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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29 - 가고 또 가야 할 경주1

by 장돌뱅이. 2013. 1. 30.

우리 가족의 경주
십여 년 전 매 주말이면 경주를 다닌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다 돌아온
우리 가족은 해외 생활에서 느꼈던 우리 국토에 대한 향수와 갈증을 풀기 위해
국토여행을 자주 하였는데, 당시에 살았던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는 그 규모로
보나 역사, 문화적인 깊이로 보나 최고의 여행지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주만큼 볼거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 있을까? 동선(動線)이나
시간의 효율성으로 치자면 경주를 따라올 곳이 없겠다. 누군가 중국인 손님을
경주로 안내했더니 5분마다 한 번씩 차에서 내려야 하는 것에 애교스런 불평을
하더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적어도 한 시간은 차를 타고 가야 다음 목적지가
나온다고 과시적으로 덧붙이면서.

토요일이면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기다리다 하교하는 아이를 태우고
바로 경주로 향한 적이 있을 만큼 우리는 경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일요일마다 경주로 향한 것이 대략 6개월 정도였다. 문화재로
공식 지정된 유물과 유적지들을 대충 한번씩 둘러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경주를
다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별적인 유물에 대한 내력과 아름다움까지 읽어
보았다고 하기에는 지식도 안목도 턱없이 부족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학술 답사가 아닌 가족끼리의 홀가분한 여행에 지적인 부담까지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반복되는 경주행은 그곳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추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별도의 공부나 사전 지식이 없어도 경주는 충분히 감동스러운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이면서도 최적의 여행지인 것이다. 아내와 나는
'보이는 만큼만 알기'로 했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아내와 내가 오래 전 경주여행에서 기억하는 것은 어느
유적지에 대한 고답적인(?) 정보보다도 그것이 있는 장소나 그곳에 이르는
길목이었다. 기억 속에선 폐사지에 돋아나는 토끼풀꽃이 빛바랜 석탑과 하나의
풍경이 되어있기도 하고, 이름난 사찰에 이르는 길목의 빨간 단풍나무 한 그루가
대웅전의 화려한 단청보다도 더 선명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그런 기억이 중첩
되면서 토끼풀꽃으로 만든 반지에 즐거워하며 아내와 영화 이티(E.T)처럼 서로의
손가락을 맞추며 해맑은 웃음소리를 날리던 어린 딸아이는 어느 새 자라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성인이 된 지금의 딸아이가 여행을 통해서 마음 속에 어떤
진실되고 아름다운 지혜 같은 것을 품게 되었다면, 그 많은 부분은 우리가 함께
보낸 경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아내와 나는 믿는다.


정자동의 바다
올 봄에서 여름까지 회사일로 많은 시간을 울산에서 보내야 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다시
지척에 있는 경주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 초
여름에는 아내와 둘이서, 그리고 한
여름에는 방학을 맞은 딸아이까지 가세해서.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은 해수욕철이 아니라면 공업단지가 줄지어 서있는
7번도로보
다는 정자동을 지나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봉길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31번 도로를 택하는 것이 좋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오른쪽으로 계속 바다를 끼고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울산 시내에서 정자동 바닷가로 가려면 꼬불꼬불
이어지는 무룡산
산길을 타고 넘어 갔지만 이제는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만들어져 한결 수월하다.

정자동 해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해변으로 나갔다. 해수욕철만 아니라면
곳곳의 주차 공간은 늘 인심 좋게 열려있다. 정자동 바다의 해변은 모래가 아니라
작은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해변에 바다를 바라보고 앉자 작은 파도소리와 파도에
쓸리는 자갈 소리가
절묘한 화음을 만들며 잔잔하게 들려왔다. 바다는 넓고 수면은
잔잔했다.
바다를 보면 누구나 가슴이 열리는 것을 느끼면서 후련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뿐이라 해도 그것은 복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후련한
해방감 자체가 번잡하고
속된 우리의 일상을 반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파식적을 불어주오

*위 사진 : 문무왕 수중왕릉

통일신라 문무왕은 죽어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왜구로부터 지킬 것이라
했다. 그
는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이라며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납골은 경주의 용당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에 뿌려졌다.

일제시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우리나라 석탑의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이루어낸 우
현(又玄) 고유섭은 수많은 아름다운 바다보다도 대왕암이 있는
용당포 바다를 잊지 못
한다고 하면서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업을 찾아 ...
동해의 대왕암을 보러 가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고유섭이
자신의 반일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1985년에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대왕암 근처에 있다.
  

해가 갈수록 대왕암 입구는 어수선해져만가는 느낌이 든다. 도로와 주차장은
넓어졌지만 해수욕철이 지났어도 비싸게 받는 주차료하며 갖가지 장사들의
진열대가 ‘문무왕의 위업’을
찾아가는 길맛을 잃게 한다. 


*위 사진 : 이견대에서 본 문무왕 수중왕릉

때문에 아내와 나는 이견대(利見臺)에서 대왕암을 내려다보는 방법을 택한다.
이견대는 대왕암 입구 삼거리에서 감포쪽으로 2-300미터 정도 지나간 언덕 위에
있으며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고, 용으로부터 세상을
태평하게 만들어 줄 피리를 만들 대나무를 얻은 곳이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며,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했다.
이견대에서 보이는 대왕암과 바다는 파도도 잔잔하고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 은혜에 바친 위대한 감은사탑
경주로 향하기 위해 31번 국도를 벗어나 929 지방도로를 타고 대종천을 잠시 거슬러
오르면 오른쪽으로 두 기의 석탑이 유명한 감은사터를 만나게 된다.
감은사(感恩寺)는
문무왕이 생전에 터를 잡고 절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680년 세상을
떠나자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 탑을 두고 명작에는 따로 해설이 필요없다며 그저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하며
감탄만 하고싶다고했다.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 거기에 더 붙일 게 있을 수 없다.
그저 좋다는 말 밖에는......
아내 역시 이제껏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곳의 하나로 이곳을 꼽는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라고 한다.
감은사의
삼층석탑은 이 두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면서 “기운차고 견실
하며, 장중하면서도
질박함을 잃지 않은” 위대한 탑이다.
통일된 새나라의 단단한 안정감과 웅장한 기운이
탑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감은사 삼층석탑의 위대함은 결코 사진기로 담아낼 수 없다. 반드시 현장에서
보아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울산에 살 적에 불국사와 함께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이나 갈 때마다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에 갔을 때 서쪽 탑이 수리 중이었다. 탑 하나만으로는 왠지 좀 허전해 보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의 재잘거림이 그 허전함을 채워주었다.
선생님의 안내로 답
사 중인 듯했다. 그들이 컴퓨터게임보다 밋밋하고 무료한 석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떠랴! 풍경을 본다는 것은 눈앞의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계기로 추억을 상기하는 것이라 했다. 세월이
흐른 뒤 저 개구쟁이들이 자라 다시 이곳에 온다면 자신이 다녀간 오늘을 어떤
형태로든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들이 쌓여 감은사는 비로소 저들만의 감은사가
될 것이다. 


골굴암 부처의 미소




감은사 근처에 있는 골굴암도 들려볼만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석굴사원
이다. 본래 12개의 석굴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구분할 수 없고 수십 미터의 절벽에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오랜 비바람을 겪으면서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갔으나
부처님의 잔잔한
미소만은 뚜렷하게 살아있다. 


장항리 절터
 


*위 사진 : 장항리 절터와 불대좌에 새겨진 앙증맞은 사자

토함산의 중턱인 양북면 장항리에 이름도 없는 절터가 있다. 그냥 지명을 따서
장항사터라 한다. 찾는 이도 없어 한적하고 적막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작은 절터에는
불상의 받침대인 불대좌와 석탑 두 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한 기는 일제
강점기에 도괴범에 의해 폭파되어 몸돌이 사라지고 지붕돌만 쌓여 있다. 국토의
곳곳에서 만나는 일제의 탐욕과 만행의 흔적 - 아직 반성도 없는 그들에게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도 장항리 절터의 적요(寂寥)는 크고 깊다. 일제의 잔인한 파괴도 그것을
흩트리지 못했다. 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빈 절터에 흐른 세월이
망망한 바다나 아득한
우주처럼 몸에 감겨온다. 그 거대한 성장과 소멸의 윤회
앞에 선 우리가 너무 작아보인다.
연민은 절터에 있지 않고 우리 삶에 있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언제나 그 연민을
감미롭게 받아들인다. 아내와 내가
폐사지를 찾는 이유이다. 얄팍한 감상이라 인정하지만
그 정도의 감상조차
잃고 메마르게 살고 싶지 않다.

오래 전 울산에 살 적에 한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80년대라는 ‘불의 시대’를
누구보다도 뜨겁게 살았다. 부정한 시대를 살았기에 분노하였고, 분노의 순수함
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언제부터인가 꿈은 그야말로 ‘꿈인 듯 전설인 듯’
낡은 것이
되고 낙담한 사람들이 낯설게 변해버린 세상에 가슴을 칠 때 그도 이곳
장항사터를
다녀갔었던지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쓰라린 회한을 고백하지만
그만의 차분함과 유연함으로 삭혀내는 의지가 간결하게 다가온다.
그 내면화도 내게는 감미로울 뿐이다.

    잡초 푸르네 / 달빛 푸르네 //
   꿈인 듯도 하고 / 전설인 듯도 하고 //
   천년을 품고 기다렸던가 / 폐허의 삶 //
   인연은 바람, / 흩어진 후에야 비로소 사무치는가 //
   나는 옛적 신라의 승려 / 무얼 좇아 여기 다시 돌아와 //
   가슴을 쳤던가 / 피가 끓었던가 / 아, 회한의 눈물 //
   인연은 바람, / 얼마를 사무쳐야 그 얼굴 다시 뵈올까 //
   스스로 연민에 빠지는 / 어스름 숲 그림자 //
   잡초 푸르네 / 달빛 푸르네 //
                         -백무산의 시, 「장항리사지」-


그곳에 불국사가 있다

새로 뚫린 도로는 토함산을 넘어 이어진다. 굽이가 심하지만 오고가는 차들은
별로 없어 한산하다. 고갯마루에서 석굴암을 들릴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불국사를
향해 내려갔다.
시간관계상 둘 중의 하나는 포기를 해야 했다.

불국사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신라가 그 국력의 절정기인 8세기 중반에
세운 절이다.
그 기세는 불국사에 그대로 투영되어 “흔히들 불국사를 조화적 이상미와
세련미를 보여주는
신라문화의 정수이며 완결판”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세부적인 각론을 들어 불국사의
아름다움을 분석하겠지만 그런 지적
밑천이 없는 아내와 나는 그 말을, 불국사를 걸으면 느낄 수 있는 시원스러움과

정연함 그리고 장엄함 같은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쉬운
구조와 형태를 지녔으면서도 그 속에 절제된
아름다움과 팽팽한 긴장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명품’이 아니겠는가. 
 

불국사에 대한 세부적인 감상은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3권을 참고
하면 좋을것이다. 빈약한 암기력을 가진 나는 불국사를 걸으며 유홍준의 글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만을 드문드문 기억해내어 아내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종교의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전통적 아름다움을 구현한 건축물로서 절집을 찾아
다니면서 느꼈던, 그러나 뭐라 표현하기 힘들었던 아마추어의 답답함을 명쾌하게
풀어준 대목이었다. 세상에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가 되겠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건축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찰건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중 뛰어난 절집이라면 당연히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경주 불국사가 
   꼽힐
만하다
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절은 건축의 지향점, 특히 자연과의
   조화관계가
아주
다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여맥을 절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을
보여
주고, 선암사는 부드러운 조계산 자락이 사방에서 감지되는
   아늑한 산중에 자리
잡았는
데, 불국사는 산자락을 타고 올라앉았으면서도 비탈을
   평지로 환원시켜 반듯하
게 경영되
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자리앉음새
   (LOCATION)가 뛰어나고, 선암사는 건물
과 건물 간의
공간(SPACE)운영이
   탁월하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TECHNIC)와 가
람배치(DESIGN)
의 묘가
   압권이다. 그런 저마다의 특징으로 인하여 한국 사람은 부석
사를, 일본 사람은
    
선암사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를 더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부석사의
호방스러운
   기상을,
일본 사람은 선암사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를, 서양사람은 불국사의
 
   공교로운 인공의 멋
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석사 같은 절, 선암사 같은
  
절은 다른 예가 참 많지만 불국사처럼 자연과 인공을 대비시키면서 조화를 구한
   절은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본이다. 그 점에서 불국사는 어느 건축보다도 
   독창적이
고 독특한 건축인 것이다. 


위 사진 : 지형에 맞추어 석축의 선을 변화시킨 아름다운 극락전 측면 축대 


*위 사진 :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가 한 장쯤은 가지고 있을 배경의 사진

아내와 내게 불국사 여행의 백미는 대웅전 앞의 두 탑을 보는 것이다.
특히 화려하고 정교한 다보탑보다 단순하면서도 절제되고 응축된 아름다움이
눈부신 석가탑이 마음을
빼앗는다. 이 방향에서 보고, 저 방향에서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도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 ‘팔방미인’이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치밀한 계산의
비밀은 알 수 없어도 장중하면서도 둔중하지
않고 날렵하며, 날렵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안정감으로 경쾌하게 치솟은 석가탑의
매력은 늘 아내와 나의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위 사진 : 설명이 필요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불국사의 두 탑

석굴암과 불국사 곳곳에 일본인들에 자행된 왜곡과 약탈은 다보탑에도 상처를
남기고 있다. 상층 기단의 네 귀퉁이에 놓여져 있던 작은 돌사자상 넷 중에 보존
상태가 가장 나쁜 하나만 남기고 셋은 일본인들이 강탈해 갔다. 그 사자상들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도 오리무중인
채로 안면부가 깨진 사장 한 마리가 외롭게
남아 있다. 빈자리의 허전함이 커 보인다.
지난 65년 박정희정권이 성급하게 정리
해버린 한일과거사가 아닌 올바른 한일 관계의
재정립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우리 역사의 상처이다. 
 

 


*위 사진 : 깨어진 돌사자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다보탑

불국사를 나와 보문단지로 자리를 옮겨 한 호텔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호수 옆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하루 동안 지나온
경주는 여전히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흘러넘치는 만선의 바다였다.  

 

그 옛날 경주만 오면 그랬듯 아내와 나는 또 다시 무언가 큰일을 성취해낸 것처럼
뿌듯하고 넉넉한 마음이 되었다.
들뜬 가슴을 토닥이듯 저물어가는 하루해가 달고온 
어둠이 호수의 수면을 밟으며 조용히 다가왔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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