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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7 - 경기도 파주

by 장돌뱅이. 2013. 1. 29.

두 서울을 잇는 통일의 고리, 파주
파주와 문산을 생각하면 군생활을 하던 사촌형을 면회 가기 위해
삶은 닭과 여러 가지 반찬들을 찬합에 눌러 담으시던 60년대 어느 날의
어머니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파주가 어딘데?”
“저기 임진강이라고 아주 먼 전방이여.”
같이 따라가고 싶어하는 내게 어머니가 해주신 설명이다.
전방이 어디냐고 하자 “군인들이 스물네 시간 잠도 안자고 총을 들고 서있는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겁주어 떼어놓고 싶으셨겠지만
하지만 어린 나는 군인이며 총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더욱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고 나섰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정확히 파주는 아니었지만, 임진강변의 한 부대에서
나는 소원대로(?) 총을 메고 보초를 서며 군 생활을 보냈다.

지금은 좋아진 도로 사정으로 파주는 그 시절처럼 가기 힘든 곳이 아니며
사람들은 이제 파주를 지나며 특별히 긴장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내가 아직
파주하면 전방, 군부대, 철책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까닭은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동안의 파주 자체의 발전과 남북관계의 변화가 북의 개풍군과
접하고 있는 파주의 분위기와 지리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6월 중순의 주말 아침 아내와 나는 파주의 몇몇 곳을 돌아보기 위해 차를
몰았다. 이른 아침의 강변도로는 교통 체증이 전혀 없어 우리는 직선의 도로
위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행이 주는 가벼운 마음은 한강의
하류에 가까워지면서 강변을 따라 이어진 시커먼 쇠울타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철조망까지 뒤집어쓴 살풍경한 모습은 보통의 일상에서는
접어두었던 분단이며 통일 같은 단어들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의 파주는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서울 사이에 위치하여
옛적부터 “두 서울 중간에 유숙하는 곳”이라 불렸다고 한다.

안성장에 견줄만한 규모의 파주장은 또한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나그네를
위한 역과 원이 유난히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먼 옛날부터도
파주는 남북을 잇는 서부 교통의 중심 지역이었으니 분단의 경계선에 막힌
파주는 그 이전의 ‘열린’ 파주의 역사에 비해 지극히 짧은 현대사의 일부일
뿐이며 파주의 본래의 모습도 아닌 것이다.
용미리 석불과 보광사는 그런 파주 본래의 시절이 남긴 자취이다.


용미리 석불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거리며 강변도로를 달리다 예정했던 고양을
한참 지나쳐 엉뚱한 곳에서 내륙으로 핸들을 꺾다보니 잠시 헤맨 끝에서야
겨우 용미리 석불을 찾을 수 있었다. 78번 도로를 따라 어느 산모퉁인가를
돌고나니 짙푸른 소나무 숲 속에 거대한 용미리 석불의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이라고 한다.
천연바위를 몸통으로 그 위에 얼굴과 갓을 별도로 조각하여 올렸다.
불상은 거대한 체구를 지녔지만 얼굴에 배인 미소가 소박하고 체구에 비해서
그다지 위압적인 인상을 풍기지 않았다. 마치 가까운 이웃처럼 평범한 모습이었다.

조각의 기법이 동시대의 다른 불상에 비해 허술하다고 하나, 바로 그 허술함
때문인지 불상을 보는 동안 긴장을 풀 수 있어 마음이 편해졌다. 오른쪽의 불상은
둥근 모자를 썼고 왼쪽은 네모난 모자를 써서 각각 남자와 여자를 나타내는
부부상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네모난 모자를 쓴 불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아 기도를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 손이 마치 벙어리장갑을 낀 것처럼 두툼하여 신체의 다른
부위와 부조화를 이루며 도드라져 보이나 오히려 정감이 갔다.

불상 바로 앞을 지나는 도로는 옛날 북쪽의 개성으로 가는 중요 도로였다.
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무수한 남북의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석불은 그 넉넉한
모습으로 든든한 위로를 주었을 것이고 확실한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국토는 분단되고 적막해진 도로 위를 군용트럭만이 긴장된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지난 반세기 동안 불상은 그런 옛길의 장구한 추억을
간직한 채 투박한 두 손을 가슴에 모아 기도하며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고령산 보광사(古靈山 普光寺)
 

용미리 석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광사는 서기 894년 신라 진성여왕의
명으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것이며 당시 전국 6대 사찰 중 하나였다.
이후 전란으로 인한 소실과 재건, 몇 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특히 영조는 이 절을
후궁의 신분으로 자신을 낳은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원을 기도하는 원찰로 삼아
대웅보전, 광응전을 중수하고 만세루를 창건했다.
지금 대웅보전 편액이 영조대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솔직히 답사안내서를 참고하면서 알게 된 것이고
보광사는 최근에 조계종 개혁을 주도한 젊은 스님들이 시대와 역사에 부응하는
불교로 거듭나기 위해 고뇌하는 '실천불교'의 도량으로 아내와 나는 알고 있다.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아내와 내가 원통전의 바깥의 벽화를 인상적으로 보았던
것도 스님들의 그런 노력 때문일 것이다. 벽화 속에는 노동자와 농민, 학생과
시민들이 어깨를 걸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한때 우리는 그것을 대동세상이라
불렀다. 그것이 불교 용어로 적합하지는 않겠지만 무엇으로 부르건 부처님의
뜻대로 현실 속에 구현되는 세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난 5월 말 보광사에서는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사상과 양심을 지키며
수십 년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도중에 옥사하거나 출소 뒤 세상을 떠난 이른 바
‘비전향 장기수’들의 묘역을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인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 준공식이 있었다.

사람들마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개인의 선택에 앞서 국토의 분단이란 비극에서 나온
시대적 산물임을 기억한다면, 민족의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고난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일생을 살다간 영혼들에게 우리
사회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넘어서 작은 영면의 공간쯤은 마련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절대적 사랑의 실천을 본질로 하는
종교가 앞장 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임진각‘관광지’ 

통일로의 끝인 임진각의 주차장에 들어서자 놀이동산처럼 가꾸어진 각종
놀이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도 그냥 임진각이 아니라 임진각관광지였다.
주차장 한쪽에는 안보견학(안보관광)의 이름으로 임진각보다 북쪽에 있는
도라산전망대도 다녀 올 수 있다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특별한 상상력이 없다면 더 이상 임진각에서 분단 현장의 긴장감이나 비감함은
느끼기 힘들어 보였다. 관광버스에서 한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내렸다.
늘어나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수용하려다보니 예전에 있던 3층의 콘크리트로 된
임진각 건물은 사라지고 대신에 철제구조물이 드러난 현대식 감각의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망배단 뒤편의 ‘자유의 다리’는 이제 개방이 되어 있었다. 2000년 1월1일부터
개방하였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1953년 한국전쟁 중 북쪽에 잡혀 있던
12,773명의 교환포로를 통과시키기 위해 급히 설치된 가교이다. 그 다리를
통해 경의선 철도와 이어지는 지점까지 갈 수 있었다. 다리 끝을 막아선
쇠울타리에는 다녀가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적어 가득 걸어 놓았다.

1961년에 발표된 한 소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백 년쯤 뒤 판문점이란 고어로 ‘板門店(판문점)’이 될 것이다.
   그때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쓰일 것이다.
   1953년에 생겼다가 19XX년에 없어졌다
                            - 이호철의 소설, 「판문점」중에서 -

소설가의 상상력도 21세기까지 이어지는 국토의 분단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만나 손을 잡았던 감격의
6월이 벌써 5년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통일과 번영을
이루겠다는 그 날의 약속은 뜨거웠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힘의
논리는 점점 불안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자유의 다리 초입에 있는 표지판에는 “여기까지 오기를 50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불과 80여 미터 남짓한 길이의 다리를 개방하는데 무려
오십년이 걸린 것이다.

통일은 놀라운 사건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으로 와야 하기에,
느리지만 그것도 어쨌거나 진전이 아니겠냐고 위로하기엔 유치원생들에서
부터  연로한 실향민의 사연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벽에 걸린 갖가지
사연들이 너무 애절해 보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름도 좋은 자유로를 따라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강 건너 가까운 북녘 땅을 바라보았다. 파주는 분명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품은 땅이었지만 그 안에는 철책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수천 년을 그래왔듯 북의 임진강과 남의 한강이 전망대 앞에서
어우러지며 더욱 큰 물결을 이루면서.
이미 국토가 저러하건대 그 속에 사는 우리 또한 국토가 아니던가.

   앞남산 뒷남산 다 버리고
   이골물 저골물 합수하라
   기름내 똥내 비린내 한데 어우러져
   흉흉하게 흘러가는 저놈의 강만 보면
   꼭 내 꼬라지를 보는 것 같애
   언제고 한번 속 뒤집혀 으르렁퀄퀄
   왼갖 잡것 다 쓸어내고 새 땅 열리는
   속 시원한 꼴 한번 보리라
   보리알 쌀알도 희한하게 합치것다
   어디 말만 듣던 통일 한번 보자
   어둡고 괴로운 땅구석에 후두둑 후두둑
   삼대같은 소내기 혁명쳐 빗발쳐
   언제고 한번은 오고야 말 것
   비 개면 달 뜨렷다 올 때는 들로 오라
   하눌더러 보라고 당당하게
   풋풋한 가슴패기 열어젖히고
   보리밭 너머 봄이 오는 들판에 서서
   억새풀 개똥풀로 발돋움친다
   산너머 백두요 물 건너 제주로다
   이골물 저골물 합수하고
   천방져 지방져 으르렁퀄퀄
   기름내 똥내 비린내 한데 어우러져
   흉흉하게 흘러가는 저놈의 강바닥에
   몇십 년 홀로 보던 조각달을 처박고
   보름달 마당가에 멍석을 펴라
   꽹과리 장고도 뚱떵대것다
   저 산마루 떵떵대고 붉은 달 차올라
   된장국 보리밥 한술이라도
   이마 맞대고 먹을 날 한번 밝으렷다 
       - 정희성의 시, 「언제고 한번은 오고야 말 - 통일을 위하여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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