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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7 - 장항 그리고 나포들

by 장돌뱅이. 2013. 2. 28.

장항에서


아내와 나는 충청남도 장항의 도선장 옆 공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차창 밖으로 금강이 그 폭을 한껏 넓혀 서해바다와 어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군산항이 건너다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도시와 두개의 도가 마주보고 있는 곳은
군산과 장항이 유일하다고 한다.

도선장에는 벌써 며칠 째 요지부동인 동장군(冬將軍)의 기세에 눌린
탓인지 오고가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푸른빛으로 더욱
추워 보이는 항구의 물결 위론 가끔씩 갈매기만 스쳐 지나갈 뿐
단단하게 결박된 배들처럼 창 밖의 모든 것은 얼어붙은 듯 보였다.

장항과 군산을 잇는 여객선을 알아보러 도선장 매표소로 가려고
차문을 열자 칼끝을 세운 바람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매표소가
있는 대합실 안에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한 분만 매점을 겸해서
지키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추위도 추위이지만 금강하구언이 생기면서 장항과 군산을 잇는
수단으로서 여객선의 비중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배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산과 장항을 왕복하는 배의 실제 승선 시간은
편도 20분 정도였지만 대기시간까지 고려하면 왕복 한 시간 넘게
잡아야 했다.

매표소 아저씨는 충청도 사투리의 느긋한 억양으로 승선을 권했다.
우리는 잠시 고민을 나눈 끝에 배를 타지 않기로 했다. 해가 더
기울어지기 전에 금강하구언을 건너 군산 쪽의 나포들녘으로 가
새들의 비상(飛上)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여행을 하다보면 자주 한 시간 정도가 모자란 경우를 경험
하게 된다. 장항에서도 그런 징크스(?)를 만난 것이다.
한 시간만 일찍 나섰더라면, 좀더 서둘렀더라면...
그것이 하루나 혹은 일주일이 아닌 단 한 시간이라는 데서 아쉬움은
반비례로 커진다. 그런 줄 알면서도 늘 반복하는 미욱함이라니!

아쉬워하는 나에게 아내는 대신에 책으로나마 여객선의 분위기를
느껴보라고 시인 곽재구가 쓴 『포구기행』을 읽어 주었다.
나는 편안함 마음으로 의자를 뒤로 재끼고 누워 눈을 감고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차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짧은 겨울해의 쇠잔한
빛은 히터를 통해 나오는 바람과 섞여 차안의 공기를 알맞게 덥혀
주었다. 스피커에선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케니지 KENNY G의
트럼펫소리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처럼 흘러 나왔다.

   나는 장항과 군산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을 타면서 이 두 도시에
   사는 연인들은 서로 이별하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15분인
   편도 뱃길을 바래다주며 헤어지기가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함께 타고, 막상 한쪽의 도착지에 이르면 또다시 헤어지기 싫어
   맞은편의 항구로 함께 가고...... 그러다가 불빛들이 충분히 아름다운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서야 연인을 내려놓고 혼자 돌아오는 시간,
   연인이 사는 도시 쪽의 불빛을 보면 또 얼마나 아쉽고 가슴 설레일
   것인지...... 이 두 도시의 연인들은 필경 이별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곽재구의 『포구기행』중에서 -

시인의 글로 인적 없이 황량하던 포구가 갑자기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하구언을 건너기 전 차로 장항읍을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지금의 장항은 인구 3만의 작은 소읍이다. 군산과 합한 이른바 군장지역의
인구도 30만이 채 안된다고 한다. 장항이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시절은
군산의 ‘번영기’와 맞물린다. 일제강점기 군산은 한반도에서 수탈한 쌀을
실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더불어 장항에도 쌀중개인들이 모이고
술집과 여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읍내 곳곳의 낡은 집들에선 그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알맹이는 쏙 빼먹고
   껍데기만 남았주
   난로를 끼고 앉아 사내 투덜거리고
   도마질하는 아낙
   조기찌개에 점심을 먹고 나서
   비린내 가시기 전 담배를 문다
   새치름히 흐린 품이 눈이라도 올 듯하다
                 
- 조재도의 시, 「금강하구」중 “장항” 부분-

초등학교 시절부터 귀에 익숙한 장항선과 장항제련소도 그 시기에
일제가 자원수탈이란 목적으로 설립한 서글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리 제련과 구리 제련시 나오는 부산물인 금을 수탈할 목적으로
일제는 제련소를 세웠고 그보다 5년 전인 1931년에는 장항선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앞선 책에서 곽재구는 “역사는 때로 못난 것이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힘들고 고통 받는 시절의 삶을 떠올리며 현재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기 때문” 이라는 말로 장항의 지난 시기를 정리했다.


나포들녁에서
금강을 따라 온갖 물자를 실은 배들이 강경까지 오르내리던 시절, 강을
따라서 수많은 포구들이 생겨났다. 지금도 금강변 곳곳에 울포, 서포,
나포, 웅포, 난포등의 ‘포(浦)’자가 낀 지명이 많다.

오후 4시. 아내와 나는 그런 옛 포구 중의 하나인 나포에 서 있었다.
해질녘이면 황혼의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먹구름처럼 고기떼처럼
솟아오르며 장관을 연출하는 겨울 철새들의 집단 군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강변의 둑에는 기다란 회랑(回廊)이 만들어져 있었다.
회랑의 벽에는 강을 향해 투명한 유리창을 달아 놓았다.
철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관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한다.
야생의 새들은 강둑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강 가운데 쪽으로 몰려
있어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좀더 세밀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회랑 안에 설치된 망원경을 이용해야 했다.

보통 매스컴을 타면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인데 강변에는 예상했던
것만큼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다소 의외였다. 회랑에서 안내를
해주던 한 공무원은 그 이유를 조류독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류독감의 ‘공포’에 대한 ‘보도’ 때문일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조류독감에 감염된 숫자는 137명이며 이중 70명이 숨졌다고 한다.
세계 인구에서 137명이란 숫자가 차지하는 비중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복권 당첨의 가능성보다 낮은 확률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류독감의
공포는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3년간 자동차나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의 숫자도 그것보다 훨씬 웃돌 것이다.
테러나 전쟁에 의한 사망자 수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보다 인간 스스로 인간에
대해 저지르는 야만이 더 크다. 조류독감의 위험성을 가볍게 여기자는
뜻이 아니라 그 때문에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접어둘 필요는
없겠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를 찾는 백이십여 종에 가까운 겨울철새 중 개체수가 가장 많은
종류는 35만내지 40만 마리에 이르는 가창오리이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집단군무의 주인공이 바로 이놈들이다. 아내와 나는 가창오리를
찾았다. 그러나 망원경 속에는 머리쪽의 녹색광택이 선명한 천둥오리
떼만 눈에 들어왔다.

안내원 아저씨는 좀더 강 상류 쪽의 십자들녘까지 가보라고 일러 주었다.
낮 동안에 아래쪽에서 휴식을 취하던 놈들이 한순간에 그리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를 몰고 강변을 거슬러 올라간 십자들녘의 강변에서도
가창오리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맨눈으로 보기에 차가운 물빛의 강물은
매서운 바람을 안고 출렁이고 있을 뿐 새들의 자취는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지금 저기 강 가운데 풀숲 뒤쪽으로 몰려 있어유. 대중없이 지들 맘대로
날아오르니 좀 지둘려야 할꺼유. 해가 지면 김제평야로 날아갈꺼니께 곧
보일거유. 저녁보담은 아침이 보기가 더 수월하구유.”
그곳의 회랑을 지키는 안내원의 말이었다.

아내와 나는 강바람에 몸을 웅크린 채 새들의 비상을 기다렸다.
해가 기울면서 렌즈의 크기가 범상치 않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카메라가 대포의 포신이라면
나의 자동카메라는 소총의 구경이었다. 광학줌에 디지털줌까지 최대한
사용하여 멀리 강심에 있는 가창오리를 당겨보았지만 제대로 된 새들의
모습을 담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카메라가 안되면 눈으로라도 확실히
새들을 볼 작정으로 새들이 있는 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회랑 안팎을
드나들었다. 새들은 강을 따라 길게 앉아 있다가 맨 뒤쪽에서부터 천천히
한쪽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게 솟구쳐 올랐다가
정반대로 방향을 바꿔 자리를 옮겨 앉곤 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큰 탄성이 피어올랐다.
회랑 안에서 몸을 녹이던 아내와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직 해가 완전히 기울지 않았음에도 새들의 거대한 무리가 어지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새들의 몸뚱이가 저녁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황금조각들은 잠깐 사이에 숲을 건너 아래쪽으로 잦아들었다.
셔터를 세 번 이상 누르기 힘든 순간이었지만 농도 짙은 감동과 흥분의
순간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었다. 아내와 나는 추위도
잊은 채 카메라 속의 사진을 되짚어 보며 즐거움의 시간을 늘여보았다.
눈으로 본 만큼의 아름다운 사진은 아니었지만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한번의 장관을 보여주기 위해 유난히 큰 힘을 쏟았던 것일까.
새들은 그 이후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다시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와 나, 그리고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저녁이면 먹이를 찾아 멀리 김제의 만경평야를 향해 날아간다는 안내원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어두운 하늘 속으로 희미하게 먼지같은 무리들이 날아오르는 듯
하더니 이내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아내와 나는 새들이 날아간 검은
밤하늘에 저녁 무렵 그들이 만들어냈던 장관(壯觀)의 비상을 그려보았다.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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