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소설 『혼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전북 남원의 한 종가를 지키는 종부(宗婦)
3대와 종가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들의 삶을, 우리 민족의 풍속과 정서의
세밀한 묘사와 함께 생생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소설로,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최명희의 작품이다.
최명희는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혼불』(1부)이
당선된 후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신동아』에 제2부 - 제 5부를 연재하였다.
그리고 1996년 12월 이 모두를 10권으로 묶어 세상에 내 놓았다.
서점에서『혼불』을 사 온 사람은 나였지만 먼저 읽은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는 첫 권을 잡는가싶더니 놀라울 정도로 『혼불』에 몰입하기 시작하여
단숨에 완독을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서둘러 읽으라고 강권을 하다시피 하였다.
소감인즉 “놀라운 소설”이라는 것이다.
최명희는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글씨를 써놓는 것이 아니라 새겨 넣고 있다.
그의 글씨는 철필이나 만년필로 쓰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 가면서 새기는 처절한 기호이다.『혼불』은 나를 숨 막히게 한다.
『혼불』은 지금 우리 문학에 횡행하는 온갖 소음과 기만을 무섭게 경고한다.
최명희, 그는 분명 신들린 작가이다.
-시인 고은의 글 중에서-
『혼불』완간 4개월 전에 작가는 자신의 몸에 암의 발병을 알았지만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집필을 계속했다고 한다. "한번 쓰기 시작하자 저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사로잡은 이 작품 때문에 밤이면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했다"는 작가는, 몇 차례의 수술을 거치는 힘든 투병 생활 속에서도
『혼불』6부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1998년12월 안타깝게도 세상을 뜨고 만다.
소설 중의 한 대목이 마치 작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눈에 들어온다.
누가 그리도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의표를 찌른 말을 하였던고.
재사(才士)와 가인(佳人)은 단명(短命) 박복(薄福)하다더니,
그 어른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혼불』1권 233쪽 -
작가 최명희의 묘소는 전주의 유명한 덕진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평범해 보이는 길옆 야산에 “혼불문학공원”이라 음각으로 새겨 넣은 검은 돌이
안내판을 대신하여 서있을 뿐이지만 작가를 기리는 현수막 덕분에 아내와 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현수막이 가로로 걸린, 숲 사이로 뚜렷하게 다듬어진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야트막한 언덕 부근에 “소설가 최명희의 묘”라고 새겨진
비석과 소박한 묘가 있다.
헐벗은 숲 속의 겨울 나무 사이로는 겨울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땅위엔 지난 가을의
갈색 낙엽이 흩어져 조금은 을씬년스러웠지만 아내와 나는 『혼불』의 기억을 되살리며
포근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잠겨들었다. 우리는 무덤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가끔씩 세상이 고맙고 감사해야 할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땐 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나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목청을 낮추고 겸손하게 바라보는 세상이
자부심과 신명으로 차오르는 것은 국토 여행이 주는 놀라운 선물이기도 하다.
2. 소설『혼불』속의 그곳과 그 사람들
혼불마을
소설『혼불』의 중심마을은 행정적으로 남원에서 전주로 가는 17번 국도변에
있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 일대로, 풍악산의 줄기가 뻗어나가다 솟구친
“벼슬봉과 노적봉, 선녀봉들이 물결을 이루며 마을을 병풍같이”(1권47쪽)
둘러싼 아래 쪽으로 다소곳이 엎드린 마을이다.
서산(西山) 노적봉(露積峰)을 등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마을 매안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맥이 아래로 뻗어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그 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
그냥 뒷동산이라고 불리는 산 자락 기슭에는 해묵은 밤나무가 들어차 우뚝하거나
드러누운 바위의 큰 덩어리들과 어우러져 동무를 하고 있는데, 이 밤나무 숲을
뒤안으로 한 원뜸이 마을의 맨 위쪽이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종가의 솟을대문 아래쪽으로는 형제, 지친과 그 붙이의 집들이 모여 있다.
- 3권 235쪽 -
노봉마을(혹은 매안마을)은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 최명희가 성장한 곳이며
부친의 고향이라고 한다. 남원시는 지난 99년부터 노봉마을을 ‘혼불마을’로 부르기로 하
였으니 이는 고인이 된 작가와 작가를 키워준 마을 모두에게 큰 자부심과 영광이 되겠다.
물론 『혼불』자체가 이미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이지만.
청암부인
소설의 첫 머리는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라고 문장으로, 『혼불』에서 그리는
3대 종부 중 마지막인 효원의 혼례식에서 비롯되지만 내용상 실질적인 시작은 매안마을의
쇠락해져가는 양반가인 이씨 문중 종가에 청암부인이 시집을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겠다. 그녀가 몰락해가는 종가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부인의 친정 동네 이름이 청암(碃菴)이어서, 이곳 매안의 이씨 문중 종가에
종부로 시집온 그날부터 그네는 택호를 ‘청암’이라 하였다. 그러나, 시집을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눈이 시리게 흰 소복을 입은 청상의 몸으로였던 것이다.
- 3권 129쪽 -
초례를 치른 뒤 단 사흘을 같이 머문 끝에 신부인 청암부인을 홀로 처가에 남겨두고
본가인 매안으로 돌아간 열여섯 살의 신랑은 열병을 얻어 단 며칠을 앓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그네가 들어선 종가의 형상은 참담한 것이었다.
대문은 비그러지고, 댓돌을 잡초에 묻힌 채 흙먼지 자욱한데, 기와는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마치 험하게 두드려 잡은 고기 비늘 같았었다.
거기다가 거북의 등짝처럼 이리저리 갈라져 금이 간 벽이라니.
- 3권 129쪽 -
기구한 운명으로 흰 가마를 타고 처음 시집으로 들어선 청암부인에게 코에 훅 끼쳐 온
곰팡이가 끼인 흙냄새와 머슴이 발로 한번 찼을 뿐인데도 그냥 주저 앉아버리던 행랑의
벽이 쇄락한 종가의 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더군다나 “느닷없는 비보를 듣고는 혼비(魂飛)하여 소복으로 달려온 신부,
며느리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다정히 못해 준 채, 바깥 사랑에 시신처럼 거멓게 누워있던
시부는, 어느 하루 유언도 없이 운명해”(1권 228쪽) 버려 종가는 푸슬푸슬 먼지만
날리는 집채만 남은 채 사람의 훈김이 사라진 곳이 되고 말았다.
그 삭막 황량한 집안에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앉은 청암부인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 3권129쪽 -
그리하여 열아홉 청상의 몸인 청암부인은 기울어져가는 종가의 가세를 크게 일으킨다.
소설에는 그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 채 한해 수확이 물경 삼천 수백 석에
이른다고만 나와 있다.
이 댁 농사는 그만큼 엄청났다.
우선 매안 근처뿐만이 아니라, 보절(寶節) ․ 산동(山東) ․ 삼계(三溪) ․
임실(任實) ․ 동계(東溪) ․ 덕과(德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주생(周生) ․
금지(金沚) ․ 곡성(谷城) 일대, 그리고 경상북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동면(東面) ․ 산내(山內)에까지도 사음(舍音)을 두었다.
- 1권 88쪽 -
그러나 훗날 갓 신행 온 손부(孫婦) 효원에게 내비치는 청암부인의 심중으로
당시에 비장했던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내가 만일 종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진즉에 칼을 물고 자진(自盡)을 했을 것이다.
열녀가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 허나, 내가 그 참담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내게는 남의 가문의 뼈대를 맡은,
무거운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종부는, 그냥 아낙이 아니니라.”
- 3권 164쪽 -
서도역
혼불마을로 가는 길에 처음 들른 곳은 서도역이었다.
노적봉의 발등이 매안 마을이다. 마을 끝 아랫몰에 이르러, 치마폭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논을 가르며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점잖은 밥 한 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동안을 걸으면
정거장에 닿는다. 본디 이곳은 무슨 이름을 따로 붙일 일이 없었던 논 가운데였다. 그러던
것이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곳에 정거장이 생긴 것이다. 이 지점은 매안뿐만 아니라
그만그만한 주위 사방 마을과 여러 골짜기며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까지 사람
들이 골물처럼 모여 오기 알맞은 곳이었다.
논 위에 철도가 놓이고 정거장 역사(驛舍)가 세워지면서 역장의 관사와 역원의 집,
그리고 밥집이며 점방들이 처마를 맞댄 옆에 몇 채의 새 집이 들어서고 주막과 여각(旅閣)이
어울려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근처에 없던 모양의 동네가, 철갑차와 더불어 새 풍물을 보이며
제법 불어나 정거장 동네는 북적거리게 되었다.
-3권 240쪽 -
서도역은 소설에서 효원이 자신의 친정인 대실을 떠나 매안으로 신행을 올 때 기차에서 내리던
장소이고 청암부인의 손자이자 효원의 남편인 강모가 전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용한 장소이다.
지금, 서도역의 기능은 2002년 새로 지어진 건너편의 새 역사(驛舍)가 담당하고 있으며 소설 속
에서 그려지던 서도역은 1932년에 지어진 옛 모습 그대로 다소 허술하게 방치되어 있다.
‘점잖은 밥 한 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동안을 걸으면’이라는 소설 속의 표현이 ‘식경’(食頃)이라는
한자식 표현과는 달리 색다르면서도 정답게 느껴진다.
거멍굴 사람들
거멍굴은, 정거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철도와 이만큼한 거리에 나란히 길이 난
산 밑을 따라 한 식경쯤 걸으면 보이는, 근심바우 옆, 몇 가호 옹색한 마을이다.
그저 다박솔이나 옻나무, 잡목들이 생긴 대로 우거진 나직나직한 동산들로 이어지던
능선의 풍경이 문득 출렁 높아지는가 싶은 무산(巫山) 봉우리 아래 자리잡은 거멍굴은,
소쿠리 하나 안에 들만치 도래도래 모여 앉은 납작한 초가집들의 마을이다.
- 3권 246쪽 -
매안 이씨의 종가의 이야기가 소설 『혼불』의 중심이라 하지만 이곳 거멍굴 사람들의
사연도 그 중심과 어우러진 또 하나의 중심이다.
‘밤낮 없이 흙밭에 뒹굴며’ ‘거멍물 들인 다섯새 무명 치마폭’을 오른쪽으로 둘러입고
고목의 언저리에 돋아나는 버섯처럼 반촌(班村)의 그늘에서 허리를 낮추고 살아야 하는
처지지만 그들의 삶과 죽음 또한 이 땅에 더불어 숨쉬는 ‘혼불’인 것이다.
밤낮없이 흙밭에서 뒹굴고, 험한 잡일에 식구의 연명을 걸고 있자니, 손톱 발톱을
깎지 않아도 자랄 틈이 없는데, 의복인들 제때에 빨아 입고 지어 입을 수 있으며
간수할 수 있었을까. 그저 몸에 꿰고 나가면 석 달 열흘이 지나도 철이 바뀌기 전에는
누더기가 다 되도록 갈아입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어떻게 흰 무명옷으로 떨쳐입을 수 있으리요.
거멍물 들인 다섯새 무명 치마폭을, 그나마도 ‘거들치마’라 하여 몽당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바짝 치켜 올려 입어야 했으니, 때묻은 고쟁이 속옷이 덜름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기 예사였다. 때깔나게 발등에 찰랑거리는 치마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치맛자락 여미는 데도 법도가 있어, 거멍굴의 아낙들은 모두 상것, 천민이라
오른쪽으로 자락을 둘러 입었다. 그것이 법이었다. 왼자락 치마를 입을 수 있는 것은
반가(班家)의 부인들뿐이었다. ‘거들치마’말고는 ‘두루치’가 있는데, 이것도 폭이 좁고
길이도 짧아 낡아빠진 고쟁이가 드러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치마라고 해야
정강이나 덮는 둥 마는 둥이었다. “새벽 질삼 질기는 년, 사발옷만 입고 간다.”는
민요가 생길 만한 것이다.
“죽고 살고 엎어져서 논 매고 밭 매도 이년의 목구녁에는 보리죽이 닥상이고
(마땅하고), 손톱 발톱 다 모지라지게 베를 짜도, 내 평생에 얻어입는 것은
요 사발만헌 두루치 한 쪼각이여.”
그것은 항상 옹구네가 내뱉는 한숨에 섞여 터져 나오는 넋두리였다.
그렇게 구차한 의복에다, 몇 백 년을 두고 상민들에게는, 값비싼 주옥과 보패를
지니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복색에 있어서도 황 ․ 자 ․ 홍색을 금하였으니,
옷고름짝 반토막 고운 빛이 없어 거멍굴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 1권 101쪽 -
나중에 들러본 혼불문학관 안에 전시된 “혼불 가계도 및 사건연보”에는 그런 옹구네를
부정적 세력으로 분류를 해놓았지만 그것은 너무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 속에 그려진 옹구네의 모습이 그악스러운 면이 없진 않지만 매안 양반들의 모습도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거멍굴에서 남쪽으로 한 식경쯤 걸어가는” 고리배미 마을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대장장이와
이른 바 팔천(八賤) 중에서도 가장 천하게 인식되던 백정과 무당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서도역에서 혼불마을로 가는 길에 거멍굴로 가는 이정표가 서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장소를 안내하기 위해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였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거멍굴과 고리배미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아내와 나는 간간히 차를 세우고 소설 속에서 이곳에 살았던 공배네와 평순네, 춘복이와
옹구네, 백정인 택주와 그의 아내 달금이, 무당인 당골네와 대장장이 금생이 등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지만 우뚝 선 노적봉은 변함없이 거멍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일 낫을 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날카로운 날끝이 노적봉 기슭의 매안이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와 낫의 모가지가 기역자로 구부러지는 지점이
새로 생긴 정거장이며, 그 목이 낫자루에 박히는 곳쯤이 무산 밑의 근심바우,
거멍굴이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와 맨 꽁지 부분 손 잡는 데에 이르면,
고리봉 언저리 민촌 마을 고리배미가 된다.
- 3권 269쪽 -
저수지 청호(碃湖)
마을에는 “작은 둠벙같은 방죽”이 있었다. 그러나 ‘여름 농사철 한 보름만 비가
안 오면, 사람들이 저마다 목을 꺽어 하늘을 올려다 볼’ 정도로 가뭄을 탔다.
“저수지를 넓게 파도록 허자.”
고 청암 부인이 영을 내린 것은 부인의 연치 서른아홉일 때였다.
그때 막 홍안의 소년이 된 열네 살 이기채는...<중략>...
“지금껏 아무 일 없이 몇 백 년을 살아왔는데, 대대로 조상께서도
안하신 일을 어머니께서 왜 시작하려 하십니까?”
청암부인은 웃었다.
“그보다 더 몇 백 년 전에는 저 방죽마저도 없었느니라. 그냥 민틋헌 산기슭이었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누군가 거기 처음으로 지맥(地脈)을 끊고 삽을 댄 사람이 있었겄지. 그 사람도
몇 백 년 세월 동안 아무도 안한 일을, 조상께서도 안한 일을 했을 것이니라.”
- 1권 154쪽 -
청호는 소설 속에서 사방 오 리이고, 깊이가 명주실 서너 꾸리가 되는 큰 규모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 가본 청호는 소설 속의 묘사와는 달리 작고 아담한 규모의 저수지였다.
그러나 청호의 공사를 계획한 청암부인의 뜻은 우리가 사는 시대의 메마른 감정으로는
담기 힘든 보다 넓고 깊은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실천 행위
였던 것 같다.
“그 많은 품을 어디서 다 불러오며 얼마나한 시간이 들어야 하겠습니까?
또 그 비용은 다 어떻게 감당하고?”
“연고 없이 다만 품을 팔러 온 사람에게는 삯을 쳐 줄 것이요, 소작을 하는
사람은 그 삯으로 소작료를 탕감하여 줄 것이니라.”
“예에?”
그때 이미 청암부인은 천 석 추수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탕감하여 주신다면?”
“내가 한 해 실농을 한 셈칠 것이다.”
“실농을요?”
“실농을 하면 내 집 곳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소작인의 밥솥도 비어 버리지
않겠느냐? 허나, 이런 일을 하면서 탕감을 해 준다면, 나는 실한 저수지를 얻게
되어 그곳에 물이 넘치고, 일한 사람들은 양식과 품삯이 생기니 일거양득이라,
모두 얻기만 하지 않느냐?” 이기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1권 154쪽 -
종가
원뜸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매안 이씨의 종가는 청암부인과 율촌댁, 그리고 효원과
강모의 생활 공간이자 거멍굴, 고리배미까지 포함하여 고을 전체를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종가의 위엄을 상징하듯 당당한 솟을 대문 안으로는 정원수들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듯 했으나 중문을 다가서도록 인기척이 없어 돌아나오고 말았다.
혼불문학관
2004년 10월 작가 최명희와 그의 소설 『혼불』을 기리는 혼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노적봉이 올려다보이는 곳, 청호저수지 옆 공간에 단아한 한옥으로 지어진 문학관에는
작가의 생전 집필실이 재현되어 있었고 『혼불』에 대한 자료들을 각종 도표와 전시물로
시각화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혼불』에는 우리 민족의 풍속과 관혼상제 등의 전통문화와 민속 관념이 세세하고도
풍성하게 실려 있다. “인간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였으리라.
『혼불』을 읽으며 아내와 나는 ‘우리 것’에 대한 무지를 확인하였고, 부끄러웠으며,
또 그 때문에 더욱 경이로운 감정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윗목의 주칠(朱漆) 삼층장만 하여도...<중략>...장식이 정교하여 기둥과 쇠목, 동자목,
문골 등의 울거미를 모두 골밀이로 둥글게 파낸데다가 주칠도 투명하게 하여, 귀목의
아름다운 나무 무늬를 그대로 살아나게 끼웠다. 기둥의 네 귀퉁이는 불로초 귀감잡이로
싸서 꾸몄다. 그리고 서랍에는 국화 바탕에 칠보 들소가 앙징스럽게 단추처럼 달려 있고,
장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자잘하게 장식한 풍혈(風穴)은 박쥐 풍혈이다.
삼층장 옆에는 의걸이장이 놓여 있고, 실 궤(櫃)와 사방 탁자가 각각 제자리에 앉고
서고 하였다. 사방 탁자의 아래칸에는 신랑 쪽에서 혼서지와 채단을 담아 보내왔던
함(函)이 자리잡고 있다. 함의 앞바탕과 경첩에는 음각 매화문이 새겨져 있어 등잔
불빛을 받아 은은히 빛난다.
대(竹)로 상자같이 네모 반듯하게 짜서 거죽을 채색 종이로 곱게 발라 옷이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둘 수 있는 농, 주석 장식이 단아한 반닫이장이 나란히 맞대고 있는데,
반닫이의 윗장 알갱이에 용목(龍木)을 붙여 만든 화사한 면과 거멍쇠 장식, 칠보문 제비
초리 경첩, 완자문 자물쇠, 열쇠받이, 불로초 장식 등은 과연 난쟁이 목수가 심혈을
기울였다 할 만했다. - 1권 173쪽 -
(저고리의) 깃에는 겉깃 길이, 안깃 길이, 뒷깃, 깃 나비가 다른데, 그것이 섶에 이르면
더욱 복잡하다. 섶 길이, 섶 나비, 섶 아랫나비, 섶 윗나비, 안섶 길이, 안섶 나비, 안섶
아랫나비, 안섶 윗나비…….
그런데 사람마다 깃과 섶에 대한 취향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은
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날렵한 칼깃을 좋아한다. 깃에 따라 섶의 모양도 어울려야
한다. - 1권 246쪽 -
어찌 풍속이나 소품에 대한 지식뿐이랴.
금방 눈발을 쏟아부을 것 같은 흐린 날씨의 적막함을 그리기 위해 사흘동안 방문을
열어놓고 허공을 응시하거나 봄강물이 풀리는 소리를 찾아내기 위해 늦은 저녁에도
강가로 나갔다는 작가의 모국어에 대한 투철한 집념은 『혼불』을 빛나는 우리의
언어로가득 채워 넣었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도 그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끌어안고 살다간 작가 최명희.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 였다고 한다. 혼불문학관을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입구에서 뒤돌아본 노적봉 하늘 위로도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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