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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38 - 봉화의 옛 마을

by 장돌뱅이. 2013. 3. 4.



수탉과 암탉이 사랑으로 마주보는 곳, 닭실마을
이번 여행은 경북 순흥 - 봉화 -영천을 거쳐 울산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봉화가 주 목적지이고 순흥과 영천은 지나치는 곳이 되겠다. 서울을 떠나
세 시간 정도 지난 뒤 순흥에서 휴식을 겸해 요기를 했다.
오로지 묵밥 한 가지로 순흥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은
읍내의 묵집에서 묵채에 밥을 말아 먹었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니 운전
좌석에서 구겨졌던 몸이 개운하게 펴진다.

식사 후 가까운 부석사를 잠시 들러 갈까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지만 갈 길이
멀다는 아내의 만류로 접어야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여행 일정에 어느 곳을
추가하는 것보다 빼는 것은 몇 배로 힘이 든다. 하물며 몇 번을 간다고 해도
설레는 감동이 있는 부석사에 대한 갈등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포기하는 것을 '용기’라고까지 말했는지 모르겠다.
삶에도 여행에도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늘 그것이 문제이자 또한 축복이다.

순흥에서 동쪽으로 단산과 부석을 지나 봉화군의 물야에 이르는 길 주변엔
사과밭이 많다. 봄이면 흰 사과꽃으로 가득한 언덕이 자주 나타나 탄성과 함께
차의 속도를 줄이게 되는 곳이다.

물야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915번 지방도로는 내성천을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가며 끼고 내려가는 한적한 길이다. 옆으로 스쳐가는 먼 산과 가까운 들의 초록이
여름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린다. 나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연다.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싫지 않다.

봉화읍내에 가까이에서 36번 국도를 만나 울진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면 1-2분
거리에 길 왼편으로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이 나온다.
‘닭실’은 유곡리(酉谷里)를 한글로 풀어쓴 이름이다.
산 밑에 규모 있는 기와집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집집마다 지붕 기와를
새로 올린 탓인지 멀리서 보면 마을의 오랜 내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새로 지은 박물관이나 민속촌 같은 느낌이 난다.
그러나 이곳은 5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닭실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의 명당에 해당된다. 마을 동북으로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서남으로 뻗어
내린 백설령이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의 형세로 자리하고 있고 동남으로는 옥적봉이
안산(案山)으로 자리하여 수탉이 활개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닭실의
지세는 수탉과 암탉이 서로 마주보고 사랑을 나누며 알을 품고 있는 명당으로
그 자손들이 번창하며 재물도 늘게 된다고 한다.

풍수에 전혀 지식이 없는 아내와 나의 안목으로는 사진이 곁들여진 마을 입구의
안내판에 쓰여진 설명을 읽고 나서도 마을 주변의 지형에서 ‘알을 품은 닭의
형상’을 읽어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뒤쪽으로 찬바람을 막아주는 백설령이 솟아 있고 앞쪽으로 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울타리를 친 창평천이 있으며, 물길이 이루어 놓은 넓은 들에 시선이 툭
트인 마을은 시원스럽고 풍요로워 보였다. 거기에 햇볕을 한껏 받을 수 있게
드러난 집과 골목길엔 밝은 기운이 가득하여 아내와 그곳을 이리저리 걷는 내내
호흡이 가벼웠고 편안했다.

   바로 풍수가 그러하지요. 하늘 아래 풀보다 크게 자랑스럽지도 못한 기
   인간인지라 살아 한 세상을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살고, 죽은 후에 또한
   제 자리를 찾아 자연 속에 스며들지요. 풀이며 들꽃이 다 제 자리를 알아
   싹을 틔우고 죽는 이치와 같소. (......) 가상(家相)을 잡을 때나, 수도장을
   잡을 때도 지리, 지질, 수로, 지형, 기후에 맞추어 조화가 되도록 해야 하니더.
   들풀이 제 자리를 못 찾아 마당에서 싹을 티우면 뽑히게 되고, 그 꽃이 모양
   좋게 아름다워 사람이 탐하게 되면 이미 들꽃이 아니오, 바람 센 서북향에
   집을 세우지 않고, 냇가나 산마루에 묘가 서지 않는 것도 다 그 이치 아니겠소.
   모든 것이 보기에 어울려야 한다면, 풍수란 바로 풀과 나무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환경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데 그 이치가 있니더
                                   - 김원일의 소설, 『바람과 강』 중에서 -

충재종가(沖齋宗家)

마을의 서쪽에 조선 중종 때 재상이었던 충재 권벌(沖齋 權?)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닭실에 처음 들어온 안동 권씨는 충재의 5대조였다. 그러나 충재 이후로
가문이 번창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물과 유적은 충재 권벌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문에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을 건너 사랑채가 있고 안채는 다시 중문을 지나야
있다. 안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적공간이라 들어갈 수 없다. 문밖에서 안채를
기웃거리는데 마당에 매어놓은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개를 피해 종가 서쪽의 작은 쪽문을 나서니 충재가 1526년에 지었다는 청암정
(靑巖亭)과 작고 아담한 서재인 충재(沖齋)가 있다. 청암정과 충재 사이에는
교각을 세우고 긴 장대석을 놓아 만든 돌다리가 있다. 청암정은 거북 형상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청암정을 짓고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우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 지나던
스님이 “거북 등딱지 위에 불을 피우면 거북이 죽는다.”며 “거북에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 뒤 아궁이를 모두 막고 둘레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에 물이 있다면 운치가 더 할 것 같으나 지금은 연못은 물기가 없이
바짝 말라 있다. 그래도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들어선 정자가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맛을 풍겼다.

종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충재 권벌의 큰 아들인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石泉亭舍)가
있다. 개울가에 붙여 돌로 축대를 쌓은 위에 건물을 올렸다. 주위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가득하여 넉넉한 암반 위를 천천히 흐르는 개울물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채 탁족을 하며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신선처럼 여름을 날 것도 같다. 아니나 다를까. 석천정사에서 멀지 않은 계곡의 바위에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충재의 5세손인권두응의 글씨라고 한다. ‘동천’이란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은 곳을 의미한다. 강화도의 함허동천이나 북한산의 백운동천, 관악산의
자하동천 등이 모두 그런 경승지이다.

닭실마을을 떠나기 전, 마을의 특산물인 전통한과매장에 들렸다.
한과는 닭실마을의 부녀회원들이 주로 가을이나 겨울철에 만든다고 한다.
여름철에는 잘 만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들러보니 할머니
서너 분이 쉬시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념으로 한과 한 상자를 샀다. 성급한
마음에 몇 개 꺼내어 먹어보니 은근하게 달면서도 구수한 맛이 어릴 적 먹던
기억 속의 맛과 일치했다. 닭실마을의 한과는 천연재료와 염료를 사용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만 만들어낸다고 한다.

봉화 혹은 여행을 위하여
작년엔가 봉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자연산 송이와 춘양의 춘양목이
주제였다. 그리고 이번에 닭실마을을 다녀왔다. 여행이 거듭될수록 느껴지는
한 가지는 국토의 넓고 깊음에 비하여 여행을 통해 국토를 보는 나의 시각이
너무 편협하고 얕다는 깨달음이다.

아내와 나는 봉화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의 여행은 그저 세상에 알려진
것만을 좇아 송이와 소나무와 닭실마을이란 현장을 잠시 스치듯 지나쳐 왔을 뿐이다.
그 진부한 여행의 행태 속에서 아내와 내가 본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작게 쪼개진
봉화의 한 파편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다녀온 곳이 적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기억 속에 깊이 담아두었는가
가 문제일 것이다.

춘양목을 보았다하지만 춘양목과 더불어 자라는 수많은 풀과 나무에 얼마나 눈길을
주었으며, 주었다한들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닭실마을을 걸어
보았지만 마을사람들의 구체적인 내력과 사연에 대해 내가 들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짜낸 짧은 시간 때문이라는 말로 변명을 앞세우지는 않아야겠다.
편협하고 얕은 시각에 대한 정직한 자각도 소중한 깨달음 아닌가. 욕심을 버리고
좀 더 천천히 좀 더 낮은 자세로 국토를 더듬어 나가야 하리라. 그것만이 현재의
아내와 내가 할 수 있는 국토에 대한 올바른 존경의 표현이며 예찬이 될 것이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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