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국토여행기 42 - 충주의 하늘재와 월악산

오르지 못한 하늘재


   하늘재.
   예쁜 이름이다.
   우리 나라의 숱한 고개 중에서 이처럼 예쁜 이름을 가진 고개가 또 있을까?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구룡령, 대관령, 백봉령, 싸리재, 고치령, 죽령, 조령,
   화령, 추풍령, 육십령, 여원재. 백두대간의 남한부에 늘어서 있는 고개들을
   되새겨 보아도 하늘재에 견줄만한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고개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역사 또한 하늘처럼 깊다.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아달라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鷄立嶺)길을 열었다.”
   아달라왕 3년은 서기로156년이다. 물경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이다. 하늘재의 앞선 이름이 계립령이기도
   하고 하늘재는 오늘 날 계립령의 일부이기도 하다. 오늘날 계립령은
   미륵리 절터에서 문경 관음리로 넘어가는 하늘재, 수안보로 넘는 지릅재,
   송계 골짜기로 남한강의 황강나루에 닿는 닷돈재를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다.
   이 계립령 길은 그보다 2년 뒤에 열린 죽령 길과 더불어 오랫동안 소백산맥을
   넘는 주교통로로 이용되었다.

   고려 말쯤에 문경새재가 뚫려 조선시대에 들어 남북을 잇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면서 계립령은 차츰 쇠퇴해 갔지만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숱한
   발자국과 사연들이 이 길을 따라 오고 갔다.
                                  -2003년 아내와 하늘재를 다녀와 쓴 글 중에서 -

다시 불러보아도 하늘재란 이름은 아름답다.
몇해 전 백두대간 산행을 계획하며 도상으로 산길을 따라가다 만난
하늘재를 주목하여 마음 속에 담아 둔 것도 그 이름 때문이다.
‘하늘!’ 하면 우선 아득할 정도로 높고도 넓은 푸른 색감에 빠져든다.
하늘재는 이름처럼 하늘까지 치솟은 높고 험한 고개가 아니라 해발
525미터의 나지막한 고개다.

미륵리 절터에서 오르면 한 시간 정도면 고갯마루에 설 수 있다고 한다.
무릇 고개란 산줄기로 갈라진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가장 쉽고도 빠른
소통의 통로를 의미하는 법이니 그런 의미에서 나지막한 하늘재는
그 본래의 의미에 가장 충실한 고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서너 번이나 충주행를 다녀왔음에도 아내와 나는
아직 하늘재에 올라보지 못했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번 하늘재는
계획 속에 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늘 다른 곳에서 너무 여유를 부리는 이유가 되었다. 때문에 미륵리에 도착하여
고개 초입부에 들어서면 어느 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오는 통에 고개 들머리를
산책하곤 돌아오는 일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하늘재를 1차 목표로 정하고 갔다. 고속도로를 나와 수안보에서
청국장으로 빠른 식사를 하자마자 곧바로 미륵리로 가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고갯마루엔 오르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고개를 반 정도 올랐을 즈음 이번 주말 여행을 같이 하기로 한 울산의 친구
C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C는 부인과 함께 예정보다 빨리 수안보의 숙소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다시 서둘러 발길을 돌려 내려와야 했다.

한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들머리나 중턱에서 돌아왔으면서도 하늘재
길은 언제나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절터를 끼고 산으로 이어지는
이 옛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한적하기가 그지없다. 미륵리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터에 남아 있는 거대한 석불입상과 석등, 오층석탑
등을 돌아보고 가기 때문이다.

미륵리 절터에서 비포장길을 따라 하늘재로 향하다보면 길 오른편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절에 딸린 부대시설이나 병영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언덕 위에 우뚝 서있는 삼층 석탑을 지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특이한 형상의 부처님 두상(頭像)과 만나게 된다.

주변의 계곡 전체에 걸쳐 그 옛날의 흔적이 보인다고 하니 지금과는 달리 한때
이곳은 무척이나 번잡한 곳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하늘재(계립령)를 닦았듯이 이곳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에게도
중요한 군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도 하늘재 길을 따라서라고 했다.
그 요지에 들어선 사찰이 종교적인 역할과 군사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지금은 그런 옛날의 긴장과 활기 대신에 곳곳에 건축물의
부재로 쓰였음직한 크고 작은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사이로 군락을
지어 피어난 강아지풀들이 저녁 햇살에 잔털을 노랗게 빛내며 한가롭게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아내와 내가 하늘재에서 내려오는 동안 산 아래까지 마중을 온 C 부부와 함께
우리는 미륵리의 절터를 돌아보았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안쪽에 있는 거대한
석불입상을 향하여 돌거북과 석탑, 석등을 지나 층층이 오르게 되어 있는 절터는
올 때마다 늘 새롭고 인상적이다. 원래 석불은 석굴법당 안에 있었으나 화재로
석굴 윗부분인 목조건축물이 소실된 후 노천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검게 그을린 석재 곳곳에서 화재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석불은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외모를 지녔지만 얼굴에는 소박하고 얌전한 미소를 띄고 있어
위압적이지 않고 정겹다.

석불 주위는 원래 있었던 목조법당 복원 공사를 위한 철제 지지대가 가로,
세로로 세워져 있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석불을 보호하기는
해야겠지만 보호각을 씌우면 왠지 부처님이 좀 갑갑해하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단청의 법당 건물은 이곳만의 한적하고 소담스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생경스러운 모습이 될 것 같은 우려도 들었다.
나무 숲 속에 우뚝 선 채로 자연과 함께 오랜 세월을 어울리다 그 자신 역시
인공물이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동화되어버린 듯한 건강한(?) 모습의 석불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즐거움이었는데...

절터 입구에 있는 돌거북은 이곳에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다듬어 만든 이 거대한 돌거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거북상이라고 한다. 세부적인 묘사보다는 과감한 생략으로 거북의 형상을
간략하게 표현하였지만 몸체는 당당해 보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듯한
얼굴에선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북의 등판에 새겨진
앙증맞은 새끼 거북 두 마리의 모습 또한 사랑스럽다. 처음부터 새겨 넣은
것인지 아니면 훗날 누군가 추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옛 사람의 해학이다.


아침 안개 속 신비로운 산길을 걷다

눈을 뜨니 새벽 3시 반이었다.
핸드폰의 알람을 4시에 맞춰 놓았는데 그 보다 일찍 저절로 눈이 떠진 것이다.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차에 마침 C도 부시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없이 간밤에 미리 꾸려 놓은 배낭을 챙겨 길을 나섰다.
나와 C의 아내 둘은 잠이 가득한 눈으로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해주었다.
월악산행은 아내들을 제외하고 C와 나만이 오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난
몇 달동안 아내의 허리가 좋지 않은 상태라 월악산행은 무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내와 함께 충주호 주변을 차와 유람선으로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오전 10시까지는 산행을 마쳐야 했다.
주차장으로 가며 하늘을 보니 음력 스무닷새의 손톱조각만한 그믐달이 건물
꼭대기에 걸쳐있다. 저 달이 완전히 이지러졌다가 다시 차오르면 추석이 될 것이다.

지릅재를 넘어 송계계곡으로 가는 새벽의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차창을 열자
제법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상쾌하게 느껴질 뿐 싫지는 않았다.
송계리매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월악산 영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여럿이지만 최단거리의 경로를 택한 것이다. 하산은 능선을
걸어 덕주골로 하기로 했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오전 5시면 날이 환하게 밝았었는데 벌써 낮이 많이
짧아져 해가 뜰 기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아직 사방이 어둡기만 했다.
후래쉬를 가져 오지 않은 C와 나는 이내 날이 밝아오길 기대하며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길은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게다가
산길 초입이 넓은 포장길이고 그믐달일망정 달빛도 희미하게나마 도움을
주면서 우려했던 어둠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길 왼쪽에 있는 작은 절, 자광사를 지났다.
때마침 아침 예불 종소리가 나지막이 울리기 시작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무수한 벌레들의 울음소리, 잡목 숲을 흔드는 소슬한 바람소리에 종소리가
더해지면서 산행길이 무슨 성지 순례를 가는 길인 양 잠시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가느다란 그믐달이 선명하고 몇 개의 맑은 별들이 초롱했다.

절을 지나 계곡을 조금 더 오르니 또 다시 왼편으로 절 모양새의 건물이
나타났다. 아마 이곳 주민들이 해마다 산신제를 지낸다는 지당터인 것 같았다.
지당터를 지나 잠시 평이하게 이어지던 길은 오래지 않아 본격적인 산길 모양새를 띈다.
가파르게 치솟는 길 덕분에 C와 나는 말 대신 가쁜 숨을 뱉으며 땀을 흘려야 했다.

날이 밝으면서 주위가 밝아지자 짙은 안개가 몰려들었다.
앞서가는 C의 뒷모습이 안개 속에 묻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축축한 길을
밟으며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았다. 아침 안개에 잠긴 숲길은 싱싱하고
신비로웠다. 문득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팔라는 문명 세계의 미국
대통령에게 스스로 미개인을 자처하며 보낸 한 인디언 추장의 편지가 생각났다.

   우리는 당신의 제의를 고려해보겠습니다. 그 까닭은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백인들이 총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가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나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것들을 우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구석구석은 우리 백성들에게는 신성합니다. 저
   빛나는 솔잎들이며 해변의 모래톱이며 어두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우리 백성들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 성스러운 것들입니다.

                 - 1855년 미국의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에게 보낸 북미 인디언
                    수와미족 (SUWAMISH TRIBE)의 추장 시애틀(SEATHL)이 보낸
                    편지 중에서 -

그 편지의 내용은 지금의 우리에게 비추어도 교훈이 된다.
국토의 모습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5%의 사람들이 전 국토 사유지의 90%를 차지한 상황에서 자연의 보존이
개발의 논리를 이겨낼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84년 1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월악산의 경계선이 산봉의 정상 능선 혹은
9부 능선을 따라 기형적으로 형성된 이유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경우 일체의
이른 바 ‘개발’이 불가능해지자 지자체마다 기를 쓰고 경계선을 산꼭대기
쪽으로 밀어부친 결과라고 한다.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에 오르자 숲 속의 안개는 월악산 줄기의 봉우리들을
감싸안은 채 일망무제의 구름바다로 퍼져 있었다. 흰 구름 위론 검은 준봉들이
잘 그린 수묵화처럼 드러나 있었다.

영봉의 높이는 1,097미터로 월악산의 봉우리들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아니다.
문수봉(1,162미터), 대미산(1,115미터), 매두막(1,099.5미터) 등 세 개의 봉우리는
영봉보다 높다. 그 외에 고도 천 미터 안팎의 고봉이 12개나 솟아있으나 사람들은
영봉을 주봉으로 받아 들인다. 산에 올라보면 그 이유는 저절로 깨닫게 된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라서야 눈에 들어오는 영봉의 모습은 안내판의 설명대로
“웅혼 장대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주봉으로서의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정상에서 땀을 식히며 간식으로 가져온 과일을 깎고 있는데 어디선가 청솔모
한 마리가 나타나 가까이 다가온다. 사람을 겁내하지 않는 모습이 등산객들과
익숙한 모양이다. 깍은 과일 조각을 녀석에게 던져주었더니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갉아먹기 시작한다. 아마 인기척을 듣고 아침 식사를 해결하러
나온 것 같았다.

하산길을 덕주골로 잡은 이유는 송계리 쪽보다 긴 거리를 내려오며
빼어나다는 덕주골의 경치를 하산길 내내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안개는 새벽보다 더욱 짙어져 마애불까지 내려오는 동안 안개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마애불은 덕주골 위쪽의 바위에 새겨진 높이 1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달 덕주공주가 피난 와서 살며 조성한 불상이라고 한다.
얼굴부분만 돋을새김이고 어깨 아래로는 음각의 선으로만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어 그리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오빠인 마의태자가
세운 하늘재 밑 미륵리 절터의 미륵불과 마주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망국의 한을 품고 쓸쓸히 산속으로 들어간 두 오누이의 서러운 삶을
달래주기 위한 후세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마애불과 함께 있었다던 덕주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리고 새로운 덕주사는
계곡 아래 쪽에 깔끔한 모습으로 지어져 있었다.

덕주골을 빠져나와 뒤를 돌아 산을 바라보았다.
산행을 마치고 뒤돌아보는 산에는 늘 가슴 뿌듯한 자부심이 서려있다.
어느 새 안개가 걷혀가며 초록의 산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 위로 유난히도 깨끗한 하늘이 파랗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아내와 남은 일정을 생각하며 발길을 서둘렀다.

(2005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