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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9 - 금강송(金剛松)

by 장돌뱅이. 2013. 3. 5.

금강송(金剛松)의 고향, 소광리
36번 국도는 영주-봉화-울진을 잇는다.
영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봉화를 지나 울진으로 향하다 보면
길은 산허리와 등성이를 돌고 넘으며 ‘구절양장’, ‘첩첩산중’이란 말을
실감나게 한다.

아내는 그런 길을 지날 때마다 늘 “강원도길 같다” 고 표현한다. 아마 결혼
전 교직에 있을 때 경험했던 강원도 산골의 길들을 떠올리는 탓이리라.
경상북도의 북부지방을 농담 삼아 ‘강원남도’라고 부르는 사람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중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드나들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물론 지금도 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면 이곳은 그 어디로부터도 접근이
어려운 오지에 속한다. 오지는 개발이 안되어 고립되고 불편한 지역이라는
의미와 자연이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는 청정 지역이라는 환경적인 의미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국토의 여러 곳에서 서로 부딪히고 있는 이 두 가지 개념
중에 어느 것에 우선을 두어야 하는지는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자연 원래의 모습이라는 근본적인 가치는 개발이라는 열풍이 지나간 곳에서는
종종 상실되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단순히 경제적인 이득의 문제를 떠나서 관련자들이 좀더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시각으로
검토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봉화에서 춘양을 지나 동쪽으로 향할수록 길 좌우의 산봉우리에 늘씬하게 쭉쭉 뻗은
붉은색 몸통의 잘 생긴 소나무들이 많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의 소나무’ 라는 금강송이다. 몸통의 색 때문에 적송(赤松), 재질이 강하다고 강송(剛松),
왕실의 관곽재로 사용되어 황장목(黃腸木), 봉화의 춘양역을 통해 대처로 실려 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등으로 부르고, 심지어는 적룡(赤龍) 또는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송은 나무줄기가 높고 곧게 자랄 뿐 아니라 속고갱이가 치밀하고 단단해서
켠 뒤에도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궁궐이나 사찰의
건축과 복원에도 쓰였다. 금강송은 북으로 금강산 일대에서 남으로는 강릉, 삼척,
울진, 봉화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중추 부위에 분포한다.

‘춘양목’이라는 별칭을 낳은 춘양의 금강송은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 이전까지는 산림이 워낙 울창하고 베어나는 양이 많지 않아 숲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지역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철도를 건설하고
제재소까지 세워가며 마구잡이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만약 해방으로 일제의 철도 건설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더 깊숙한 곳의 금강송 마저 모두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춘양에서 보듯 일제가 강점기 동안 우리 땅에 들여오고 세운 모든 제도와 시설은
단 한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 국민에 대한 효율적 통제와 식민지
자원에 대한 무한정의 수탈이다. 지금도 간간히 저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경제발전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공적설은 참회할 줄 모르는 뻔뻔스런 도둑의 망언일 뿐이다.

일제의 수탈을 넘긴 후에도 춘양의 금강송에 대한 남벌은 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50년대에 들어 춘양과 석포, 영주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춘양은 금강송 반출의
중심지가 되었다. ‘춘양목’이란 이름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지금 다시
숲을 이룬 소나무들은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가지가 뒤틀려 ‘못생긴’ 탓에 쭉 뻗은
나무들만 찾던 벌목꾼들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던 나무들이 자란 것들이다.

때문에 오래된 ‘춘양목’ 숲을 만나려면 36번 도로를 타고 좀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36번 국도를 따라 울진 방향으로 노루재를 넘고 통고산 들머리를 지나 울진 서면의
광천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광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 소나무 숲의
원형’이라는 소광리 숲에 닿는다. 소광리는 광천교에서 포장과 비포장이 반복되는 길을
30분 가량 차로 가야하는 길이다. 얼마 전까지는 완전한 비포장의 흙길이었으나 근래에
매스컴을 통해 이른바 ‘비경’으로 이 지역이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어나자 포장이
시작된 것 같다.

소광리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골마다 하얀 바위와 자갈 사이로 초록빛이 물든 맑은
물이 흐르고 솔내음 가득한 숲은 울창하여 한 여름에도 서늘함이 짙게 드리운다.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늘 쫓기 듯 다녀와야 하는 일정은 아내와 나의 여행에 있어
유일한 아쉬움이다. 소광리에 이르는 길은 하루쯤 시간을 잡아 느긋하게 걸어서
다녀와야 했다. 그랬다면 우리의 국토와 자연이 더욱 넓고 깊게 느껴졌을 것이다.

소광리 숲의 소나무들은 수령 150년, 높이 23미터, 직경38cm의 평균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수치는 산술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고 숲길을 걸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소나무들은 우람하기 그지없다. 수백 년이나 되는 나이에 높이가 무려 35미터가
되는 거목에, 밑둥치의 지름이 1미터가 넘는 것도 있다.

소나무는 한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고 한다.
실례로 2004년 6월의 한국갤럽이 조사한 분야별 선호도 조사에서 소나무는 은행나무나
단풍나무 등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수위를 차지한 바
있다. 소나무는 자원으로서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자연인 것이다.

   본디 송(松)이란 유덕(有德) 심정(心正)한 단인정사(端人正士)의 품격으로,
   기개는 준초(峻?)하고 자태는 잠룡(潛龍)이니, 이 속된 세상의 먼지 속에 서
   있으나, 저 깊숙한 산속에 홀로 서 있으나, 그 나무 있는 곳은, 물 속 같은
   유곡(幽谷)의 그윽함을 느끼게 하지 않느냐.
   비록 젊어도 예스러운 풍치를 저절로 지니고 있는 것이 소나무지만, 또 해가
   묵어 둥치가 늙어도, 늙을수록 그 자세와 기상이 힘있고 젊어서 감히 범하기
   어려운 것이 소나무인지라, 신묘한 풍모라 아니하랴. 무릇 형체 가진 것 중에
   그만큼 아름다운 모양과 기를 타고 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니라.
                                        - 최명희의 소설, 『혼불』중에서 -

우리나라 사람에게 소나무는 정신의 세계를 공유하는 영물(靈物)이기도 하다.
태어남과 동시에 솔가지를 매단 금줄로 나쁜 기운을 막고, 죽으면 소나무로 된 관 속에
누워 솔숲에 묻힌다. 무덤 주위에 둥그렇게 서 있는 소나무의 기운으로 영혼은 편안히
잠들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이런 소나무는 도래솔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우리들과는 달리 오직 ‘신발 한 켤레의 토지’ 위에 서서
   이처럼 우람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고 경이였습니다. 생각하면 소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도 무엇 하나 변변히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소광리의 솔숲은 마치 회초리를 들고 기다리는 엄한 스승 같았습니다.
                                                  -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중에서 -

또한 소나무는 또 혼탁한 세파에 흔들림 없는 고절(孤節)의 상징이었다.
겨울의 찬바람을 견디어내는 청청한 기운의 「세한도」가 그렇고,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던 죽음을 무릅쓴 충신의 올곧음이 그랬다.

게다가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만든 흉년의 송기(松肌)떡은 그 어떤 정신보다 위대했다.
우리의 지명 가운데 소나무 송(松)자가 들어간 곳이 600여 곳이나 된다는 사실과
소나무의 솔이 우두머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정서와 생활에 가까운 소나무가 자연적인 질병과 무분별한
벌채, 그리고 경제개발의 논리에 밀려 그 식생 면적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결과로 얼마 전 끝난 경복궁 복원 공사에는 높이 18미터 직경 70CM 이상의
소나무가 필요했으나 국내에서는 찾을 수 없어 결국 외국에서 수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소광리에서 할 일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걸어보는 일이다.
모든 나무는 피톤치드라는 산림향을 발산한다. 소광리의 솔숲은 다른 곳보다
유난히 그 함량이 높고 남다르다고 한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어보았다.
시원하고 청신한 공기로 가슴이 부풀어 오름을 느껴졌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돌봐주는 이 없어도 스스로 장관을 이룬 소광리의 숲은.


불영계곡과 불영사(佛影寺)

소광리에서 다시 36번 국도로 돌아와 다시 울진으로 향한다.
길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화강암의 계곡이 희고 깊다. 계곡 주변의 산에는 온통
금강송이 빼곡하다. 울진(蔚珍)이란 지명은 삼국통일 직후에 이 지역을 찾은 김유신이
“산림이 울창하고(蔚) 진귀한 물산(珍)이 풍부하다”고 일컬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모습은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울울창창한 숲 속에는
남방계와 북방계의 동식물이 공존하며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산양도 살고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불영계곡은 그림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진경산수’의 동양화가 곳곳에 있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차를
세우게 된다. 한마디로 장엄하다.

불영계곡이란 이름은 불영사에서 비롯되었다.
불영사는 그 옛날 의상대사가 연못에 비친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이름을 그리 지었다고
한다. 숲과 바위와 물이 이루는 불영계곡 전체의 모습이 내겐 극락정토처럼 느껴진다.

불영사는 계곡을 건너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숲이
터널을 이룬 길이 5백 미터 가까이 이어진다.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만드는 호젓한
길이다. 그 길 끝에 소박하고 단아한 불영사가 있다. 연못과 주변의 잔디, 흙길과
깔끔한 절마당, 그리고 야트막한 담장이 포근하고 소박하게 다가오는 절이다.

불영사가 위치한 자리는 불기(火氣)가 있는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불영사는
절이 지어진 후 몇 차례의 화재를 겪었다. 그 때문에 대웅보전의 기단 아래에는
돌거북이 한 쌍이 머리만 불쑥 내민 형태로 묻혀 있다. 이는 불기를 누르기 위해
물의 신인 용왕을 모신 것이라고 한다. 마치 대웅전을 짊어지고 끙끙거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맡은 천년이 넘게 ‘화재 예방’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거북이가
귀엽게 보였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국토의 곳곳이 화재로 불타곤 한다. 수백 년 된 숲과 문화재가
일순간에 재로 변했던 안타까운 기억을 우리는 갖고 있다. 아내와 나는 용왕의
영험으로 불영사뿐만 아니라 금강송이 우거진 불영계곡 전체가 그런 재난으로
부터 영원히 무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돌거북에게 빌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금강송불(南無金剛松佛)!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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