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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일본

아내와 나의 첫 일본3- 교토2

by 장돌뱅이. 2013. 3. 11.

교토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교토박물관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코무덤(鼻塚)이었다.
시간이 있다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초행길의 교토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석탑이 봉분 위에 짓누르듯 세워져 있는 코무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가 묻은 곳이다. 히데요시는 코를 베어 오라고 명령한 뒤에 소금에
절여온 코를 세어 영수증을 발행하고 많이 보낸 장수에게는 감사장으로 치하를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대에 조상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한 가짜 영수증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코무덤은 가해자인 히데요시의 도요쿠니진쟈
(豊國神社)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무덤 앞에는 교토시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로 세운 안내판이 있었다.

   “이 무덤은 16세기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 바 ”분로쿠(文祿) 게이초(慶長)의 역(한국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1592 -1598년)“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
   무덤(코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코와 귀가 함께 묻혔다는 것인데 사실은 코무덤이 맞다고 한다.
코영수증은 있어도 귀영수증은 발견되지 않았고 일본인 스스로 “조성 당시에는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너무 야만스럽다고 에도시대 유학자인 하야시라잔(林羅山)이라는 사람이 귀무덤
(耳塚)으로 부르자고 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에 코와 귀를 함께 쓴 것도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전에는 귀무덤만으로 불렀다고 한다.
코무덤 가까이 있는 작은  공원의 이름은 여전히 귀무덤공원(耳塚公園)이었다. 
 

그 어느 것이나 옛 일본인들의 잔인한 흔적이겠으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난 사실에 대한
일본의 의도적인 미화나 은폐에 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왜곡이며 비틀린 진실은 그대로 현실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먼 옛날의 일도 이러하니 어쩌면 가까운 지난 세기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저들의
진정한 뉘우침과 사과는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해방 후 친일부역배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가 오늘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점의 뿌리가
되었듯이, 일본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긴 전쟁도발자들에 대한 심판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 오늘 대내외적인 문제점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조상들의 억울하고 슬픈 사연이 묻힌 무덤에 잠시 묵념을 바치고 다음 일정으로 향했다.  

 


*위 사진 : 청수사 입구

박물관 앞에서 버스를 타니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입구가 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절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인파와 부딪히며 걸어 올라가야 했다.
마치 우리나라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처럼 화려한 목탑형식의 건물들이 입구 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왜 淸水寺를 킨카구지(金閣寺)처럼 끝을 ‘지(寺)’로 읽지 않고 기요미즈‘데라’라고
하는 것인지 일본어 문맹인 나는 궁금하다. 기요미즈데라에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름드리 굵기의 육중한 나무들이 떠받치고 있는 본전 건물이 나타났다.
본전 앞 넓은 목조 베란다도 시원스러워 보였다.  

본전 앞에 피운 향불에서 사람들이 물을 마시듯 연기를 손으로 부채질 하여 마시는 모습이 특이했다.  

그리고 처마 밑에서부터 길게 늘어드린 굵은 밧줄을 흔들어 높이 달린 징(?)
같은 것을 치는 풍습 역시 특이해 보였다.  

절 안에 진자(神社)가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절 안에 산신각(山神閣)이 있는 것처럼
불교가 전래 과정에서 토착문화를 받아들인 모습일 것이다. 종교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하지 않은 종교는 불교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런 불교의 포용력과 관대함이
이유가 될 것이다.  

 

요즈음 한국에서 절에까지 들어가 자신들이 믿는 특정종교를 강요하듯 외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가끔씩 뉴스에 보도가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참다운 선교는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될 것이다. 자신만을 내세우는 오만함은 바라는 바를
이룰 수도 없거니와 모든 종교에서 가장 큰 죄악으로 인정될 뿐이다. 

 

절 이름에 들어간 청수(淸水)에서 보듯 이곳은 예로부터 ‘맑은 물’이 유명하다고 했다.
본전 아래 쪽 샘에서는 사람들이 물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폭포처럼 떨어지는
세 개의 물줄기에 긴 자루가 달린 바가지를 대고 받아먹었다. 우리도 남들처럼 기다려
물을 먹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물줄기는 각각 학문과 금전, 연애운을 북돋운다고 했다.
나는 어느 것을 먹었는지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금전쪽 물을 먹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청수사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절 자체가 아니라 절로 오르는 길목이었다.
언덕받이길 양옆으로는 기념품과 음식을 파는 전통형식의 가게들이 처마를 맞대고 바투 다가와
있었다. 가게마다 내건 간판과 현수막, 거기에 쓰인 뜻 모를 일본 글씨, 그리고 일본식 가옥들이
이곳이 일본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우리가 일본에 가는 것은 당연히 그곳이 일본이기 때문이다.
명동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다. 짧은 교토 여행에서 부러웠던 것은 이름난 천년
사찰이 산재해 있어서가 아니라 골목골목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전통 형태의 집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 사진 : 기온의 저녁길 

그것은 청수사에서 멀지 않은 교토의 유흥가라는 기온(祇園)에서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굳이 하나미코지(花見小路) 같은 옛 골목길이 아니라도 새롭게 조성된 음식점과 술집 골목에서,
출입문의 형태에서 전등 하나에까지 일본적인 것이 강조되어 있었다. 최근에 들은 말로는
맥도날드도 교토에 와서는 원래의 노란 색도 너무 밝지 않은 색으로 바꾸어야 했다고 한다.  

 

 

 

 

 

서울의 북촌마을이나 인사동, 혹은 요즈음 개발이란 이름하에 사라지고 있는 종로의 뒷골목인
피맛골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닌 옛 모습은 너무 빈약하거나 좀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위 사진 : 마이코 혹은 게이샤. 차이는 있지만 분장 모습은 비슷하다.

기온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기모노차림에 얼굴을 하얗게 칠한 마이코(舞妓)나 게이샤(藝妓)를 만나는
행운은(?) 없었지만 우리는 날 저문 골목길을 부러움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위 사진 : 100엔 스시집

오사카로 돌아오는 밤늦은 기차를 타기 전, 가와라마치 역에서 멀지 않은 “100엔 쓰시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신명이 넘치게 일하는 젊은 요리사가 우리를 담당하였다.
그는 나의 서툰 일본어 주문을 재치 있게 받아주며 교토에서의 마무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위 사진 : 오사카로 돌아오는 전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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