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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라스베가스만 가 보기

by 장돌뱅이. 2013. 3. 12.

샌디에고에 살면서 이제까지 몇번인가 라스베가스를 가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댓 번 라스베가스를 경유한 적이 있다.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라 인근 여행지를 갈 때나 올 때 중간 경유지로서
라스베가스를 택한 것이다. 워낙 땅이 넓은 미국이다보니 자동차 여행이란
종종 한국에서보다 장거리 여행이기 십상이다. 샌디에고와 다섯시간 남짓한
거리를 두고 있는 라스베가스는 현대적 편의 시설과 오락 시설이 밀집되어
있어 장시간 운전으로 피곤해진 몸을 쉬게 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곳이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여행지로서 라스베가스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전히 라스베가스를 목적지로 삼았다.
비록 단편적인 하룻밤씩이었지만 지난 몇번의 경험을 통해 '황량한 사막 가운데
들어선 카지노뿐'이라는 라스베가스에 대한 선입관이 어느 정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라스베가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박과 유흥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할 수 있는 건전 휴양지로 변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한다. 이제는 다양하고
세계적인 음식과 쇼핑(라스베가스에서의 쇼핑은 내 경제적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긴하지만.),
수준 높은 무대 공연이 언제나 펼쳐지는 문화적인 매력 또한 강렬한 도시가 되었다. 

물론 카지노는 거의 모든 호텔의 로비마다 포진되어 여전히 라스베가스를 유지하고
대표하는 관광산업인 듯 보이고 큰길에서 무차별로 살포되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사진이 든 퇴페 비즈니스 찌라시가 어린 아이들과의 산책을 당혹스럽게하지만
세상 어느 여행지든 결국 여행자의 선택 문제는 남아 있다는 점에서 유독 라스베가스만
책임져야 할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 : 아리아 리조트. 트램으로 인근의 벨라지오와 몬테카를로 호텔로 연결된다.

숙소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 묵었던 아리아 리조트 ARIA CASINO & RESORT로 했다.
라스베가스의 대로인  스트립에 들어선 (아직까지는) 가장 최신의 리조트임에도
여름 프로모션의 가격은 착실해 보였다. 작년 라스베가스를 다녀가면서 아리아와
아리아가 속한 일군의 건물들을 지칭하는 시티센터에 대한 소개글을 짧게 쓴 적이 있다.
인용해 본다.

"아리아 이외에도 크리스탈 쇼핑센터,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비다라호텔 등 모두 다섯 개의
건물들이 동시에 들어서 초대형 리조트 복합단지인 씨티센터 CITY CENTER를 이룬 곳이다.
아리아까지 우리를 태워준 택시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리조트이자 쇼핑몰‘
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도 다 몰려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씨티센터는 라스베가스라는 도시 속의 또 다른 도시이다. 시티센터의 총 보유객실
수는 8천여 개로 이는 라스베가스 중심가(스트립) 숙박시설 규모의 10%에 달한다고 한다.
61층의 아리아는 4천여 개의 객실에 거대한 규모의 컨벤션 시설과 카지노가 함께 있어
시티센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사진 : 아리아 리조트의 프론트 데스크

거의 모든 라스베가스 호텔의 로비가 그렇듯 아리아의 로비도 늘 체크인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체크인 카운터마다 줄이 길다. 로비의 반대편에 위치한 카지노에서 뿜어내는 기계음과 
차단막 없이 한 공간에 있으므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로비의 모습은 한마디로
'도떼기시장' 같다. 동남아 고급리조트의 개별적이고 정중한 응대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체크인의 과정까지 혼잡 혹은 무질서하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내 치례가 오면 매우 '기능적인' 친절과 함께 신속하게 체크인이 이루어진다. 
체크인이 끝나면 카지노를 지나서 객실로 가는  엘이베이터를 타게끔 동선이 만들어져 있다.
카지노는 다른 숙소의 손님들도 이용할 수 있지만 객실로 가는 통로는 직원들이 투숙객임을
증명하는 카드(열쇠)를 보여야 지날 수 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프로모션 가격으로 배정된 방은 아리아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빛을 내려다보며 아내와 맥주 한잔 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은 야경을 보여주었다. 

 

 

 

저녁식사는 장죠지 스테이크 JEAN GEORGES STEAKHOUSE 에서 했다.
어디선가 들은 쟝죠지 JEAN GEORGE VONGERICHTEN 라는 이름,  미슐랭가이드가 별셋을
수여한 세계적 명성의 요리사고 하던가. 뉴욕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 그가 운영하거나 그의
이름을 건 식당들이 있다고 한다. 명성에 어울리게 식당 입구의 조형물도 화사했고 내부
분위기는 장중했지만 종업원들의 태도는 산뜻했고 드레스코드도 캐주얼이면 문제가 없었다.
스테이크집이니 스테이크를 주문하였는데 평소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고기의 맛에 후한 평가를 내리며 만족해 했다. 

라스베가스에 오면 피해가기 힘든 승부.
'그 놈의' 기계 앞에 앉았다. 매번 그렇듯 나는 또 여지 없이 기계들의 밥이었고 아내는 기계를
지배했다. 위 사진은 아내가 기록한 대박의 한 순간이다. 다만 3450불이 아니고 34.50불 이다.
아내의 게임 기본단위는 1센트를 넘지 않으므로. 옆자리의 나는 연신 투덜거리며 돈을 털어
넣었고 아내는 수 차례의 사진과 비슷한 대박으로 그 손실의 상당량을 메꾸어주었다.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날 승부는 '약보합세'의 선전이 될 수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매번 이런 패턴, 아내의 선전과 나의 순진함이(?)이 반복된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나는 아내의 '마이다스 손'을 위해 맥주로 건배를 들었다. 

 

아침 식사는 1층의 CAFE VETTRO에서 했다.
이곳은 앞서 몇 차례 이용한 곳으로 올 때마다 아내와 내가 음식에 매우 만족해하는 곳이다.
프렌치토스트나 에그베네딕트. 달걀흰자 야채볶음등이  좋아하는 메뉴이다. 

 

 

아리아 리조트 내에는 3개의 수영장이 있었다. 화씨 110도가(섭씨40도 정도) 넘는 날씨라
그런지 아침부터 수영장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섭씨 40도는 에어컨 영역을 벗어나면 바로
찜통을 의미한다. 햇빛은 바늘이 되어 살을 아프게 파고 들고 바람은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바람과 같아진다. 그런 날씨에도 땡볕에 온몸을 드러낸 채 살을 태우며 신문이나 책을 읽은
백인들이 대단해 보인다. 아내와 나는 숨어들 듯 그늘진 구석자리를 골라 드러누웠다.
수영을 하고 나도 건조한 공기 때문인지 물기가 금방 말라 집중해서 책을 읽기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당신은 비키니구경을 실컷 하니 괜찮겠네."
아내가 내가 할 말을 너그럽게도(?) 미리해주었다.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음료와 스낵을 주문 받는 아가씨들 옷차림도 비키니였다. 
그것이 더운 날씨 속에 일을 해야하는 직원들을 배려한 유니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 사진 : MANDARIN ORIENTAL LAS VEGAS

수영장에서 몸을 적시고 그늘에서 말리고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이 지났다.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아리아와 접해 있는 만다린오리엔탈 호텔로 갔다. 동남아에서 익숙해진 이름의 호텔.
로비가 1층에 있지 않고 특이하게 23층인가에 었었는데, 더욱 특이한 것은 라스베가스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하게도 호텔 내에 카지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어떤 내용과 환경을 손님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출 증대의 가장
통상적인 과정을 포기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으리라.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라스베가스의 변모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인 듯 했다. 

 



식사는 호텔 3층의 MOzen Bistro 에서 했다. 아시아권 음식이 주메뉴였다. 
우리는 롤과 커리를 시켰는데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라 할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공연을 보기
위해 길 건너 편에 있는 MGM GRAND 로 걸어갔다. 초록빛의 외관이 특이한 MGM은 규모는
대단했지만 내부 구조가 좀 투박해 보였다. 아마 우리가 최근에 지어진 아리아 센터에 눈이 익은
탓일 것이다. 그래도 카지노장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북적였다. 아마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인 듯 가슴에 패찰을 단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태양의 서커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계적인 초대형 공연 단체이다.
라스베가스에만도 이 회사가 주관하는 공연이 여럿 있다. 이 날 우리가 본 것은 "카 KA"라는
이름의  공연이었다. "카"는 고대 이집트의 말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내와 내가 라스베가스에서 본 세 개의 '태양의 서커스' 공연 중에 가장 매력이 있었다.
세밀한 조명과 특수 장치를 이용한 무대 연출은 헐리우드의 블럭버스터 영화를 능가하는
시원스런 볼거리를 제공했다. 공연의 이해를 위해  아내와 나의 얄팍한 '식당 영어'를 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공연이어서 더욱 좋았다. 

 



공연을 마치고 다시 아리아로 걸어서 돌아왔다. 날은 어두워 쨍쨍한 햇볓은 사라졌지만 거리엔
여전히 더운 열기가 가득했다. 주말을 맞아 거리를 매운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 듯 걸었다.
레몬그라스 LEMON GRASS 라는 태국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라스베가스에서 좋아하는
태국음식을 맛보는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라스베가스의 이름난 호텔 든 안에 한국음식점 하나 
자리 잡고 있지 못한(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는 공식적이고 거창한 외교 채널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전날 저녁에 이어 다시 기계와 승부에 들어갔다.
나는 연 이틀 무기력하게 기계에 압도 당했다. 아내도 이날은 나와 비슷하게 코너에 몰렸다.
그러나 역시 아내의 손은 마이다스의 그것이었다. 크래딧이 거의 바닥에 달했을 즈음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기적처럼 '황금'을 만들어냈다.  단번에 200불이 넘는 거금을 확보한 것이다.
아내의 재주는 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승부를 끝내는데 있다. 기계의 축하 음악소리가 잦아들자
아내는 미련 없이 경기를 중단하고 곧바로 바우처를 프린트하여 현금과 바꾸었다. 객실로
돌아가기 전 내가 아내의 자금으로 마지막 도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기계와의 대결에서 확실한 흑자를 기록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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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창가에 의자를 붙이고 아내와 라스베가스의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화사하게 명멸하는 불빛. 등뒤에서 부드럽게 흘러오는 음악소리. 
어느 덧 아내의 어깨 위에 얹은 손. 손끝에 느껴지는 살가운 촉감. 
그리고 감미로운 침묵.
......
......
......

어떤 실체를 표현할 때 말이나 글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격정의 감정보다는 잔잔한 흡족함에 깊숙히 가라앉을 때가 그렇다.
그걸 감히 행복이라도 불러도 좋으리라
아내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어도 나른한 행복감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는, 혹은 어깨와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볼 점유율이  반드시 축구경기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운동장의 선수들은 부지런히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뛰어다니 듯이
삶은 그런 행복한 시간의 점유율을 키워 나가야 하는 긴 여정일 것이다.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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