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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6 - 오성과 한음,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

by 장돌뱅이. 2013. 2. 28.

오성과 한음


  어린 이항복의 집에 큰 감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가을이 되면 가지마다 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그 중 가지 몇 개가 담을 넘어 옆집으로 뻗쳐 있었는데,
   이항복 집안의 하인들은 그 감을 따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해마다 옆집의 하인들이 담을 넘어온 가지의 감은 자기들 것이라며 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옆집은 병조참의인 권대감의 집이었다. 하인들은 그런 주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억지를 쓰는 중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항복은 어느 날 옆집으로
   가 글을 읽고 있는 권대감의 방문에 갑자기 주먹을 찔러 넣었다.
   “엇! 어느 놈이냐?” 대감은 놀라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버릇없는 행동인 줄은 알지만, 방 안으로 들어간 손이 누구 손인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항복은 침착하게 물었다.
   “이 녀석아! 그게 당연히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
   그러자 이항복은 권대감집으로 넘어온 자기 집 감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면 저 감나무 가지는 누구 것입니까?”
   권대감은 어린 이항복의 기지에 손을 들고 말았다

누구든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을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어린 시절의 일화이다.
이야기 속의 병조참의 권대감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장군의 아버지이다.
후일 이항복은 권율장군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호방하고 의로운 기질을 보여준 이항복은 25세인 1580년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이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영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매사에 의를 존중하여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고 뚜렷한 소신을 지닌 강직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지면서 그의 호인
백사(白沙)보다 봉호(封號)인 오성대감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다.

오성보다 5년 늦은 1561년에 태어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또한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서예와 문학에 조예가 깊어 자기보다도 마흔 네살
이나 더 많은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인 양사언과도 깊이 사귀었다고
한다.

오성과 같은 해에 벼슬길에 들어선 한음 역시 나라의 여러 중책을 맡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왜장과 단판을 하기도 하고, 이항복과 함께 직접 명나라에
건너가 명나라를 설득하여 구원병을 파견하게 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다.

더없이 가까운 사이였던 이항복과 이덕형은 복잡하고 살벌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함께 초연히 중립을 지키며 꼿꼿이 소신 있는 선비의 길을 걸었지만 끝내 이로
인해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모두 각각의 귀양지에서 생을 마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장마를 예감하게 만드는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 아내와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의
묘를 찾아 나섰다. 오성의 묘는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에 있고 한음의 묘는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둘 중에서 집에서 가기 편한 한음 이덕형의 묘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양수리에 이르는 한강변엔 습기를 머금은 희뿌연 연무가 끼어 있었다.
양수교를 건너 양수주유소에서 왼쪽으로 돌아 길을 따라 이십 분쯤 직진을 하면
양서면 목왕리가 나온다. 도로변에서 우측으로 1986년 이덕형의 후손들이 세웠다는
영정각이 보이고 그 뒤쪽 산등성이에 한음의 묘가 있다. 푸르름이 짙은 숲길을 걸어
오르면 앞이 환하게 열리면서 단출한 모습의 한음의 묘가 나온다. 임진왜란 중에
왜군을 피하다 자결한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고 한다. 문인석과 함께 귀여운
모습의 어린 남녀의 동상이 함께 서 있어 특이해 보인다.

오성의 묘는 서울의 북쪽인 포천군에 있다.
작은 공장들 사이로 미로처럼 난 길을 지나야 하기에 찾기가 쉽지 않다.
아내와 나는 일대를 수 차례 돌면서 사람들에게 묻기를 거듭한 끝에서야 야트막한 산자락
끝에 숨은 듯 서 있는 오성의 사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성의 사당 주변과 묘로 오르는 길은 온통 흰 개망초꽃으로 덮여 있어 진입로를 찾기
힘들었다. 부인인 안동 권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는 쌍묘 앞에는 ‘의정부영의정오성부원군’
이라고 새긴 묘비와 망주석과 문인석이 서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사람의 손길이 스친
지 오래된 듯 잡풀과 개망초꽃이 웃자란 묏등과 주변의 모습은 어수선해 보였다.

묘에서 가까운 방축리에는 1631년 이곳 지방 유림들이 오성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 있다. 1720년 숙종이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 사액을 내렸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1년 복원하였다. 아내와 내가 찾았을 때는
입구의 문이 굳게 잠겨 있어 800여 평에 이른다는 내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사실과 허구의 의미
우리가 ‘오성과 한음’이라고 말할 때 흔히 그것은 이항복과 이덕형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레 오성과 한음이
어릴 적부터 단짝으로 지낸 죽마고우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우선 오성과 한음은 나이가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고
자란 곳도 각각 필운동과 남대문 밖으로 서로 가깝지가 않아서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기록에는 오성이 25세, 한음이 20세
때 같이 벼슬길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났다고 되어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어려서부터 학문과 재주가 뛰어나고 벼슬길에 올라서도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데다가 서로 허물없는 교분을 갖고 지내다보니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만남이 어릴 적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들의 재미있고 기발한 일화도 점차
창작되어 더해져 온 것으로 추측된다. 

여행을 하면서 아내와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다.
역사적 현장이나 사실을 확인하고 거기에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의견을 내놓는 일은 우리 부부에겐 애초부터 능력 밖의 일이다.
하지만 사실이냐 아니냐에 예민해질 필요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옛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그것이 어느 한 개인의 남다른 능력에 의해
창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름 없는 숱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더해가며 만들어온 이야기라면, 그 ‘집단창작’의 허구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지혜, 꿈과 소망이 순도 높은 진실의 모습으로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할 수 있는 도구로 이야기 이외에는
다른 방법을 가지지 못했다. 때문에 이야기의 전달 강도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실존 인물의 행위에 자신들의 의지를
덧붙이곤 했다.

어리석은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며 갖은 기행(奇行)으로 세상을 떠돈 김삿갓이나
세상의 잘잘못을 올바르게 가리고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속 시원히
덜어주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현명하고 정의로운 이야기 속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 시절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된 허구도 섞여 있으리라 생각된다.

오성과 한음의 관계를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로 설정하고
그들의 뛰어난 기지와 익살을 통하여 세상을 풍자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던 옛사람들의 기지와 해학도 그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동’, 오성과 한음이 한번은 실수로
참새를 죽이게 된다. 둘은 이를 슬퍼하며 참새를 땅에 묻어주며 축문을 읊는다.
“새가 죽었다고 사람이 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네가 우리로 인하여 죽었기에
그 죽음을 슬퍼하는 도다.”
힘없고 작은 존재인 참새를 보살펴주는 따뜻한 마음 - 훗날 훌륭한 재상이 된
두 사람의 ‘될 성 부른 어린 떡잎’의 모습을 말하면서 사람들은 그 마음으로
자신들도 위로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이야기도 있다. 두 사람이 벼슬길에 들어선 어느 날 대궐에서 회의가 열렸다.
중신들이 다 모였는데 유독 오성만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타난 오성은
왜 늦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는 도중에 큰길에서 싸움이 났길래 다가가보니 환관은 스님의 머리털을 잡고,
스님은 환관의 음경을 잡고 대판 싸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잠깐 구경하느라
좀 늦었네.”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웃고 말았다.

스님에게 머리털이 어디 있으며 환관에게 음경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이 이야기 역시 회의에 늦은 오성이 재미있는 농담으로 난처함을 모면한 실화라기
보다는 오성의 행동을 빌려 헛소문을 만들어 서로를 헐뜯고 실속없는 당쟁을
일삼는 당시의 정치판을 풍자하려는 민중의 의지가 엿보이는 일화이다.
아무리 호방한 기질의 오성이라 하더라도 여러 중신들 앞에서 점잖지 못한
말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성은 일생을 두고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는데 노론과 남인 간에 뜻이 맞지 않아 끝내 일부에선 그의 헛무덤까지
만들어 따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야기 속의 ‘스님 머리털과 환관의 음경’을
현실에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정치인들은 두 눈을 뜨고서도
백성들의 아우성은 읽어내지 못하는 재주(?)를 가진 특별한 집단인 듯 하다.


웃음에 대하여

  사람다운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웃음이 있다.
   웃음은 사람다운 사람의 특권이요 자랑이다. 여우나 늑대가 웃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동물은 울기는 하지만 웃지는 않는다.......<중략>......
   진정한 웃음, 사람을 끝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웃음이란 마치 가시밭에 피는
   장미꽃과도 같은 것이다. 시련과 고통의 가시밭길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장미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자격이 없다. 참된 웃음은 참된 아픔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줄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 김동길의 『대통령의 웃음』중에서-

앞서 말한 바, 옛 이야기 속의 오성과 한음은 많은 부분 허구일 수도 있다.
근거없는 헛소문을 유언비어라고 한다면 ‘오성과 한음’도 그런 범주에 넣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이상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데는
그럴 정도의 훌륭한 인품으로 세상을 살다간 오성과 한음의 삶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오성과 한음’은 두 사람의 실제 삶에 고달프고 힘든
삶을 꾸려가면서도 익살과 풍자의 해학을 잃지 않았던 조상들의 슬기와 여유,
삶에 대한 경이롭고 끈질긴 긍정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되새김질해야 할 보배로운 전통이기도 하다.
때로 사실만큼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7월 초순, 학계와 방송, 연예계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웃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국웃음문화학회’ 라는 단체를 발족시켰다고 한다. 자연스러워야 할
웃음과 딱딱한 느낌의 ‘연구’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적어도 그 학회의
참석자들이 “웃음에 관한 이론도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반드시 상속해야 할 재산”
이므로 “조상들의 소화집(笑話集), 만담집(漫談集) 등 옛 문헌을 고증, 발굴”하겠다고
밝힌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렇듯 웃음은 개인과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방법이며 또한 목표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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