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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14 - 전탑(塼塔)의 고장, 의성과 안동

by 장돌뱅이. 2013. 1. 10.

의성의 모전석탑(模塼石塔) 두 기
의성은 남쪽의 군위와 북쪽의 안동 사이에 있다.
그러나 군위에서 안동으로 향하는 여정에 의성을 넣은 것은
단순히 경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성에 있는 두 개의 석탑을 보기 위함이다.
바로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 있는 석탑과 춘성면 빙계리에 있는 석탑으로
모두 5층으로 된 석탑이다.

특히 탑리의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탑이다. 삼국통일기에 세워진 이 탑은 전탑에서 석탑으로
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모든 신라 석탑의 출발점”이 된다고 한다.

인도에서 ‘네모난 무덤’을 상징하는 ‘스투파(STUPA)’에서 유래된 탑(塔)은
원래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양식의 변천이 이루어졌다.

중국을 통해 불교를 수용한 우리나라는 그 영향으로 처음에는 목탑을 축조하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진 목탑은 재료의 특성상 파괴되거나
불에 타기 쉬워 현존하는 목탑은 매우 적다. 조선시대에 지은 속리산
법주산의 팔상전과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등이 목탑의 형식을 간직한
건축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목탑의 한계를 극복하여 좀 더 견고한 탑을 만들고자 노력한 결과
나온 것이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이고 돌로 만든 석탑(石塔)이다.
중국에서는 풍부한 모래를 이용하여 벽돌을 만들어 온 탓에 전탑을 많이
쌓았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재료의 한계 때문인지 전국적으로 유행하지는 못했다.

벽돌을 굽는 대신에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도
만들어졌다. 제작 상의 번거로움 때문인지 역시 많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수학여행에서 한번쯤은 보았을 경주 분황사의 탑이 모전석탑에 해당된다.

분황사탑에 비해 석재의 크기를 좀 더 크게 하고 구조를 단순화 한 탑이
바로 의성 탑리의 석탑이다. 훗날 이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이 된
석가탑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석탑 양식의 변천은 전북 익산의(백제의) “미륵사탑이
부여 정림사 오층탑으로 정리되고 이것이 신라의 의성 탑리 오층석탑으로
전파되어 통일신라의 감은사탑과 불국사의 석가탑으로 발전”되어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갔다고 한다.  

 “알면 보인다” 고 하지만 그 내력과 미술양식사적 가치를 모른다 하더라도
탑리의 석탑은 찾아 볼만하다. 공원처럼 넓은 터에 솟은 9.6미터의 이 탑은
그 토대로 딛고 서 있는 언덕의 높이가 더해져 한결 더 우뚝하고 시원해 보인다.

탑이 만들어진 이래 천년의 세월을 탑은 그 자리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굽어
보고 있었으리라. 숱한 비바람과 햇볕이 스며들어 변해버린 적갈색이 주변에
심어진 나무의 잔디의 초록과 어울리면서도 어딘가 위엄이 스며있다.
무릇 연륜과 경륜이란 그런 것일 게다. 탑 주변에 근래에 세워진 듯한
교회당 지붕의 주황색이 도드라지게 눈에 띄면서도 어딘가 경박스러워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빙산사터가 있는 빙계리는 의성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될만큼 계곡미가 빼어나다.
또한 이곳은 예부터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얼음동굴, 빙혈(氷穴)로 유명하다.
한 여름이 가까울 수록 영하의 찬바람이 불어나와 입구에 얼음을 얼리고 겨울에는
오히려 훈훈한 바람이 나온다고 한다.

빙혈은 원래 바위에 뚫린 굴이지만 지금은 입구에 콘크리트 시설물을 해놓았다.
시설물 안으로 들어가보니 다시 좁은 굴 속에 유리로 막을 쳐놓았다. 실제로 한
여름에 얼음이 어는 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굴속에는 찬 기운이 서려있었다. 

인공시설물 때문에 약간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빙혈에 대한 실망감은
그 옆에 있는 빙산사터의 석탑에서 보상 받을 수 있다. 빙산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절이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조선시대인 1406년 왕명에 의해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탑리의 석탑을 모방했다는 오층석탑 한기만
남아 그 곳이 절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 뒤쪽 언덕에 서있는 탑은 마치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처럼 넉넉하면서도
친근감이 있어 보인다. 아내와 나는 탑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오월의 바람을 심호흡으로 삼키며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안동의 전탑(塼塔) 세 기

지난 번 여행기에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에는 약1500기의 불탑이 있으며
그 중에 전탑은 겨우 5기가 전부이다. 이 중 여주 신륵사의 전탑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북지방에 남아 있고 그중에서도 안동 지방에 세 기가 분포하고 있다.
전탑이 안동지방에만 집중되어 세워진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고 한다.
지질학적으로 이 지역이 질 좋은 화강암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나 공인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의성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차를 올려 남안동 나들목으로 나와 안동 쪽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편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 한기가 서 있다. 옛날 탑을 만들기
위한 벽돌을 구워내던 곳이 있었는지 마을 이름이 조탑동(造塔洞)인 곳이다.
얼마 전까지 5월이면 흰색의 사과꽃이 환하게 피어있는 과수원이었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사과나무가 사라지고 밭은 벌판처럼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다.

“과일 농사 중에 제일 못해 먹겠는 게 사과농사에요.”
오래전 군대에서 만났던 한 친구는 그렇게 말했었다.
봄부터 시작해 수확하기까지의 시간이 제일 길기 때문에 자연 품이
“징글징글하게” 많이 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밭의 주인이 연로하여 이젠 농사짓기가 힘이 들기라도 하였을까?
그러나 그냥 묵혀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뿌리째 뽑아버릴 정도의 사연이라면
아내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과수원이 빈자리가 된 사연과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무엇에
대한 부질없는 걱정을 해보며 탑으로 다가갔다. 사과나무의 풍요로운 배경을
잃어버린 없어진 탑은 마치 철거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원두막처럼 황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전국이 화강암 삼층석탑을 취하고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버렸을
     때 (...) 북부 경북에서는 오히려 전탑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탑파의 역사에서
     별도의 한 장(章)을 만들게 했으니 그 고집으로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되었다 는
     것은 오늘날 지방문화의 창달에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 조탑동 5층 전탑
     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1층 감실을 지키고 있는 두 분의 인왕상 모습이다.
     법계(法界)를 수호하는 경호실장급의 이 신상(神像) 두 분은 무서운 퉁방울
     눈에 태권도의 공격과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공격하는 분은 입을 벌리고
     방어하는 분은 입을 다문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석굴암에서도
     보았고 경주 분황사에서도 본 바 있는 도상이다. 그런데 조탑동 오층전탑의
     인왕상은 무섭지도 위엄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귀엽기 짝이 없다. 사람을 겁
     주거나 놀라게 하기는 커녕 꿀밤 한 대 먹이지도 못할 애기 주먹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중에서 - 

가지고 간 책 속에서 이 5층 전탑이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읽어보아도
사과나무에 대한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시대는 옛것과 새것의
조화로운 어울림에 대해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아내와 나 같은 비전문가에게 어떤 유적이나 유물의 세부적 아름다움은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것들이 주변과 어울린 모습은 쉽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며 그것은 문화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안동의 또 다른 벽돌탑인 신세동 7층
전탑을 보면 그런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탑은 국보 제16호로 17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높이에 계산된 몸돌의 적절한 체감률로 안정되어 보인다. 

그러나 바로 옆에 철둑이 지나면서 그 입지(立地)가 영 옹색하고 답답해 보인다.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 머물러지지가 않는다.일제 강점기에 놓인 중앙선
철길 덕분이다. 게다가 그 시기에 보수를 한답시고 기단부를 시멘트로 경사지게
발라 원형이 손상되어 있다. 1962년 국보로 지정할 때는 옆동네 이름을 착각
하여 실제 탑의 위치인 법흥동대신에 ‘신세동 칠층 전탑’으로 잘못 붙여져
이래저래 어수선하다. 

 

안동역을 바라보고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전탑인 동부동 오층
전탑을 만날 수 있다. 원래는 7층이었다고 하는데, 언제 오층으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바로 옆에 당간지주가 한 쌍이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하는 깃발을 달아
두는 깃대를 받쳐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그런데 당간지주의 이름은 ‘운흥동
당간지주’여서 잠시 헷갈린다. 이 역시 전탑을 문화재로 지정할 때 행정동명의
착오 때문이다. 현재 이곳은 운흥동이 맞다.


한 국시집 아줌마의 선비정신

오래 전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안동을 여행할 때 우리는 안동의 전통음식인
건진국시를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건진국시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은 가는
면을 뜨거운 물에 데치고 찬물에 헹구어 시원한 육수에 고명을 얹어 내는 안동
지방의 전통음식을 말한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안동을 여행하였지만 매번 계절을 맞추지 못하여
(건진국시는 여름음식이다.) 그냥 칼국수로 만족을 해야 했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건진국시집을 알아보았다.
먼저 시청 근처에 있던 귀거래라는 음식점에서 예전에 건진국시를 했던 것이
생각나 전화를 걸어보니 한정식을 주문하면 그 중에 한 가지로 건진국시를
내놓을 뿐 따로는 팔지 않는다고 했다. 아쉬운 일이었지만 국시 한 그릇 먹자고
한정식을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 알게 된 곳이 안동의 서부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다는
‘안동건진국시’ 집이었다. 찾아가보니 식당은 학교 맞은 편 작은 골목 안쪽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곳에서도 건진국시는 팔지 않았다.
인상 좋은 주인 아줌마(할머니)는 6월부터나 시작한다고 하며 그때까지는
그냥 칼국수를 판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자리를 잡고 칼국수를 주문했다. 

 

식당 내부는 열 명 이상은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는데 이미 앞서 온 사람들로
하여 아내와 나의 자리만 겨우 남아 있었다. 안동에서는 칼국수를 주문하면
마치 애피타이저처럼 젓갈과 야채 등의 반찬과 함께 조밥이 먼저 나온다.
아내는 멸치젓에 쌈을 먹으며 조밥만으로 배가 부르다고 했다.

칼국수를 먹으며 옆자리의 손님을 통해 이 식당이 안동에서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름난 식당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학교 선생님
들부터 법원과 경찰의 공무원, 방송국과 신문의 기자‘들도 많이 다녀간다는
것이었다. 시에서 지정한 건진국시집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가셨을 것 같은데...”
나는 벽면에 다른 유명 음식점에 붙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캡쳐한 사진
액자를 생각하며 물었다. 손님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주인아줌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벽면엔 액자는커녕 메뉴와 가격표도 붙어 있지 않았다.

주인 아줌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그런 거 안해요. 몇 번이나 방송국에서 찾아왔지만 거절했지요.
오는 손님들도 제대로 못해주는데 더 광고해서 뭐 할려고요.”
안동국시집은 11시에서 오후 2시 정도까지, 그러니까 그날 준비한 재료만 팔고
식당문을 닫는다고 했다. 이 날도 아내와 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옆손님이
마치 우리가 행운아들이라는 뉘앙스를 풍긴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 했다.

뭔가 예감으로 지펴 오는 게 있었지만 나는 눈치 없는 사람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전국방송을 타시면 안동에 오는 타지 여행객들이 몰려오게 될 것이고
솔직히 돈도 많이 버시게 되잖아요.”
주인아줌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철부지에게 말하듯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돈이요. 글쎄요. 많으면 좋겠지만 하루 이삼만원어치 팔아서 남는 돈에 맞춰
살면 되지 더 많아서 뭐에 쓰게요. 자식들과 며느리들에게도 다른 건 못 물려
주지만 돈에 욕심내지 말라고는 가르치지요.”
아내와 내가 식당을 나서자 주인은 정말 문을 닫았다.
오후 2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칼국수 가격은 앞서 나온 조밥과 합쳐서 놀랍게도 2천5백원이었다. 

아내와 나는 양반정신이며 선비정신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사흘 굶고 냉수만 들이켜도 시치미를 떼고 헛기침만 크게 하는 허세를
말함이냐고 비아냥거린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안동 식당에서 만난
주인 아줌마의 태도를 우리는 물질만능의 세태에 기죽지 않는 ‘양반 안동’의
깔끔함과 당당함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안동 사람을 일컬어 “대추 한개 먹고 요기한다” 고 말한다.
그녀가 안동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정신세계에 안동의
그런 검소함과 의연함의 깐깐한 전통이 스며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지난 5월 17일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다.
안동 한 교회의 곁방에서 종지기로 살기도 하며 “몽실언니”를
비롯한 주옥같은 100여 편의 동화를 써낸 그가 생전에 말했다.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야. 내가 두 그릇의 물을
   차지하면 누군가 나 때문에 목이 말라 고통을 겪는다는 걸 깨달아야 해.
   그래야 올바른 세상이 되지."

그의 아름다운 정신과 실천적 삶이 단순히 안동의 것일 수만은 없지만,
국시집 아줌마의 기억과 더불어 최소한도 우리 사회에서 '안동'이라는 지역이
차지하고 있는 상징성과 잘 어울려 보인다고 생각했다.
(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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