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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0 - 가고 또 가야 할 경주2

by 장돌뱅이. 2013. 1. 31.

딸아이가 함께 한 경주여행
딸아이가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와 함께 아내와 나의 울산행에 동참했다.
딸아이가 합류하면
아내와 둘이서 다닐 때와는 다른 일정과 내용의 여행을 하게
된다. 우선 이른 아침
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정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이른 아침이
아니라 오전 중에는 아침
식사를 제외하고는 일정을 잡지 않는 것이 좋다. 느긋한
아침잠의 달콤함을 딸아이는 무
엇과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산행처럼 많이 걷는
일도 피해야 한다. 주로 차를 타고
동하며 잠깐씩 내려 걷는 여행이 되어야 한다.
식사도 육식 위주로 바뀌게 된다. 딸아이
는 아침에도 삼겹살을 먹으며 ‘담백한
맛’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극단의 육식주의자
다. 아내와 둘이 있으면 2인분이면
충분한 고기구이가 딸아이가 끼면 4인분이 된다.

평소의 여행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여행으로 바뀌게 되지만 아내와 나는 딸아이의
동참
자주 요청한다. 운전을 하는 동안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딸아이의 수다는
그런 바뀜을
감내해도 좋을 만큼 유쾌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딸아이의 참석을
유혹하는 미끼로 친
구의 동행을 권하기도 한다. 이번 여행은 울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딸아이의 친구가 모
교를 가보고 싶다는 희망과 맞아 떨어졌다. 그 때문에
딸아이의 동행이 거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근래에 들어 딸아이가 가족과의 여행에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년 여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뒤의 변화이다. 게다가 대학 졸업반이
되고
취업을 하면서 생활 주체로서의 독립할 날이 가까워졌다는 위기감(?)이
딸아이에게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대한 욕망과 사랑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도 같다.

“생각해보면 같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사실이잖아.”

제 엄마에게 딸아이가 건넨 은근히 슬프면서도 살가운 말이다.



경주 시내 이곳저곳
경주를 갈 때마다 우리는 예전에 우리가 경주가 다니던 때를 이야기 한다.
사람들끼리도
자주 만나야 할 이야기가 생기는 것처럼 여행이나 여행지도 자주
다닐수록 이야기꺼리가
풍성하게 되는가보다. 여행 이전에 내가 울산 근무 시절
회사일로 외국손님들을 가장 많
안내한 곳이 경주였고, 우리 가족이 이 세상
어느 곳보다 자주 다닌 곳이 경주였으며
딸아이가 서울로 전학을 온 고등학교
첫 해의 수학여행지가 ‘하필’ 경주였다.
우리 가족과 경주의 질기고도 유쾌한 인연이다.
 

이전에 자주 들렸던 쌈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그 앞에 있는 계림으로 걸어갔다.
한 여름의 햇빛은 강렬하고 땅은 후끈 달아 있었지만 땀을 흘리기로 작정을 하면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가는 길에 첨성대가 있다.

누구나 경주를 다녀가며 가장 실망하기 쉬운 곳이 첨성대이다. 70년대 초반 고등학교
학여행으로 경주를 다녀가면서 나 역시 그랬다. “뭐야? 도대체 저곳에서 별자리를
탐구
했다고? 차라리 산으로 올라가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나와 있다.

  
가난하고 용렬스러운 것은 첨성대가 아니라 그것을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만
  
가르치고 배운 이 시대의 문화행태이다. 우리가 언제 첨성대의 구조와 상징성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있었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따르면 첨성대는 신라사람들이 당대의 천문지식을
최대한
함축시켜 만든 상징적 조형물이라고 한다. 목조건물이었을 당시의 천문대는
사라지면서
석조 건축물인 첨성대만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구조와
상징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최고(最高)’나 ‘최고(最古)’라는 수식어에 현혹되지
않는 덤덤한 마음으로
냥 그곳에 서있는 옛 조형물로만 바라보면 첨성대는 매우
귀엽고 야무져 보이는
건축물로 살아나게 된다.


*위 사진 :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한 계림

첨성대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계림에 닿는다. 전선의 숲인 계림의 여름은 울창한
초록이다. 숲속으로 들어가면 진한 초록이 온 몸 가득 물들어오는 느낌이다. 탈해왕이
어느
날 숲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빛의 궤짝이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범상치 않은 용모의 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아이의 성을 김,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고 그곳을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알지는 김씨의 시조로 이 탄생설화는 북에서
내려온
철기문명인들이 토착민을 밀어내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김알지의 6대손이 왕위에 올라 신라 제13대 미추왕이 되었다.

그 덕분에 계림은 신성한 곳이 되어 보호를 받았기에 옛 숲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천수
를 누린 모든 것이 그렇지만 계림은 유달리 신성해 보인다. 자연에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숲속에 앉아 있거나 천천히 거니는 일. 그것을
행복 이외에
다른 말로 부를 수는 없겠다.

계림 뒤쪽으로 몇 기의 둥근 묘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내물왕의 것이라고 한다.
탄생과
죽음의 장소가 인접해 있는 것이 무슨 깨달음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봉분은 크지만 위압
적이지 않고 편안하다.  

 

오래 전 베이징을 여행하며 보았던 황제의 호사스런 지하궁전에는 죽은 뒤에도
이승에서
누렸던 부귀와 권세를 놓치 않으려는 집착과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신라의 고분
에는 거기에 비교할 수 없는 여유와 소탈함이 스며 있는 듯 했다.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온 가족이 그 아이가 겪어야 할
고통을
근심했고 누군가 죽게 되면 영원한 행복의 길로 떠났다고 기뻐해 주었다고
한다 .경주에
와서 둥그스름한 고분의 능선을 바라보면 그 인디언들의 생각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위 사진 : 천마총 가는 길

대릉원(大陵苑)에는 그런 고분이 20여 기나 모여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천마총이다. 천마총이란 이름은 고분 발굴시 발견된 말다래에 천마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는 죽은 이의 승천을 위해 신라 사람들이 새겨 넣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위 사진 : 천마총

80년대의 부도덕한 권력이 한 평범한 여성잡지의 기자에게 가한 느닷없는 폭력과
고문, 상처, 그리고 그 충격으로 비롯된 죽음과도 같은 자기 상실의 세월로부터의
회복을 양귀
자는 소설 「천마총 가는 길」에서 그려냈었다. 작가가 굳이 천마총을
택한 이유가 죽음
을 극복하고 하늘로 오르는 꿈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았다.
상징은 공허한 상상이 아니라 때로 현실적인 힘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능원의 깊은 적요와,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능의 곡선을 보며 그는 시간을 생각했다.
  
역사의 시간들을 조금씩 수긍하기도 하였다. 칼과 피의 역사라 하여도 천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저렇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남는 것이었다. 저 부드러움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문화를, 이간을 버팅기는 문화의 두께를 그는 대릉원의
   깊은 정적
속에서 마음으로 만져보는 듯하였다. 
                                          
-양귀자의 소설, 「천마총 가는 길」 중에서-

안압지(雁鴨池)는 원래 신라의 궁터라고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4년(67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珍禽異獸)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도 후세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궁의 이름도 연못의 이름도 정확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1974년 발굴 당시
엄청난 유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 꽤 중요한 장소였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위 사진 : 안압지

안압지는 경주 최고의 산책지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지만 이번에 가보니 연못을
정비
하는 공사 관계로 바닥이 드러나 있어 어수선하였다. 대신에 안압지 바깥쪽에
최근에 가
꾸어놓은 연못에 거닐며 보았던 활짝 핀 연꽃이 섭섭함을 달래주었다.  


*위 사진 : 안압지 옆에 조성된 연꽃단지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이 대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와 대궐 대신 지은 절이라고 한다.
93년 걸려 2만5천평이나 되는 광활한 평지 위에 지어져 593년간 존속했던 황룡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불 타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당간지주 하나 뿐이라고 한다. 그나마도 서 있는 위치로 보건데 황룡사가
아니라 분황사의 것으로
보는 편이 맞다고 한다.  


*위 사진 : 황룔사(?) 당간지주

그러니 보이는 것은 휑한 공간뿐이다. 언젠가 이곳에 복원공사가 있을 것이란
신문기사
를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수십 미터에 달한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위용을 빈 공간 속에 그려보다가 폐사지는 그냥 폐사지로 남겨두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 공간마다 건물을 세워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세상에 이렇게
숨이 트이는 너른
공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부처님의 은공이자 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번 경주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진평왕릉이다. 보문단지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있는
평왕릉은 산이나 언덕에 있지 않고 평평한 논 가운데에 있어 가는 길부터
편안하다.
사이로 난 길은 천천히 들어가다 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예전에는 더 멋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아내와 나는 늘 감동한다.
명절날 귀향을 한 도시에
는 자식이 고향집을 바라보며 논길을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라면 올바른 표현인지
모르겠다.  


*위 사진 : 고즈넉한 분위기의 진평왕릉

논 속에 작은 섬처럼 솔숲이 있고 그 안에 진평왕릉이 덤덤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치 벼 낟가리를 둥글게 쌓아둔 것처럼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누가 한국의 아름다움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했던가. 진평왕릉에 와보면
그 뜻을
알게 된다. 솔잎을 흔드는 바람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과 단아함이
밀도
높게 스며있다.

진평왕은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은 왕으로 나라의 기운이 왕성해지는 시기에 무려
53년
동안 재위 기간을 보내었다. 그런데 그의 무덤에는 그런 ‘장기집권’의 통치자
로서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하는 허영과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치장이
없다.
그런데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숙함 같은 것이 있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고 목소리를
낮추게 한다. 진실로 강한 것은 그런 것일 게다. 예각의 날을 세운
견고함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유연함일 게다.  

진평왕의 위대함은 자신의 딸(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에도 있다.
물론 그것은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신라의 신분제도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도 우리의 역사에 존재하는 세 명의 여왕이 오직 신라에서
나왔다는
것은 제도와 함께 여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사회문화적 포용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한 문명의 가치가 그 문명이 여성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
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 된다면 신라의 가치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신라가 천년 이상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해가 저물도록 천천히 진평왕릉 주변을 서성거렸다.


포항 돌아오기
경주에서 다시 울산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잔 우리는 이튿날 포항을 돌아 31번
국도를
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기로 했다. 호랑이 모양의 우리나라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호미곶과 구룡포를 고려한 일정이었다.

포항의 반환점은 오어사(吾魚寺)로 잡았다. ‘내’(吾) ‘고기’(魚) 라는 뜻의 절 이름이
독특하고 재미있어 보인다. 원래의 이름이 항사사(恒沙寺)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오어사로 부
르게 되었다. 바뀌게 된 경위는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원효와 혜공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하며 물고기를 잡아먹고 난 뒤 배설물을
법력으로 다
시 물고기로 되살리는 시합을 벌였다. 그 중 한 마리는 살지 못하고
다른 한 마리는 살아
서 힘차게 헤엄쳐 갔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 하여 그렇게 이름 붙
여졌다고 한다.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세워졌다. 일화에서 보듯 우리 불교사에 이름난 혜공(惠空),
효(元曉), 자장(慈藏), 의상(義湘) 등의 스님이 기거한 적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나이만큼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 건 우리나라 모든 절이 진행
중인
‘중창’ 탓인지 모르겠다. 성형수술을 받은 연예인의 얼굴이 점점 비슷하게
닮아 가는 것처럼
내와 내겐 끝없는 ‘중창’을 진행 중인 우리나라 모든 절들의
모습이 비슷해지는 것 같다.
층마다 파는 품목이 정해져 있는 백화점처럼 세상이
모두 비슷해진다면 여행이란 행위는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절 밖으로 나오면 한 여름의 진한 초록을 물에 담고 있는 오어지
(吾魚池)라는
저수지가 있다. 물과 절이 어울린 모습이 시원하다.
그 아름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어사를 찾게 하는 이유가 됨직하다.

오어사를 나와 등 뒤로 멀리 포항의 공업단지를 뒤로 한 채 해변을 끼고 도는 도로로
어섰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푸르고 가없는 바다. 언제 보아도 시원하다. 도로를
벗어나 해변가 마을로 내려가 보았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숨었는지 포구는
정박한
배들을 제외하곤 텅 비어 있었다. 한두 마리의 갈매기가 정적을 깨고 낄룩
하는 울음소리와
갯내음을 뿌리고 지나갔다. 생선 말리는 냄새가 갯바람에 실려
오기도 했다.
포구를 배경으로 딸아이와 친구를 세우고 누르는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호미곶(虎尾串)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에 있다.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 하
여 장기곶(長鬐串)이었는데, 1918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표현인 갑(岬)으로
고쳐 장기
갑으로 불리다가 1995년에야 다시 장기곶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이후 2001년 지금의 이
름으로 변경하였다. 한반도의 형상을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으로 볼 때 호미
곶은 그 꼬리에 해당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미곶은 한반도의 동쪽끝(最東端)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죽변과 호미곶 중 어느 곳이 더 동해로
튀어나왔는가를 재기 위해 두 곳 사이를 일곱 번이나 왕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지도에는 호미곶이 더 튀어나오게 되었다.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그의 노력과 집념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망망한 바닷가에서 그는 어떻게
더 튀어 나오고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위 사진 : 호미곶등대와 등대박물관

이곳에 높이 26.4미터 밑둘레 24미터로 우리나라에 제일 큰 등대가 있다.
호미곶등대
은 대보등대라고 한다. 1903년에 건립된 이 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등대를 세운 동기를 두고 좀 찝찝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1901년 일본의 수산강습소 실습선이 대보 앞바다를 지나다가 암초에 부딪쳐 선생과
생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이 해안시설의 미비로 인하여
발생된 것
으로 그 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정부는 장례비를 지불하고
한국 예산으
일본으로 하여금 등대시설을 공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
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항해술의 수준
으로는 등대가 불필요 했다는 사실
에서 일제가 자신들의 필요를 우리나라 정부에게
강요한 것으로는 추측된다. 
 


*위 사진 : 구룡포해수욕장

호미곶에서 멀지 않은 구룡포는 지형이 아홉 마리의 용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다. 구룡포는 지금은 한 겨울의 과메기의 원산지로 이름을 떨칠 뿐이나
일제강점기에는
동해 최대의 어업전진기지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조밀하게
들어선 집들이 한 때
번성했던 시절을 말해주는 듯 하다. 시인 곽재구는 구룡포
언덕의 집들 사이의 고샅길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구룡포의 골목길들. 한번 들어가면 출구가 어딘지 쉬 짐작이 안 되는 길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올 듯한 길들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그 속에서 주름이
  
깊게 패인 할아버지를 만나고, 기저귀를 빨랫줄에 너는 새댁을 만나고,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만난다. 구룡포의 골목길을 떠돌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서울의 달동네라고 말한 서양의 어느
  
건축학자의 매력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알게 된다.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갗을 부비는 집들. 담장들.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웃들의 꿈, 가난,
   숨결들. 삶의 시간들이 피워내는 가장 따뜻한 형상의 꽃들이 동해의 푸른
   물살과 수평선 위에 펼쳐진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중에서- 

세상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을 흉내내며 살고 싶어진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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