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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태릉 - 문정왕후

by 장돌뱅이. 2013. 2. 18.

왕에게는 대체로 세 가지 호칭 있었다.
첫 번째는 어렸을 때 부르는 초휘(初諱)나 호(號), 자(字),
두 번째는 시호(諡號), 그리고 세 번째는 묘호(廟號)가 그것이다.

시호와 묘호는 왕이 죽은 뒤에 신료들과 후계왕이 선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지어 올리는 이름이다.
(시호는 재임 중 왕에 대한 찬양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시호는 보통 8자로 정해지나 경우에 따라 12자에서 20자가 되기도 하는 긴 이름이다.
세조의 시호가 만들어진 경우를 보면 그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애초에 신하들이 ‘열문 영무 신성 인효’(烈文英武神聖仁孝)의 8자로
세조의 시호를 지어 올리자 예종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다시 ‘승천 체도 지덕 융공 열문 영무 성신 명예 인효’
(承天體道至德隆功烈文英武聖神明睿仁孝)의 18자로 올렸으나
여전히 흡족해 하지 않아 결국 세조는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의숙 인효’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懿肅仁孝) 라는 20자의 긴 시호를 갖게 되었다.
가히 좋은 한자는 다 들어간 것 같다.

묘호는 우리에게 익숙한 ‘태정태세문단세...’를 말한다.
‘조’(祖)나 ‘종’(宗)의 차이는 엄밀히 말하기는 어렵다.
공(功)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德)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 하였지만 대개 ‘종’보다는 ‘조’를 높게 받아들였다.
영조와 정조는 처음에 영종과 정종이었다가 나중에 바뀌었다.

세조의 경우를 보면 묘호의 의미도 이해하기 쉬워진다.
세조가 승하하자 신하들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의
세 가지를 묘호로 지어 올렸다.
예종은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종(宗)이란 이름 속에 선왕의 아킬레스건인 왕위 찬탈을
대업으로 평가하지 않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예종은 “대왕께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을 알지 못하는가” 라고
질책하여 묘호를 세조로 바꾸었다.

권력의 핵심이었던 왕은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모든 일이 정치적으로 규정되었다.
묘호나 시호도 결국 후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죽은 뒤에 묻히는 능의 모양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법에 따른다고 하나
권력의 강약에 따라 혹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그 형태는 다르게 만들어졌다.


*위 사진 : 문정왕후의 태릉

중종(中宗)의 제2계비이자 조선 13대 왕인 어린 명종의 생모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은 ‘조선의 여주(女主)’답게 웅장하다.
그러나 ‘강화도령’에서 일약 왕으로 ‘스카웃’ 되어 큰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철종의 예릉(睿陵 경기도 고양) 경우도 역시 거창하다. 이는 조선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보이고자 했던 대원군의 의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태릉(泰陵)’으로 부르는 곳에는 문정왕후의 태릉과
명종(明宗)과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강릉(康陵)이 있다.
따라서 태강릉(泰康陵)으로 부르는 것이 맞겠으나
생전에 어머니의 명성에(?) 가려졌던 명종은 죽은 뒤
능의 이름에서도 존재감이 미약해 보인다.


*위 사진 :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

문정왕후 하면 승려 보우(普雨)가 생각난다.
조선 건국 이래 신흥 사대부 유생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불교는
문정왕후의 강력한 지원 아래 중흥의 기회를 맞게 된다.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된 보우는 그 중심에 있었다.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가 각각 선종과 교종의 사찰로 선정되었고
전국 300여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되었다.
부활된 승과 제도를 통하여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에는 유명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 세력들은 고려 말 지배세력과 결탁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억압하는 정책을 펴왔었다. 불교 부활에 대한 이들의 반대도 극심했다.

때문에 보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유학자인 율곡 이이는 보우를 ‘요승(妖僧)’이라고 폄하한 반면에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천고에 둘도 없는 지인(至人, 성인)’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보우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문정왕후가 죽고 난 후 반년 동안 보우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천여 건의 상소가 빗발쳤다. 보우는 끝내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지난 시대에 대한 엄정한 반성과 개혁에 바탕을 둔 스스로의 불교 재건이 아닌
권력에 의존하여 중흥을 도모하고자 했던 '왕실 불교' 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권력에 빌붙는 종교의 작태...그것이 어디 옛날이야기만일까?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옆에 묻히려 서삼릉에서 중종의 왕릉을
지금의 삼성동 선릉으로 옮겨왔으나 끝내 자신은 그 곁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과정이야 어쨌든 마지막 안식을 남편의 곁에서 누리고 싶어했던
‘철의 여인’에게서 부부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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