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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8 - 춘천 가는 길

by 장돌뱅이. 2013. 1. 29.

한강변에서
강을 끼고 달리는 길은 평화롭다.
아름다운 물 풍경이란 물 자체가 아니라 물을 담고 있는
가장자리에 있다고 했던가. 거칠 것 없는 바다에서 느껴지는
추상적인 거리감과 입체감과는 달리 강에서는 낮게 누운 강물과
어울린 강 양쪽의 둔치와 강변에 솟은 산들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내게 늘 살갑게 느껴진다.

언젠가 아내에게 이 다음에 나이가 들어 강가에서 살고 싶으냐
바닷가에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강을
선택했던 이유도 나와 같은 것이었다.
살고 싶은 곳과 다녀오고 싶은 곳 - 그것은 먼 훗날만의 가상적인
유희가 아니라 현실 속 나의 일상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이른바 경춘가도(京春街道)는 내내
그런 강을 볼 수 있는 행복한 길이다. 춘천 쪽으로 갈수록 물은
더욱 맑아지고 더불어 강물에 씻긴 산 그림자도 수려해진다.
그 때문에 누군가 이 길을 두고 갈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했다.

서울 동쪽에 사는 나는 춘천으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가는 강변북로를 탄다.
구리와 덕소, 팔당댐을 지나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 이르게
된다. 근래에 강을 따라가는 구불구불한 길 대신에 산자락을 관통하는
다섯 개의 터널이 뚫렸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이어지는 직선의 도로가
단숨에 강을 건너게 해준다. 그러나 가평을 거쳐 춘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팔당댐 앞에서 옛 도로로 접어들어 능내리와 조안리를 지나 양수교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쪽 방향을 틀어 45번 국도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길은 늘 건너편의 서종면을 지나 청평으로
이어지는 지방도이다.

다리를 건너 차를 세우고 지나온 다리로 되돌아가 잠시 다리 중간에 서본다.
다리 남쪽으론 두 개의 강물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의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다.
댐에 가로 막힌 강은 본래의 모습보다 폭을 크게 넓혀 산기슭 곳곳에까지 강물을
보내 넉넉해진 모습으로 출렁인다.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예봉산과 운길산이
강물을 굽어보고 서 있다. 운길산 중턱에 있는 수종사에서 양수교를 내려다보는
경관은 일찍이 서거정이 극찬을 했던 전망이다.

   강을 빚은 것은 산이라고 말한다. 산줄기를 뼈대라고 한다면 강줄기는
   핏줄기인 셈이다. (...) 이 땅의 산과 강은 한몸으로 붙어 있다. 산에서
   물은 자연스럽게 계곡을 따라 흘러 물줄기를 형성한다. 골짜기의 물이
   서로 만나면 폭이 넓어지고 양은 많아진다. 그것이 흘러흘러 끼리끼리
   만나면 강물이 된다. 높은 산이 자신을 낮추면 강이 되어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을 산에 다니면서 배운다. 그것은 버리면서 가벼워지는
   도와 같다.                                     - 안치운, 『옛길』중에서-


3월 들어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대학생인 딸아이가 대성리 MT를 이야기했다.
지금 그녀의 나이에 나도 같은 이유로 지나친 적이 있던 그 곳 - 서종면을
지나 청평으로 가면서 보이는 강 건너편은 늘 그렇게 물빛의 젊음이 흐르는
곳인가 보다.

내게도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거나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춘선을 오르내리며, 밤을 새우고도 모자란 시 한 구절의 감동을 새벽의 취한
강물에 풀어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청평으로 향하던 차를 다시 세우고 강 건너
편을 바라다보며 잠시 그 기억 속의 새벽 강물에 젖어본다.

파블로프의 개는 종소리를 들으면 음식을 먹던 기억 때문에 저절로 침을
흘린다고 했다. 그러나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자극이 제시되면 그 자극
상황에서 나타났던 반응을 되풀이 하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건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사가 아니라 추억을 통한 반성이 더해진다는 점이 다를 뿐
이다. 추억을 통하여 우리는 그 시절의 꿈을 되새김질하고 고여 있는 일상의
늪을 벗어나 다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아내와 내게 여행은 그런 현재진행
형의 추억을 위한 작은 움직임이다.

   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 한 잔 마시고 싶어
   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 김현철의 노래, 「춘천 가는 기차」중에서-


오봉산 청평사
중국과 일본의 절이 산의 정상부에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절은
산속에 있되 첩첩이 겹쳐져 있는 계곡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전체의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은 채 아예 주변과 하나가 되려는
은근하고 깊은 우리 건축 미학의 전통이 거기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청평사는 원래도 오봉산(五峰山) 기슭 깊숙한 곳에 있었으나 소양강댐으로
인해 그 깊숙한 느낌이 더해진 절이다. 댐으로 인해 물이 차오르면서 소양강
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46번 국도를 따라 양구 방면으로
향하다가 배후령과 배치고개를 넘어야 하는 한 고비가 더해진 까닭이다.

선착장에 도착하거나 고개를 넘어 내려와서도 절 입구까지 10여분을 걸어야
한다. 입구에서 절까지도 계곡을 곁에 끼고 제법 한참을 걸어야 하는 길이지만
물소리와 우거진 숲으로 상쾌하기 그지없는 길이다.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길가의 구성폭포(九聲瀑布)는 절을 찾아가는 재미를 더해준다. 높이는 10미터
정도의 작은 폭포지만 수직으로 떨어지는 오봉산의 맑은 물줄기와 폭포 밑의
검푸른 소(沼)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당당하고 짜임새가 있어 보인다.

폭포를 지나 오른쪽 능선의 화강암 바위 위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삼층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조형적인 미는 빼어나달 수 없으나 탑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시원해서 좋다.
이 탑에는 애절한 전설이 있다. 당나라 평양공주를 사랑하던 한 청년이
당태종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하였다. 죽어서도 공주를 잊지 못한 청년은
뱀이 되어 공주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중국의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올린 불공에도 소용이 없었으나 이곳 청평사에서 마침내 뱀을 떼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공주를 포기할 수 없던 뱀이 공주를 찾아 절 안으로 들어
가려다 벼락을 맞고 때마침 내린 소나기에 밀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공주는
뱀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묻어주고 삼층석탑을 세웠다.
이 때문에 이 탑을 공주탑이라고도 부른다.

탑을 지나 계속 오르면 부도 한 기를 만나게 된다.
1089년 관직을 버리고 오봉산에 들어와 청평사 일대에 우리나라 공원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고려정원을 가꾼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부도이다.
이자현은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가까이까지 무려 3KM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 곳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을 조성하였다.

부도 위쪽에 남아 있는 작은 연못인 영지(影池)가 그때의 흔적이다.
다소 볼 품 없어 보이는 이 연못은 이자현 정원의 중심으로 우리나라
정원 연구에 매우 중요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닌 곳이라고 한다.
청평사 역시 이자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 때인
973년에 창건되었으나 곧 폐사되었다가 1068년 오봉산의 빼어난 경치에
반한 이개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뒤이어 그의 아들인 이자현이 여러 채의
전각과 암자를 세웠다고 한다.

청평사는 한국 전쟁 때 회전문(廻轉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회전문은 다른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 건물로 이름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윤회 전생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이라고 한다.

몇 해 전까지 청평사는 대웅전과 회전문만 덩그러니 서있을 뿐 나머지는
축대뿐인 텅 빈 공간이었으나 이번에 가보니 회전문 양옆으로 날개집을
새로 지어 공간이 조밀하고 답답해진 느낌이었다. 문화재에 대한 복원은
좀더 신중히 생각한 연후에 행해져야 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쇠락하고 부서지고 사라진 것도 역사 아닌가? 
“상상의 여백을 남겨두라”는 충고는 이곳 청평사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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