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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5 - 남해 그리고 남해 금산

by 장돌뱅이. 2013. 2. 27.

삼천포-창선대교를 건너며
남해로 가기 위해 사천(삼천포)에서 창선도 쪽으로 다리를 건넜다.
2003년 4월에 개통된 창선-삼천포대교는 중간에 3개의 섬을 징검
다리처럼 딛고 건설된 다리로 사장교와 아치교가 혼합된 총연장
1.5키로미터의 늘씬한 모습이었다.

한 낮이 되었는데도 바다는 안개를 잔뜩 끌어안은 채 놔주질 않고 있어
날씨는 마치 잔뜩 흐린 듯한 모습이었다. 바다의 경계를 지우고 포진해
있던 짙은 안개는 바람을 타고 몰려와 차창으로 연기처럼 스며들기도 하고
섬에 솟은 산등성이를 타고 흩날려가기도 했다.

“안개 한 번 지독하네.”

삼천포대교-초양대교-녹도대교-창선대교를 차례로 지나 남해군에
속한 창선도로 들어서며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자 문득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이 떠올랐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 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중에서 -

돈 많은 아내를 얻어 출세 가도를 달리는 주인공 ‘나’는 제약 회사의
전무 승진을 앞두고 휴가를 빌미로 어둡고 우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고향 무진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지닌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상경을 요구하는 아내의 편지를 받고 잠시
갈등한다. 그는 무진에서 만난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썼다간
찢어버린다. 부끄러움 속에 그는 서울로 돌아간다.

‘사람들의 힘으로 헤쳐버릴 수가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안개 속의 고향에는 혼란과 상처의 기억과 함께
잃어버린 한 때의 동경과 젊은 날의 자신이 있었지만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서울의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소설의 마지막 소제목이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였던가?
그렇듯 산다는 것은 매순간 ‘무진’을 (혹은 '무진'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우리 모두는 그 시간 속을 떠다니는 여행자일 수 밖에 없다.



남해섬 해안도로를 따라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 본섬으로 들어섰다.
창선대교는 창선도의 창선면 지족리와 남해 본섬의 삼동면 지족리를 연결한다.
양쪽의 지명이 모두 지족리 인 것이 재미있다.

창선대교 아래쪽 바다는 시속13-15km의 센 물살이 지나는 지족해협이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식인 죽방렴(竹防簾)을 여럿 볼 수 있다.
죽방렴은 물살이 빠른 물목에 조류가 흘러 들어오는 방향으로 나무말뚝을
부채꼴 모양으로 박아 고기를 가두어 잡는 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순순히
잡힌 고기들은 그물 속에 강제로 잡힌 것들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탓에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때문에 죽방렴 멸치는 값도 더 나간다.


*위 사진 : 죽방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한다.
두터운 하늘의 먹구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깊고 좁은 계곡, 높고 아득한 산.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숲 등에 홀로 서 있는 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기
보다 무섭게 하고 경외감에 휩싸이게 한다. 그러나 인간과 친화적인 교섭이
이루어진 자연은 아늑하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물건리의 마을숲이 그렇다.

“마을숲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별한 목적 아래 보호되거나 혹은 일정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숲으로서, 그 마을의 역사나 문화, 신앙 등 사람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답사여행의 길잡이)

물건리의 방조어부림(防潮魚府林)은 300년 전쯤에 태풍과 염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고기떼를 끌어들인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녹색의 숲으로 고기떼를
모은다고 하여 원래는 방조어유림(防潮魚遊林)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방조어부림이 되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짙은 눈썹처럼 해안선을 따라 둥글게 휘어져 있는 길이 1.5km,
너비 30m의 이 숲에는 팽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후박나무 등의
40여 종의 나무가 엉켜있어 천연 기념물 제 150호로 지정이 되었다.
숲은 마을의 수호신이면서 고기잡이를 위한 작업장이며 주민들의 휴식공간
이기도 하다. 1933년 남해안에 큰 폭풍이 몰아쳤을 때도 물건리는 숲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숲에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는 큰 화를 입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심한 흉년이 들어 이 숲의 나무를 베어다가 세금을 대신했는데 그 날로
마을에 영문 모를 불이 나서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건리 뿐만이 아니라 어디서건 숲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건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독일마을이라 부르는 이색적인 마을이
있다.마치 유럽의 어느 마을에라도 온 것처럼 모든 집들이 서구양식을 따르고
있다. 60년대 독일로 갔던 간호사와 광부들이 은퇴 후 돌아와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원래 고향이 이곳인 분들이 귀향을 한 것인지 아니면 유독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다른 연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조항에 관한 곽재구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글 속에서 미조항의 평범한 모습은 특별하게 색이 칠해졌다. 풍경은 때로
작가의 감성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잠시 시인의
글처럼 미조항을 느끼고 싶어 잠시 부둣가를 서성거려 보았다. 딸아이가
있었다면 “좋은 것은 다 따라 해보려고...” 하면서 아내와 나를 놀렸을 것이다.

   포구는 작고 아늑했다. 몇 척의 현대식 고깃배들이 잔물결에 출렁이고 있는
   선창 풍경은 이곳 바다가 예상 밖의 건강한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천연 기념물 이십구호인가 하는 팻말이 붙은
   상록수림이 포구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선창을 따라 선창의
   끝까지 걸어갔다. 마지막 끝에 배 만드는 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
   이곳에서는 포구 쪽의 불빛들이 아주 잘 보였다. 한순간 옅은 비가 내렸으므로
   그 불빛들은 섬세하게 어룽이며 빛났다. 불빛들은 넘어지며 긴 그림자를
   바다에 드리웠다. 어떤 불빛들은 출렁이는 파도에 떠밀려 정반대 쪽의 내게로
   까지 밀려왔다. 손을 내밀어 나는 부서진 불빛의 한 조각을 움켜잡았다.
       -곽재구의 기행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중에서 -

시인은 미조항의 ‘미조(彌助)’를 ‘미륵이 도왔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우리는 포구의 한 음식점에서 새콤달콤한 멸치회를 먹으며 어쩌면 그것이
‘아름다움이 도왔거나(美助)’ ‘맛이 도왔다(味助)’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위 사진 : 미조항과 멸치회

남해섬의 해안도로는 흔히 ‘절경 팔백리’로 부르는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다.
날이 맑았으면 푸른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남해군만 해도 남해섬과
청선도 이외에 크고 작은 68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볼 수 있었겠지만
안개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남해섬의 해안길을 수려한 경관으로 가득했다. 특히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상주해수욕장은 호수처럼 잔잔하 물과 깨끗한 백사장,
그리고 초록의 솔숲이 한 곳에 모여 더 할 수 없이 그윽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 잔잔하고 아늑한 풍경에는 고고한 품격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위 사진 : 상주해수욕장


흰 안개 속에 잠긴 남해 금산



금산의 북쪽 사면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정상부근의 보리암으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안개는 삽시간에 길을 막고 기암괴석
의 산능선과 발 아래 남해의 바다와 섬이 이루는 절경을 지워버렸다.

누군가 금산은 반드시 바다와 함께 떠올려야 하기에 그냥 금산이 아니라 반드시
남해 금산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지만 안개는 그 적절한 충고도 무색하게 했다.
서른여덟 가지 비경의 금산은 한 가지 우윳빛으로 통일 되어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혹은 살다보면 더러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들과 만난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기대를 갖고 만족을 할 수 있는 여유와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남겨둔 미진한 무엇이 있어야 내일에 대한 기약이 좀 더 실감
나지 않겠는가.

주차장으로 돌아 나오는 길가에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이 새겨져 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이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에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한 여자를 따라 돌 속으로 들어간 사랑과 떠나감의 의미가 내겐 풀기 어려운
숙제처럼 남는 시지만 마지막 구절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에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를 반복해서 읽다보니 어떤
막막함과 홀가분함이 매력으로 남는다.
앞선 미조항에서도 그랬지만 여행 중에 만나는 어떤 매력 앞에서 아내와 나는
쉽게 감정의 ‘표절’을 시도해보곤 한다.

남해 금산 흰 안개 속에 아내와 함께 있네.
남해 금산 흰 안개 속에 아내와 함께 잠기네. 




인간의 풍경, 가천다랭이마을



‘남해 똥배’란 말이 있다고 한다. 국산 화학 비료가 나오기 전 남해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배를 저어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여수로 갔다. 보리농사에
쓸 거름을 만들기 위해 여수 시내의 ‘똥을 거두러’ 갔던 것이다. 산세가 뚜렷하고
평지가 좁은 남해의 척박한 환경을 극복해 내기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남해 사람들의 근면성과 악착스런 생활력을 상징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의 다랭이논들은 그런 ‘남해 똥배 기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이로운 광경이다. 오랜 옛날 지독한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이 물고기나
해초라도 먹을 요량으로 바다를 찾아 설흘산을 넘어 왔다. 그러나 해안은 배
한 척 댈 수 없게 가팔랐고 설흘산은 삶을 걸을 수 있을 만큼의 폭과 깊이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바다를 만나 놀란 듯 급격히 고개를 수그린 급경사의
언덕에 층층으로 다랭이논들을 가꾸는 일뿐이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집념어린 노동에 가천마을의 논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1백여 층이나 된다는
다랭이논은 하나하나마다 적당한 높이의 잔돌을 쌓고 비탈면을 깎아 만든 것이다.
위에서보면 마치 물결이 퍼져나가듯 논둑의 파문이 바다를 향해 퍼져 나가고 있다.
가천마을에 서면 최고의 풍경이란 “인간이 대지에 새긴 삶의 흔적”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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