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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41 - 서울 삼성동 봉은사

by 장돌뱅이. 2013. 3. 7.

봉은사에 얽힌 사연
서울 강남의 삼성역을 나오면 거대한 빌딩 숲과 맞닥뜨리게 된다.
인터콘티넨탈호텔과 현대백화점, 포스코빌딩 등이 줄지어선 테헤란로가
그렇고,55층의 높이로 우뚝한 무역센터 (Korea World Trade Center) 빌딩과
아셈 타워가  있는 영동대로 쪽도 그렇다. 직선으로 널찍널찍하게 뚫린 도로와
조밀하게 들어선 현대적 외양의 건물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른바 ‘강남’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개발과 경제력, 그리고 시대적 첨단의 상징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곳에선 지상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모습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호텔과 도심공항터미널 백화점에 더하여 16개의 상영관을 갖춘 극장과
2300여 평의 해양수족관, 그리고 수백 개가 넘는 각종 음식점과 가게들이
집중되어 있는 코엑스몰은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다.
주말이면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잠실 올림픽 경기장의 18배에
달하는 크기에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는 아내와 나로 하여금 자주 길을 잃게 만든다.

봉은사(奉恩寺)는 그런 곳에 있다.
‘도대체 땅값만 해도 얼마야?’ 더러 아내와 천박한 저울질을 해보기도 하지만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그곳에 봉은사가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하게 된다.
봉은사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곳 역시 주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변모 했을 것이기에.

날씨가 화창하면 삼성역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봉은사까지 걸어보길 권한다.
길은 깔끔하게 다듬어져 걷기에 더 없이 좋다. 오고 가는 차량 행렬에 분위기가
다소 산만해 질 수도 있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서울에
얼마나 되겠는가. 흔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길 끝에
만나는 봉은사는 마치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 가치가 돋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봉은사는 원래 신라 원성왕 10년(794)에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어 지금의 선릉 자리에 있었다. 성종이 승하하여 선릉(宣陵)이 들어서자
성종 비, 정현왕후의 명으로 연산군4년(1498)에 옆으로(지금의 정릉(靖陵)자리)
옮겨 짓게 되면서 봉은사로 이름을 고쳤다.

어린 명종이 등극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실권을 쥐게 된
문정왕후(文定王后)는 고승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침체된 불교의 중흥을
모색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폐지되었던 선교양종을 다시 세우려 봉은사를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 하였고 보우는 봉은사 주지가 된다.

보우는 명종 7년(1552) 봉은사에서 선과(禪科)를 치러 장차 조선불교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선발하였다. 유명한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대사 유정이
모두 이를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다.

보우는 명종 14년(1559) 봉은사를 현재의 자리로 확장 이전시키고,
절이 있던 자리에는 3년 뒤 중종의 능, 정릉(靖陵)을 서삼릉에서 옮겨온다.
이는 장차 중종과 문정왕후를 합장케 하여 봉은사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보우의 계획과 죽은 뒤에도 정치적 실권을 이어가려는 문정왕후의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돌아가자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된 후 제주목사에 의해
장살 되었으며 중종과 함께 묻히려던 문정왕후의 꿈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더불어 봉은사의 사세도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중에
전소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 뒤에 한 때 왕명으로 크게 중창되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39년 다시 화재로 판전(版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게 된다.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그 뒤에 지어진 것이다.

때문에 현재 봉은사는 그 긴 역사에 어울리는 연륜이 묻어나는 건물들을 볼 수
없다. 건물의 배치도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규범에 따르지 못하고 선불당, 영산전, 명부전, 북극보전, 판전, 심검당, 대웅전
등의 건물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형세이다.

일주문에 들어서서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에 봉은사 개산(開山)1212년
기념으로 역대 조사전(祖師展)이 열리고 있었다. 봉은사가 배출한 고명한
스님들의 초상화와 사진이 간단한 약력을 곁들여 전시되고 있었다.
보우대사를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에 법정스님까지 있었다.

국토여행이란 결국 어느 곳에 스민 사연을 찾아 떠도는 행위일 것이다.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 만든 사연이건 이름 없는 뭇 백성이 남긴 사연이건
그곳에 스며있는 인간의 자취는 그곳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단순한
경치나 사물이 그들의 숨결을 통하여 비로소 정신의 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나청호(羅晴湖)스님의 이야기는 기억해 둘만 하다. 1912년에 주지로 취임한
스님은 포교와 사회활동에 앞장을 섰다. 특히 을축년(1925) 대홍수 때는 절의
재물을 모두 풀어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708명의 인명을 구해내어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당시 한강이 범람하는 엄청난 대재난에 총독부마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봉은사 일주문 안쪽의
오른쪽 언덕에는 “봉은사 주지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 (奉恩寺住持
羅晴湖 大禪師 水害救濟功德碑) 라고 새겨진 작은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추사 김정희와 판전(板殿)

봉은사는 조선의 대학자이며 뛰어난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 -1856)가
생의 마지막을 불문에 귀의하여 보낸 곳이기도 하다. 추사가 봉은사에 머물
무렵 남호 영기 (南湖 永奇) 스님은 절 내에 간경소를 차리고 왕실과 중신들의
지원을 받아 화엄경판을 판각하고 있었다.

이후 완성된 경판을 보관할 경판전을 짓고 그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추사는 그 청을 받아들여 어린애 같은 소박하고 파격적인 필치로
“판전(板殿)”이란 두 글자를 완성한다. 추사는 이 글씨를 쓰고 난 뒤 3일 후인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글씨가 결국 대가의 절필(絶筆)이 되고 말았다. 편액을 들여다보면 판전이란
큰 글자 옆에 세로로 “七十一果 病中作”(칠십일과 병중작) 이라는 잔글씨가
덧붙여있다. 추사가 병을 앓는 중에 썼다는 얘기겠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은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유홍준, 『완당평전』중에서 -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 즉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교(巧)가 아니라 졸(拙)인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천국을
결코 볼 수
없으리라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추사도 죽음에 임박해서야 이제까지
지녀왔던 모든 모양과 멋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졸(拙)함’의 또 다른 세상을
깨달은 것일까?
한 큰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흉내낸다고 아무나 큰스님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산전의 현판도 눈 여겨 볼만 하다.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이
쓴 글씨다. 그는 20세기 초에 문인화가로 활동했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靈)’자에서는 ㅁ자 하나를 빼고 ‘산(山)’ 자는 다른 두 글자의 높이와
다르게 쓰는 재치로 산뜻한 맛을 더했다.


봉은사 근처 맛집 - 양미옥

부부가 산다는 것은 서로 닮아 가는 과정이다. 식성도 그렇다.
아내와 결혼에서 내가 아내의 입맛에 길들여진 음식이 냉면과 만두라면
내 입맛에 아내가 길들여진 음식으로는 곱창, 회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양미옥은 을지로 3가에 본점이 있다. 봉은사를 다녀오는 길, 삼성동
도심공항터미널 맞은 편에 있는 코엑스점에 들렸다. 본점에서 음식을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에 본점과 동일한 맛을 제공한다고 한다.
양미옥은 대창과 소의 위(胃)의 일부인 양의 맛이 일품인 곳이다.

소는 되새김질을 위해 위(胃)가 네 개나 된다. 그 중 두터운 부위를 ‘깃머리’라
하며 구이용으로 쓴다. 위(胃)의 꺼풀을 벗겨내면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나오는데 소 한 마리에 4-5근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양념장에
재워놓았다가 숯불에 구워내는 양구이는 쫄깃하고 부드럽다. 특히 양미옥만의
독특한 양념장은 숯불에 구운 양과 대창의 맛을 한 단계 높여준다.

그러나 이 집에서 아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양이나 대창구이가 아니라
식사 주문 시에 나오는 된장찌개이다. 사실 양이나 대창구이보다 이 찌개를 먹기
위해 이 집을 간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멸치의 맛이 진하게 풍기는
이 집의 된장찌개는 단연 최고이다. (전화번호 02-565-883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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