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동쪽 끝, 망우리가 고향인 내게 동구릉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단골소풍 장소였다.
동구릉에 가기 위해선 이른 아침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여
이열 종대로 긴 대열을 이루며 두 시간 정도 걸어가야 했다.
흙먼지 풀썩이는 먼 길 위로 오월의 햇살은 따가웠고 다리는 뻑적지근하여
'니꾸사꾸' 속의 해태캬라멜과 칠성사이다, 찐 달걀과 소세지가 든 김밥이 아니라면
동구릉은 당시의 우리들에게 매력이 있는 소풍 장소는 아니었다.
그저 소나무와 참나무의 울창한 숲과 수건돌리기 하기 좋은 넓은 잔디밭,
부드러운 곡선의 언덕 위에 갖가지 모양의 석재 장식물이 있는 커다란 무덤일 뿐이었다.
집과 학교 가까운 곳에도 그 정도 규모는 아니라해도 나무숲과 풀밭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구태여 힘들게 다리품까지 팔아가며 동구릉까지 갈 이유는 없다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위 사진 : 왕릉의 부드러운 곡선이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 고향 마을 가까이에서 숲과 풀밭이 사라진지 오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콘크리트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마른 먼지 날리던 흙길 또한 사라졌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선 맨땅을 딛고다니기조차 힘들다.
예전의 풍경을 보기 위해선 차를 타고 서너 시간을 나가야 한다.
그러나 동구릉은 여전하다.
숲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잔디와 봉분은 여전히 초록으로 부드럽다.
능이 지닌 음덕이 개발의 욕망과 맞서 주었기 때문이다.
설사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구릉은 그런 사실만으로 조상이 우리에게 남겨준 커다란 유산이 된다.
*위 사진 : 건원릉 앞의 석상. 다부지면서도 귀엽다. 만화영화의 캐릭터로 써도 좋아보인다.
*위 사진 : 건원릉. 이성계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 묻히길 원했으나 아들 태종이 이곳에
모시면서 대신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봉분에 덮어주었다고 한다.
억새는 자주 깎으면 죽는 특성이 있어 1년에 한번 한식날에만 깎는다.
동구릉은 조선 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한
조선 왕와 왕후의 아홉개의 능이 있는 곳이다.
동구릉으로 가기 위해 '태정태세문단세'의 삶이나
능의 세부 내용과 문화사적 가치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무심으로 들어가 걷는 것만으로,
걷다가 힘들면 나무 그늘에서 천천히 쉬는 것만으로,
철따라 현란하게 펼쳐지는 식생의 변화를 느껴보는 것만으로
동구릉행은 축복이다. 지식은 그 다음이다.
북한산이나 관악산 등의 자연적인 산을 제외하면
현재 서울 지역 생활권 속의 녹지나 공원의 면적은 3%라고 한다.
이는 뉴욕의 13.6%, 런던의 10.9%, 베를린의 9.3%에 비해 너무 낮은 수치다.
우리 사회가 숨가쁘게 추진해온 개발의 뒷모습일 것이다.
서울과 그 인근에 남아있는 왕릉은 그래서 더욱 존재의 의미가 빛난다.
150여 년 전에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조성하면서 사람들은
"지금 이만한 넓이의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 후 뉴욕은
그만한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율은 어쩌면 삭막한 환경과도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환경은 단순한 시각의 즐거움을 넘어서
몸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되고 풍요로운 정서의 인자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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