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이면 저 길을 가리라
일망무제(一望無際) - 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음.
바닷가나 산정상이 아니라 김제의 평야에서 그 말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다.
가을 김제 평야는 익어가는 벼들로 넉넉하다.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름이 광활면(廣活面) 이다. 넓은(廣) 들에서 나는 쌀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니(活) 그 이름을 붙일 만하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는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그 푸르름 속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멀고 작은 점으로 찍혀 있었다.
(...)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 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 안에서도 김제, 만경 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곳이었다.
- 조정래의 장편 소설『아리랑』중에서-
들길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논둑길을 따라 걸었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햇살이 가득한 논뿐이다.
하늘과 논의 경계에 지평선이 그어져 있다. 지평선은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바다에서처럼 김제 평야에서의 거리감은 추상적이 된다.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아득한 길을 걷다가 중간쯤에서 돌아 나왔다.
“언젠가 한 번 시간을 내어 이 들의 끝까지 걸어보리라”
마음 먹어보지만 국토의 곳곳에 그런 다짐을 수도 없이 흘려 놓은 것 또한 알고 있다.
관광버스 한 대가 논길 입구 쪽에 멈추어 서자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나이 드신 분들 수십 명이 내렸다.
모두들 벼가 익어가는 들을 보며 소싯적 추억이라도 떠올리는지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이내 허공에 가득해졌다.
가을이 익어가는 넉넉한 들녘에서 흥이 돋아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따스한데다가 비 또한 넉넉하여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라 오랜 옛날부터 농사가 이루어져 온 곳이다.
이미 백제시대에 사람들은 농사를 위해 ‘벽골제’라는 큰 둑을 쌓아 물을 모았다.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가면 지금도 그 시절에 축조된 긴 둑과 수문을 볼 수 있다.
벽골제는 전장 3키로미터에 5개의 수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제방과 두 개의 수문이 남아있다.
*위 사진 : 벽골제의 제방
벽골제는 제방을 쌓는데만 연인원 32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 밖에 수문 및 하천 공사 등을 헤아릴 때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될 것이라고 한다.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수를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사업이었다.
치수(治水)는 식량 생산에 절대적인 요소로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국가기간시설이기도 했다.
*위 사진 : 벽골제의 수문
식량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논과 농업이 경제적 개발과 비교우위의 논리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정보산업도 금융산업도 자동차산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쌀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이상
논이나 농업을 경제적 가치만으로 저울질해서는 안된다.
아니 경제적 가치로만 따져도 농업은 여전히 국가적으로 수지맞는 ‘장사’이다.
농업과학기술원 자료에 따르면, (...) 벼 생육기간동안 논 1ha는 1만 1713톤의
물을 저장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체 논 면적이 116만 3000ha이니 논이 27억
7000톤의 물을 저장하는 셈이다. 이는 춘천댐 저수량의 18.5배로 다목적댐의
홍수조절능력을 넘어선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쌀 생산액(2001년 기준,
10조 7000억원)을 훨씬 웃도는 14조 6000억 원에 이른다.
벼 생육기간동안 논은 1ha당 연간 9톤의 산소를 방출한다. 논에서 광합성으로
생성되는 산소는 연간 1000만톤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2조 6500억원에 이른다.
논은 또한 매년 54억 5000만 톤의 물을 지하수로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1년간 전 국민이 사용 하는 수돗물 68억 7000톤의 80%에 해당하는 양이다.
논이 저장하는 물은 한여름 동안 에는 적당량 증·발산되면서 대기의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논에서 증·발산되는 물의 양을 수돗물 가격으로 환산할
경우, 1조 5585억원에 달한다.
-2007년 4월 26일자, 「내일신문」-
이 한 가지만으로 농업이 존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밥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과 같은 것 아닌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벽골제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를 개조한 조정래의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아리랑』은 『태백산맥』과『한강』과 함께 작가가 소설로 그려낸 우리의 근현대사이다.
특히『아리랑』에서 김제는 일제의 수탈의 현장으로 등장한다.
‘풍요로웠기에 수탈당할 수 밖에 없었던’ 땅.
*위 사진 :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
3개의 전시실로 된 아리랑문학관은 작가의 꼼꼼한 취재수첩과 자료노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
설을 쓰기 위해 현장답사를 하면서 꼼꼼하게 그림까지 그려낸 작가의 정성이 놀라울 정도다.
김제시에서 발행한 안내서에 작가의 말이 나와 있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 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소설 『아리랑』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중학생이던 72년, 아마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에 인기스포츠였던 고교야구에 빠져 있었다.
군산상고와 부산고의 황금사자기대회 결승. 4-1로 뒤지던 군산상고는 9회 말에
대거 4점을 뽑으며 5대4로 극적인 역전승을 만들어 냈다. 믿기지 않는 경기였다.
홍수환선수의 이른바 ‘4전5기’의 명승부가 70년대 후반 운동경기 중 최고의 명승부
였다면 이 날의 경기는 70년대 전반 최고의 경기라고 할만 했다.
당시에 활약을 했던 김일권, 김준환, 김봉연 등은 훗날 대표팀과 프로야구에서도 걸출한 스타가 되었다.
창단 3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일궈낸 군산상고의 최관수 감독도 스타가 되었다.
군산상고의 투수였던 ‘스마일 피처’ 송상복도 기억에 남는다.
입주위에 상처가 있어 늘 웃는 듯이 보여 붙여진 별명이라고 했다.
이 경기로 나는 단번에 군산상고의 팬이 되었다. 대학 시절 만난 아내도 군산상고의 열성팬이었다.
군산이 고향이기도 했지만 아내 역시 그 짜릿한 역전의 경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술집’이라고 불렀던, 서울운동장야구장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조종규, 김성한, 김용남,
조계현, 백인호 등의 군산상고(출신) 선수들이 펼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우리는 가끔씩 한 여름의 찜통더위를 견디곤 했다.
*위 사진 :월명공원을 오르다 본 군산항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와 함께 김제까지 와서 그런 군산을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제평야에서 군산은 차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작고 이름 없는 포구였던 군산은 1899년 일제에 의해 개항되었다.
김제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고 일본의 공업 제품을 유입하는 수탈의 창구로서 군산을 개발한 것이다.
뒤이어 군산-이리-전주를 잇는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포장도로인 ‘전군가도’(全群街道)와 호남선,
그리고 군산선이 놓이면서 수탈은 가속화된다.
일제의 쌀수탈은 대일 쌀 ‘수출’량 1934년 약 229만석으로 정점을 이룬다.
한 해 전인 1933년 전국 총 쌀생산량이 1천630만석이었고, 일본의 수탈량이 총 870만석이었으니
수탈전진기지로서의 군산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 알 수 있다.
군산의 경기는 호황을 누렸고 군산은 급속도로 외형적인 팽창을 하였지만
그것은 조선 민중의 피와 눈물을 전제로 한 호황이고 팽창이었다.
일본인의 농장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했고 가혹한 소작료에
쫓겨 군산으로 유입된 사람들은 산비탈에 달동네를 이루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급하게 경사진 언덕 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 들이
손바닥만 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듯 다닥다닥 주어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이러한 몇 곳이 군산 인구의 칠만명 가운데 육만명도 넘는
조선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어개를 비비며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 채만식의 소설, 『탁류』중에서 -
군산에서는 예정했던 곳들을 모두 돌아볼 수 없었다.
김제평야에서 해찰을 부리다 군산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해가 벌써 기울어버렸던 것이다.
아내가 다니던 군산제일 초등학교나 야구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던 군산상고, 기차가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난다는 철길마을 등을 생략하고 우리는 월명(月明)공원으로 향했다.
군산에서도 역시 ‘다음에 오면‘ 이라는 다짐을 남겨두게 된 것이다.
월명공원의 월명은 일본식 표기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명월(明月)이란 표기를 더 많이 쓰기 때문이다.
군산에는 월명동이란 이름의 동네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한다.
당시에 군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의 모임인 ‘월명회’가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다고 하니 ‘월명’이 일본인과 가까운 이름이긴 한가 보다.
월명동이나 월명공원뿐만이 아니라 군산은 시전체가 ‘일본의 민속촌’이라는 오명을 가질 만큼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르게 표기하면 군산은 일제 강점기에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80년에 외항이 생기고, 공업단지가 들어서고, 몇 해 전에는 한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건
‘서해안 시대’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했다고 하지만 시내에서 들어서면서 본 군산은, 특히 옛 시청주변은 많이 쇄락한 모습이었다.
월명공원을 오르는 길에 나무들 사이로 군산 앞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날씨가 흐리고 밝은 빛이 사라진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금강의 하구는 무채색의 ‘탁류’로 흐르고 있었다.
올 때마다 가라앉는 것 같다.
군산 앞바다
시커먼 물이 돌이킬 수 없도록
금강하구 쪽에서 오면
꾸역꾸역, 수면에 배를 깔고
수만 마리 죽은 갈매기도 온다
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다.
그것을 아등바등 지우려 하지 않는 바다는
늘 자기반성하는 것 같다
이 엉망진창 속에 닻을 내리고
물결에 몸을 뜯어먹히는 게 즐거운
낡은 선박 몇 척,
입술이 부르튼 깃발을 달고
오래 시달린 자들이 지니는 견결한 슬픔을 놓지 못하여
기어이 놓지 못하여 검은 멍이 드는 서해
- 안도현의 시, 「군산 앞바다」-
*위 사진 : 월명공원 안에 1984년에 세워진 ‘백릉 채만식 선생 문학비’
월명공원을 나와 내항 바닷가 쪽을 따라 차를 몰았다. 그러다 우연히 옛 세관 건물을 보게 되었다.
190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역시 호남지역의 쌀을 수탈해 가려던 일제의 한 상징물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아내의 어릴 적 집이 이 근처라며 신기해하고 기뻐했다.
*위 사진 : 군산의 옛 세관
세관 건물을 기준점 삼아 아내는 옛집의 모양과 방향을 유추해냈고 이런저런 어릴 적 기억들도 되살려냈다.
세월은 해 묵은 기억일수록 따뜻한 색감으로 물들이는 염료와 같다.
나 역시 덩달아 아내의 기억 속으로 따라 들어가며 훈훈해졌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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