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절은 역동적이다.
새로운 계절은 거대한 해일이나 태풍처럼 강산을 뒤덮으며 숨 가쁘게 밀려온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요지부동의 산도 그 속에서는 매 순간마다 자신이 품고 키우는
온갖 생명들의 싱싱한 숨소리와 계절에 따른 현란한 탈바꿈의 몸짓으로 가득하다.
이제 가을이다. 한 해의 성장과 결실을 마무리 지으며 겨울의 칼바람을 견디기
위한 준비로 부산한 계절은 또 다시 극적인 감동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가을이 오면 주말마다 바쁘게 지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단풍이 완연해지기 전에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은빛 억새를 눈과 가슴에 담아두고
싶어서이다. 가을이 깊어 누렇게 퇴색한 억새의 모습도 장관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억새의 모습은 줄기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는 가운데 흰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다.
억새는 해를 마주보고 서야 보기가 좋다. 햇살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비춰드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면 더욱 좋다. 햇살을 머금은 억새꽃은 투명한 흰 빛을
띤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넘실대는 흰 물결의 아름다움은 이미 하늘에 닿아있다.
행복에는 그런 억새 가득한 산길을 걷는 의미도 추가되어야 한다.
1. 충남 홍성 오서산(烏棲山)
오서산은 충남 홍성의 광천읍과 보령군 청소면을 접하고 있다.
까마귀가 산다는 뜻의 산이다.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까마귀가 많았던가 보다.
높이 791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홍성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그래서 인근 서해를 오고가는 배들이 이 산을 보며 뱃길을 잡는다고 한다.
‘등대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토굴 젓갈로 유명한 광천읍의 담산리 상담마을을 들머리로 하여 급경사의
산길을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걸어 주능선에 오르니 무리를 이룬 억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다. 이곳의 억새군락은 광활하거나 조밀하지는
않지만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해 바다와 광천읍 일대의 풍요로운 해안평야와
어우러지면서 결코 옹색해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능선의 바위에 앉아 심호흡을 반복하여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가슴 가득히 다져넣으며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하산 후 멀지 않은 남당항으로 차를 몰았다. 대하 축제가 한창인 그 곳에서
맛 본 살찐 대하 소금구이는 오서산 산행이 준 일종의 덤이었다.
2. 경기 포천 명성산(鳴聲山)
한자 이름이 울 ‘명’(鳴)과 소리 ‘성’(聲)이니 우리 말로는 울음산이 되겠다.
왕건에게 쫓긴 궁예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크게 울었다는 이야기와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망국의 슬픔으로 이곳에서 통곡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명성산이라 이름 지어진 내력으로 전해 온다.
산정호수 옆의 주차장에서 바라본 명성산은 바위 봉우리가 우뚝하여 산세가
험준해 보였다. 그러나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거쳐 오르는 통상적인 산행길은
뜻밖에도 평이했다. 아내는 오서산에서와는 달리 경쾌한 발걸음으로 내달았다.
1시간쯤 올랐을까?
어느 순간 아내는 발길을 멈추며 탄성을 질렀다.
“와아!... ”
뒤따라오던 다른 등산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흰 억새꽃 무리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삼각봉의 9부 능선 부근이었다.
능선에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억새꽃마다 가을의 맑은 햇살이 탐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아내도 나도 발걸음이 자꾸 더디어졌다.
우리는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반복해서 오르내렸다. 억새에 취해 산
정상에 오르려던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는데 전혀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3. 강원 정선 민둥산
나무가 없는 산을 민둥산이라고 한다. 이럴 때 민둥산은 보통명사이다.
강원도 정선군에는 고유명사의 민둥산이 있다. 이름 그대로 나무는 없이
억새가 가득하다. 소나무와 잡목 등이 우거진 등산로 초입을 벗어나면
동그스름한 곡선의 산 능선을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이 시야에 들어온다.
증산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잡아 왕복 4시간 남짓한 산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아내와 나는
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해발 800미터의 밭구덕마을까지 차를 몰고 가서 산에 올랐다.
민둥산의 높이가 1,118미터 정도이니 300미터 정도만 오르는 산행이었다.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할 경우 왕복 산행 시간이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하여 땀이
좀 나다가 마는 싱거운 산행이 된다. 아내처럼 다소 체력이 약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권장할 코스는 못 된다.
밭구덕마을은, 밥그릇처럼 움푹 페인, 석회암지대에 발달되는 독특한 형태의
지반 위에 있는 마을이다. 경사면을 따라 식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듯 했다.
배추의 가을걷이가 벌써 끝난 듯 채소밭엔 시래기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더덕공동재배라는 표지판이 서있는 넓은 밭에는 땅을 뒤집는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하였다.
산길은 제법 경사가 있었지만 정상까지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져 발걸음이 포근했다.
산을 오르는 내내 탁 트인 시야 속에 억새를 보며 오를 수 있어 눈도 즐거웠다.
다만 가을철에 어울리지 않은 우중충한 먹구름 때문에 햇빛이 사라져 제대로 된
억새의 흰빛을 볼 수 없었던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어떤 일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언젠가 있을 그 일과의 또 다른 인연을 예고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며 애써 자위하곤 한다.
햇빛이 없어도 등산길은 많은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옷차림과 쉬임 없는 이야기
소리로 들떠 있었다. 산 정상의 표지석 앞에선 아내도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드는
고전적인(?) 포즈를 취하며 함께 즐거워했다.
4. 전남 장흥 천관산
억새가 좋은 또 하나의 산, 남도의 천관산은 올해 오르지 못했다.
민둥산을 내려오면서 내년에는 천관산을 첫 번째 억새산행지로 하자고
아내와 약속했을 뿐이다. 굳이 이곳에 적어두는 것은 공개를 통해
그 의지를 확고히 하고자 함이다.
10월 들어 주말마다 계속된 산행에 아내는 좀 지쳐했다.
“힘들어? 이번 주말에는 집에서 차분히 쉬도록 하자.”
나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심(?)을 베풀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학 동창 녀석이었다.
“요번 주말쯤 진동리에 단풍이 절정일 거야. 산장을 이틀 빌려놨는데
너도 ‘제수씨’ 모시고 와라. 가을 아침가리 못 보면 너 후회한다.
단풍은 금방 시드는 거 알지?”
나는 친구의 협박에 일 분만에 아내와 한 약속을 깰 수 밖에 없었다.
아내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그래! 우리는 체력을 키워야 돼. 그래야 기계인간들이 지구를 정복했을 때
터미네이터들과 싸워 지구를 구해낼 수가 있지.”
우리의 가을!
정말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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