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일본

아내와 나의 첫 일본2- 교토1

by 장돌뱅이. 2013. 3. 10.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웠다는 헤이안(平安)시대는 서기 794년부터 400여 년간을 말한다.
백성들은 편안하고 뛰어난 예술작품들이 탄생하던 시절, 숱한 절들과 신사가 더불어 세워졌다.
그 중심에 교토(京都)가 있다고 한다. 오늘은 그곳에 가는 날이라 아침부터 좀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
숙소에서 남바역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하나마루켄(花丸軒)에서 어제에 이어 다시 한번 라멘을
주문했다.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눈에 익은 간판이라 어제 도톤보리를 오르내리며 내심
점찍어 두고 있었다. 딸아이는 이 집 라멘에 대단히 만족을 하였다. 나 역시 구수한 국물에
어제보다는 나은 평가를 내렸지만 일본 라멘은 아무래도 역시 느끼한 맛이 오래 남는 음식이었다. 

교토로 가는 전철은 한큐 우매다(阪急 梅田)역에서 출발했다.
가와라마치(河原町)역이 종착지이나 우리는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교토역으로 가는 지하철로
갈아탔다. 교토역 앞의 밀집된 버스정류장에서 오늘의 첫 방문지인 킨카쿠지(金閣寺)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금각사를 교토의 첫 방문지로 정한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단지 저녁에 오사카로 돌아가는 전철을 가오라마치역에서 타기 위해서 편의상 일정을
금각사 - 코무덤 - 기요미즈데라(淸水寺) - 기온(祇園) 순으로 잡았을 뿐이었다. 


*위 사진 : 금각사 입구

교토역 앞에는 여러 지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몰려 있었다.
그곳에서 버스로 삼사십 분쯤 이동을 하니 금각사 입구였다. 공식적으로는 로쿠온지
(鹿苑寺) 이나 킨카구(金閣)라는 건물 하나가 절 본래의 이름을 압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원래는 14세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라는 사람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선찰로 바뀌게 된 것이다. 로쿠온지라는 절 이름은 요시미쓰의 법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금각은 1398년 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금각은 입구에 가까이 있었다.
사전 지식 없이 결론을(?) 초입에서 갑자기 만난 터라 기대감이 점차 고조되는 즐거움은 느낄 수 없었지만
금각의 산뜻한 모습이 그런 당혹감을 금방 가라앉혀
주었다.
호사하게 튀어 보일 수도 있는 건물의 금빛은 연못의 잔물결에 투영되어 흔들리며
순화되어 오히려 차분하게 보였다.
연못에 인공으로 조성된 듯한 섬들과 돌들이 여기저기
떠있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에 비해 일본은 정원 속에 자연을
만들려고 한다던가.
올망졸망한 꾸밈이 일본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금각사’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것은 꽤 오래 전의 일로, 절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소설의 제목으로서였다. 『금각사』는 일본인 소설가 미시마유키오(三島由紀夫)의 대표작이다.
그는 45세인 1970년 11월 자신의 지지 회원들과 함께 도쿄 육상자위대에 들어가 ‘천황제 부활’,
‘평화헌법폐기’, ‘자위대의 궐기’ 등을 주장하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방식으로 할복자살한 인물이다.
그의 죽음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잘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대학에 들어와 일본군국주의의 부활과
관련한 글 속에서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기에 그의 엽기적인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자살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고 한다.

『금각사』는 그의 이력을 소개하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비록 그 소설이 그의 사상이
우경화되기 이전에 쓰여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혹시나 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정독을 해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내게 『금각사』는 김동인의 소설『광염소나타』
혹은 『광화사』에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을 합쳐 놓은 것처럼, 큰 느낌이 오지 않는
(혹은 솔직히 좀 어렵기도 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한 개인을 통해 분출한 사건일 것이다.
그의 황당한 죽음에 대하여서는 시인 김지하가 오래 전 “미시마유키오에게”라는 부제를 붙인
「아주까리 神風」이란 절창으로 통렬하게 화답한 바 있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처절한 神風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에
   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옛 군가여 별것 아니
   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위 사진 : 도시샤 대학

금각사에서 도시샤(同志社) 대학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아내와 딸은 뒷좌석에서 ‘짠돌이’ 장돌뱅이가 간사이패쓰로 탈 수 있는 버스를 제쳐두고
택시를 타는 걸보니 역시 윤동주시인은 대단하다거니 어쩌거니 하며 놀려댔다. 사실은
시간도 줄이고 도시샤대학까지 가는 방법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는 동안 혹 도시샤
대학의 사람들이 윤동주시인의 시비(詩碑)를 잘 알고 있기나 할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윤동주란 이름을 한자로 들이대도 모르면 ‘벙어리’ 일본어 탓에 넓은 대학 안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택시를 타는 이유는 그 헤매는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정문 수위실에서 머뭇거리며 윤동주의 첫 자를 다 적기도 전에 수위아저씨가
“아! 윤동주!” 하며 지도를 꺼내 친절히 위치를 알려주었다. 도시샤대학은 1875년에
창립되었다. 시비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보이는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들에서 해묵은
느낌이 풍겨 나왔다. 겨울철이 아닌 봄이나 가을에 이 곳을 걸으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위 사진 : 윤동주 시비

윤동주의 시비는 예배당과 이화학관(理化學館) 건물 사이에 있었다.
가서 보니 그 곁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나란히 있었다.
먼저 윤동주의 시비에 인사를 하고 나란히 서서 아내의 낭송으로 시비에 새겨져 있는
그의 서시를 들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학창 시절 윤동주의 시를 한번 읽어보지 않은 한국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를 읽는 순간마다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부끄러움을 비춰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비 옆에 “학교법인 도시샤”의 이름으로 작은 해설판이 있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하여 도시샤 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14일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혐의를 입어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그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었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시, 「십자가」중에서 -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의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며 세상을 떠났다. 


*위 사진 : 정지용 시비

정지용의 시인의 시비에는 교토를 노래한 시,압천(鴨川)이 올라있었다.
정지용은 1923년에서 1926년까지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물 먹은 별”이나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처럼 감각적이고 세련된 묘사와 절제가
그의 시에서 빛난다. 누가 뭐래도 내게 그의 대표작은 노래로도 널리 알려진「향수」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의 시, 「향수」-

회사일로 인도네시아에 살던 90년대 초 아내와 나는 위의 시에 곡을 붙인 이동원과
박인수의 노래 「향수」를 즐겨들었다. 가족 모두가 처음 해보는 외국생활이었지만
낯선 풍물이나 문화가 싫거나 불편하기보다는 신기하게만 느껴져서 특별한 불만이나
어려움이 없었기에 솔직히 고국 생각이 그리 간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아내와 둘이서 밤늦은 시간 술잔을 기울이며 듣는「향수」의 가사와 노래는
종종 우리 부부를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의 세계로 몰아가곤 했다. 서글픔이나 서러움과는
조금 다른, 뭔가 나른하면서도 그리운 듯한, 그러면서도 포근하고 아늑한 ‘전설 바다의 밤물결’
같은 분위기 속으로 자꾸 빠져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럴 때 고개를 돌려보면 아내는 가끔씩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방울을 달고 있기도 했다.

고향이란 단어에는 여타의 보통명사와는 달리 단어 자체에 감정의 밑바닥을 흔드는 깊고
묵직한 정서가 내재 되어 있는 듯 하다. 정지용의 「향수」는 당시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깔려
있는 그런 고향 그리움에 대한 본능을 자극하는 촉매였던 것이다.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정지용은 어려운 가정 형편때문에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지 못하다가 총명함을 아깝게 여긴 친지들의 권유로 서울 휘문고보에 진학을 하게 된다.
휘문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열성을 보인 정지용은 1929년 일본 유학에서 귀국하여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면서 30년대에는 시단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정지용을 일컬어 “한국시는 우리말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체득한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이며 “한국시의 근대적 세련미를 완성시킨 시인”라고 평한 바 있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규보)이라면 「향수」가 꼭 그렇다. 고향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호소력 있는 추상성에 정지용은 그만의 빼어난 언어적 감각을 색칠하여 보여줌으로써 읽는
사람의 감정을 아주 짧은 순간에 고향으로 공간 이동을 하게 만든다. 이어령은 아무도 보지 못한
어두운 들판의 겨울바람 소리를 우리에게 글로써 보여준 시인은 정지용뿐이라고 말했다.
어디 빈 밭에 말을 달리는 밤바람소리뿐인가.
정지용의 고향에선 황소의 울음소리도 게으른 금빛 아니었던가.
게다가 어린 누이의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귀밑머리는 그야말로 몽환적이다.

정지용이 1948년 다니던 이화여전을 그만두고 집에서 소일을 하던 차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7월, 낯익은 청년들이 와서 세상이 뒤바뀌는데 얼굴을 안 내밀면 봉변을 당한다고 말하자
아버님은 집에서 입던 모시 적삼 차림 그대로 ‘문안에 잠깐 다녀오마’ 하고 나선 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어 버렸다.”는 게 장남이 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 이후 그는 무려 40년이 가깝도록 이른바 ‘월북작가’로 분류되었다.
그동안 일반인들은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학문적 접근도 불가능했다.
그의 시비가 이곳 교토의 모교 교정에 뒤늦은 2005년 12월에서야 세워진 이유도
그런 우리 사회의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비 앞에서도 우리는 짧은 인사를 올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