7월 8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대학교수를 비롯,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의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으며 일부는
평양을 방문해 밀봉교육까지 받으며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려 했다는 내용의
이른바 '동백림사건'을 발표했다. 이응로 화백도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물론 당시 정권의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다.

얘기가 빗나가지만 고(故) 천상병 시인도 바로 이 사건과 관련된 무고한
피해자이다. ‘동백림사건’에 관련된 서울대 동문으로부터 막걸리 값으로
소액의 돈을 받아썼던 게 빌미가 돼 간첩과 내통하고 간첩자금을 수수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천 시인은 중앙정보부에서 수개월간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고 난 뒤 풀려났으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야 했다.

유럽으로 떠난지 십년여만에 터무니없는 일로 끌려와 2년간의 옥살이를 하게된
이응로 화백의 뒷바라지를 한 것은 바로 박귀희여사였다. 출옥한 뒤에도 이응로
화백은 약 2개월간 더 수덕여관에 머물며 몸을 추스렸다. 그리곤 다시 파리로
떠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한국에 있는 동안 그가 남긴
것은 지금도 수덕여관 앞뜰에 남아 있는 추상문자 암각화 두 점뿐이었다.  

 

한 평론가는 “이응로와 같은 작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반도는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고 했다. 이응로 화백이 미술계에 남긴 업적을 잘 아는 미술계
예술가의 입장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예술의 세계에 문외한인
아내와 나로서는 수덕여관 앞의 암각화를 볼 때 늘 낯설기만 하다. 그것은 그의
그림의 추상성보다 그의 삶이 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 아내와 내가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예술대로) 살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신봉하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예술이란 결국
어떤 형태건 아름다움을 찾는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라고 아내와 나는 생각한다.

고암은 1983년 프랑스로 귀화했으며 198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박귀희여사는 수덕여관을 지키다 2001년 사망했다.


수덕사

수덕사에서는 1308년 고려 때 지어진 국보제 49호인 대웅전이 당연히 주인공이다.
책에 나오는 ‘맞배지붕의 주심포 형식’이라는 전문용어는 그대로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간결하고 우직하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대웅전은 부처님의 품성을
느끼게 한다. 

대웅전은 옆모습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들 한다. “둥근 기둥과 각이 진 들보를
노출시키면서 절묘한 면분할로 집의 모양새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하 조선31본산 주지 중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총독부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한 만공(滿空)스님은 수덕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기억해 둘 만하다.
만공스님은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으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숱한 일화를 남긴 스님이다.
그 분의 마지막 모습 또한 그렇다.

   “1946년 어느날 76세의 노스님 만공은 저녁공양을 맛있게 들고는 거울을
   앞에 두고 독백을 하기를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
   동락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하고는 요를 펴고 
   누워 열반에 들었다.
                                     
-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중에서 -

그리고 만공의 제자 일엽(一葉)스님 또한 유명하다.
일엽스님은 출가 전 이화여전과 도쿄제국미술대학을 나와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를 주름잡던 이른바 ‘신여성’이었다.

시인이자 수필가였던 그녀는 “신정조론”이라는 여성운동을 펼치면서 자유연애,
자유결혼, 자유이혼을 부르짖었다. 요즈음 같으면 당연한 결혼관이어서 특별나
달 것도 없으나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서는 ‘운동’이라는 이름을 걸어야 했던
대담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부모의 뜻에
따라 첫 결혼해야 했던 자신의 뼈아픈 과거 때문에 그녀는 낡은 관습의 폐단에
누구보다 통렬하게 맞서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의 결혼과 실패 후 수덕사를 찾은 그녀에게 만공스님은 사랑을 받지 못해
안달하는 병을 고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엽 역시 "사랑의 근본을 알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위해 머리를 깎고 62년 산문집 『청춘을 불사르고』를
출간할 때까지 30년간 절필을 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아내는 신여성으로서 그녀가 벌인 ‘운동’ 과 그녀의 행적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키는 데는 다소 성공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어쩌면 ‘운동’의 본질에 대한
것보다 그녀 개인의 행동에 대한 ‘기인열전’식 관심이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운동’의 과정과 결과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낡은 봉건사상의 질곡에서 고통 받는 당시 기층여성의 의식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꾸려했다면 생활과 유리된 생경한 주장과 행동 대신에 좀더 몸을
낮추고 그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는 진지함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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