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519년 동안 27명의 왕을 두었으며 왕비와 빈 등의 묘를 합쳐 42기의 능을 남겼다.
그 중에 북한에 2기가 있어 남한에는 40기의 능이 있다.
(폐위가 된 광해군과 연산군의 묘는 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당종의 장릉을 제외한 나머지 능은 모두 서울과 그 근교에 몰려있다.
생전에 절대권력을 누렸던 왕은 장례의 절차도 그에 걸맞게 국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집행되었다.
임종이 가까우면 왕의 머리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뜨는) 동쪽으로 향하게 했다.
왕의 입과 코 사이에 고운 햇솜을 얹어 놓는 촉광례(觸纊禮)로 죽음을 확인하게 되면 곡(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의 혼이 멀리 가기 전에 다시 불러오는 초혼(招魂)의식을 시작하였다.
초혼은 내관이 왕이 평소 입던 옷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상위복(上位復, 임금의 혼이시여 돌아오소서)”을 세 번 외치는 것이다.
왕의 혼이 자신의 옷을 알아보고 되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 전에
몸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옷을 다시 지붕 아래로 던졌고
밑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내관이 이를 받아서 급히 왕의 몸 위에 덮었다.
왕의 혼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기간은 5일이었다.
5일이 지나도 왕이 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치렀다.
조선의 능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선최고의 풍수가들이 찾은 명당에 들어서 있다.
왕릉 주위에는 해자(垓字)를 파서 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고 물이 잘 빠지도록 하였다.
해자 밖에는 산불을 피하기 위해 나무를 배어냈는데 이를 화소(火巢)라 한다.
화소 뒤로는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거북의 등처럼 생긴 소나무 껍질은
북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한 짐승인 북현무(北玄武)를 의미한다.
능은 언덕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앞쪽은 습하기 쉬워서 능림을 조성할 때
이곳에는 습지에서 잘 자라는 오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서울의 남쪽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에는 17,000여 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다.
헌인릉은 조선 3대왕인 태종(太宗)과 정경왕후의 헌릉과
23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을 합친 이름이다.
*위 사진 : 태종과 정경왕후의 헌릉
태종은 오래 전 텔레비전 연속극 “용의 눈물”에서 보았듯
2차에 걸친 형제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것은 이방원이라는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의 개인적인 야망에 더한 건국 초기의 왕권확립의 한 과정이었다. 유난히도
긴 그의 시호(죽은 뒤에 붙여진 이름)는 그런 참혹한 과정을 감추고 싶었던 권력집단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그의 시호는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그의 기일인 음력 5월10일에 오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한다.
벼농사에는 음력 5∼6월의 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라 생전에 수리(水利)사업에 많은 치적을 남긴 태종에게서 유래된 말일 것이다.
태종우는 맞으면 몸에도 좋다고 하던 학창 시절의 친구가 있었는데 산성비가 내린다는 요즈음에는 어떨지......
*위 사진 :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
우리가 배운 이른바 ‘세도정치’는 19세기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순조는 조선 제 22대왕 정조(1752-1800)가 죽고 난 후 불과 11살에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다.
정순왕비는 경주 김씨 출신으로 그의 일가는 정조의 정책을 반대하던 벽파(僻派)의 핵심이었다.
벽파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통해 반대파인 시파(時派)를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조의 친인척과 측근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순조는 15세가 되자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하였으나 이번엔 왕비인 순원왕후가 속한 안동 김씨
문중의 세도정치가 이어져 중앙의 요직을 이들 일족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원인을 단순히 나이 어린 왕이었다는 우연적인 요소로 보는 것은 텔레비전 사극의 관점일 것이다.
그보다는 전반적인 사회 변화의 욕구가 기존의 지배 체제를 흔드는 상황에서 힘이 있는 세력의 힘을 빌려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지배층의 '힘겨운' 노력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
어쨌든 헌인릉에는 성장기의 서슬 푸른 왕과 쇠퇴기의 ‘피곤한’ 왕이 함께 누워있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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