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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일본

아내와 나의 첫 일본1- 오사카

by 장돌뱅이. 2013. 3. 10.

진부한 표현이지만 일본을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그 이유야 한국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 역사적 채무의
미진한 정리가 만들어낸 이성적.감성적 앙금 때문일 것이다.

여행지로서도 일본은 내게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일본보다 몇 배 먼 곳으로는 더러 여행을 다녀왔으면서도 제주도 보다
조금 더 떨어진 일본은 특별히 꿈꾸거나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여행지로서 어느 곳에 대해 특별한 편견을 가진 적은 없다.
일본에 대해 민족적인 감정의 앙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문제를 일상의 화두로 삼고 지내는 형편도 아니거니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행을 막은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사정들도 따지고 보면 여행의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으므로.
아마 회사 일로 동남아에서 거주를 한 경험이 나와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일본보다 동남아에 더 관심이 갖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위 사진 : 간사이공항에서 남바로 가는 전철 안에서

아무튼 오사카를 출입구로 한 생애 첫 일본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추운 겨울이라 습관처럼 따뜻한 동남아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휴식보다는 좀 돌아다니고 싶다는 딸아이의 의견에다가
여행기간이 토요일과 일요일의 주말을 낀 나흘뿐이라
이동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까운 일본을 택하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한국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해야 했기에 나로서는
여느 여행처럼 차분한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딸아이도 직장인지라
회사에서 여행휴가를 받기 위해 전날까지 늦은 야근을 해야 했다.

짧은 여행기간이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항공편과 숙소의 예약을 하고 대략적인 동선을 파악한 뒤에 우선
첫날의 일정만 잡았다. 평이 좋은 CROSS HOTEL에 묵으려고 했지만
방이 없어 인근의 VISTA GRANDE HOTEL로 변경해야 했다.
이튿날부터의 일정은 현지에서 하루 전에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행박사와 호텔패스를 통해 숙소를 정하고 교통패스를 구입했다. 
화급히 인터넷을 뒤져 이런저런 정보를 훓어보기도 했다. 

여행은 장소와 시간의 조합이며 ‘무엇’과 ‘어떻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방정식이다. 누군가의 일정을 따라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자신의 의지 안에
있다면 그것은 자신만의 여행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아내와의 첫 일본행에
딸아이까지 함께 하는 여행이라 어릴 적 소풍날처럼 기대가 부풀었다.  


*위 사진 : 숙소 주변 풍경

오사카행 비행기는 좀 과장을 하자면 인천에서 뜨는가 싶더니 바로 내렸다.
해외여행 경험 중 가장 짧은 비행시간이었다. 간사이공항에서 전철을 타고
숙소가 있는 남바(難波) 역으로 향했다. 호텔은 도톤보리(道頓堀川) 부근에 있었다.
안내서를 보니 남바워크 B20번 출구로 나오라고 했지만, 온갖 출구와 전철이 교차하는
초행길의 남바역에서 해당 출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히 ‘문맹’과 ‘벙어리’의 일본어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약간 헤맨 끝에 지하철 출구를 빠져 나오자 이내 숙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좀 이른 시각이라 숙소는 체크인이 불가하여 짐을 맡긴 채 일정 소화에 나섰다.
도톤보리 지역은 먹거리의 집결지였다. 거리는 온통 식당 간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본 라멘으로 첫 식사를 하기로 했다. 딸아이는 몇 해 전 도꾜 여행을 하면서 맛본
경험에다가 서울에서도 가끔씩 먹는 음식이라 익숙해했지만 아내와 나로서는 처음
먹는 일본 라멘이었다.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경험한 라멘은 느끼한 국물로 속에 더부룩함을
남겼다. 깍두기 한 조각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한두 끼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오사카성(大阪城)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오는 길에 헤매며 체득한 방향 감각과 요령으로 난바역에서의 지하철 이용은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수월하게 되었다. 오사카성은 14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었다고 한다.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다’는 지략의 지녔다는 그는,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침략과 살육과
파괴와 아우성의 임진왜란과 동일한 의미로 요약된다. 세월에 탈색된 수백 년 전의 일에 새삼
비분강개를 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일본성의 상징이자 오사카성을 상징하는 건축물
덴슈카쿠(天守閣)에 전시된 그의 유품들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과의 증거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온
장수에게 그가 발급한 코영주증의 원본 문서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에 불편해지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다.
민족 상호간의 감정은 오랫동안 관계의 지층을 통과하며 형성된 지하수와 같은 것이지 않는가.
세월의 흔적이 스미지 않은 무미무취의 증류수와 같은 이른바 ‘객관적’이라는 논리의 잣대로
한 민족의 역사적인 감정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저런 점을 떠나 덴슈카쿠는, 원래의 모습이 아닌 그림을 보고 콘크리트로 외관만 복원된
건물이라 하더라도, 특이한 건물이었다. 특히 지붕 끝에 거꾸로 선 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인하고 힘차 보였다.
전망대에 올라 오사카 시내를 둘러보는 일도 초행이니만큼 나쁘지 않았다. 

오사카성을 나와 지하철을 바꿔 타며 찾아간 곳은 쓰루하시(鶴橋) 역 부근의 시장이었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며 특히 이곳 쓰루바시역 부근이
그러하다고 한다.

   오사카의 이 벌판에 인간이 거의 살지 않았을 무렵, 백제에서 이곳으로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이곳을 개척하여 그 무렵 백제군(百濟郡)이라는 군까지 두었다. 군내에는 백제들(百濟野)
   이라는 일대 경작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이쿠노쿠(生野區), 쓰루하시(鶴橋), 이카이노
   (猪飼野) 근처인 듯 하다. 묘하게도 다이쇼(大正:1912 -26) 시대쯤부터는 조선인이 대거 몰려와

   붙어살기 시작한 곳이 이쿠노구이며, 일본에서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한나라기행』중에서-”

1912년 이후에 조선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이유는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정책으로 살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일본의 노동시장을 찾가 바다를 건넜기 때문이다. 특히 1938년 이후 일제가 태평양 전쟁으로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부터는 조선의 젊은 노동력을 강제징집하여 끌고 갔다.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된 사람들이 오늘날 재일한국인의 1세대를 이룬다. 
 

츠루하시역 주변의 시장은 골목 곳곳에 한글 간판이 보였다.
날이 저물면서 불을 밝힌 한국 이름의 음식점과 의류수선점이 눈에 띄었고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내놓은 가게도 보였다. 오사카의 화려한 유흥가에 비해
후미진 뒷골목이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왔다.
중국의 조선족과 함께 일본의 속의 한국인들을 우리는 좀 더 넓고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남긴 아픈 자취이다.
그들이 힘들었을 때 국가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나가사끼(長崎)의 시장을 지낸 일본인 모또시마 히또시(本島等)의 오래 전의 발언 속에
재일한국인의 서러움이 읽힌다.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을까?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과 그 자손인 2세, 3세들이, 작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대략 60만 명 된다고 합니다만,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 일본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이 될 수 없고 학교 선생도 될 수 없습니다.
   경찰관으로 임명하지도 않고 참정권도
주지 않으며 일류기업은 그들을 채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일본인이란 말입니다. 
                                      -노마 필드 NORMA FIELD,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중에서-

다시 자하철에 오르니 아내와 딸아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간밤에 딸아이는 회사에서 휴가를 다녀오기 위한 마무리 야근을 하느라,
아내는 딸아이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느라 잠을 설친 탓이다.
잠꼬대까지 해가며 깊은 잠을 잔 탓에 혼자 원기가 왕성한 내가 잠시 뻔뻔하게 생각되었다.
우선 호텔로 돌아가 일단 한숨을 자는 것이 시급해 보였다. 방에 들어가자 아내와 딸아이는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와 한국과는 전압이 달라 충전에 필요한 전기잭을 하나 사고
저녁 먹을 장소를 알아보았다. 잠에서 깬 식구들과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카레밥으로 유명한 식당 치유켄(自由軒)이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치유켄은 차도를
사이에 두고 센니치마에(千日前)와 마주 보고 있는 대형 전자 매장인 ‘비꾸카메라’
(BIG CAMERA) 뒤편에 있었다.
 

 

치유켄에서는 생달걀을 얹어주는 카레밥과 오무라이스를 시켜 나누어 먹었다.
유명세에 비해선, 약간 매콤한 맛이 나는 것을 제외하곤, 그냥 평범한 카레밥이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다시 센니치마에 - 도톤보리를 거쳐 온갖 형태와 종류의 가게들이 밀집되어 있는
신사이바시 (心濟橋)를 걸어다녔다. 주말 저녁이라 가는 곳마다 인파들이 밤 늦게까지 넘쳐났다. 

 

다시 도톤보리로 돌아와 타코야끼(문어조각을 넣고 구운 풀빵?)에 맥주를 샀다.
누군가 딸아이에게 오사카에 가면 해봐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했단다.
그의 추천대로 호텔 방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셋이서 타코야끼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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