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기 위해 뉴욕에 온 이래 3일째 월스트리트를 걸어서 지났다.
월스트리트 하면 왠지 넥타이를 맨 흰색 와이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나 서류가방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론
연신 핸드폰 통화를 하며 부산하게 거리를 오고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활기차고 바쁜 월스트리트는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퇴근 시간 후에 도착해서 주말을 보내거나 출근시간 이전에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타임스퀘어 TIME SQUARE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타임스퀘어는 42번가, 브로드웨이, 7번 AVE.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지역이다. 이곳에 있던 뉴욕타임즈의 사옥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설명보다 아내와 내게는 매년 12월31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새해맞이를 하는 광경을 중계하는 텔레비전에서 낯이 익은 곳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람들이 번쩍이는 전광판 속에 가득히 서서 합창으로
새해가 오는 순간을 카운트 다운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08년부터 시작되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행사라고 한다.
연말이 아니라도 타임스퀘어는 늘 온갖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사람들이 타임스퀘어를 ‘세계의 교차로’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우리는 생전
처음 장터거리에 나온 촌닭이 되어 광장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배회했다.
성벽처럼 광장을 둘러싼 빌딩에는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전광판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번쩍거리며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광고료가 가장 비싼 곳이라고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장은 우리와 같은 ‘칸트리꼬꼬’들로 넘쳐났다.
아내와 건물의 사진을 찍고 무심히 걸어가다가 남의 카메라에 놀라 피하기도
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팠다. 아침을 먹지 않고 숙소를 나온 탓이다.
우리는 록펠러센터로 가기로 했다. 그곳 지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70층의 GE 빌딩 옥상에 있는 전망대 탑오브더록 TOP OF THE ROCK 에서
뉴욕의 빌딩들을 조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록펠러센터에 도착해서보니
센터 앞 광장에서 큰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센터 지하의
모든 식당이 낮 동안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식사할 곳을 찾아 근처를
돌아다니다 만난 일본식 떡집에서 ‘모찌’와 차로 식사를 대신했다.
식사 후이므로 ‘금강산’을 보아야 했다.
고속의 엘리베이터로 단숨에 탑오브더록에 올랐다.
건물 꼭대기에서 본 뉴욕은 북쪽의 센트럴파크를 제외하곤 동서남북 어디나
하늘을 찌르는 빌딩들이 빽빽했다. 금강산에 만물상이 있다면 뉴욕에는
만 가지 형상의 빌딩이 있는 것 같았다.
뉴욕의 빌딩들은 1900년대 초부터 지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테헤란로에 있는 건물들처럼 번쩍거리는 반사 유리와
기하학적 모양이 아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당신의 부모님이 태어
나기 전. 어쩔 수 없이 창문도, 벽돌도 외부 장식도, 엘리베이터도
오래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래된 건물을 허물지
않는 건 비단 관광객을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오래됨은 사람들
에게 버려진 오래됨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살아남은 오래됨이니까.
철골 구조의 건축 기술이 발전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됨에 따라 빌딩
들은 점점 높아져갔다. 희망의 땅을 찾아 독일에서, 영국에서, 이탈리아
에서, 멀리 러시아와 중국에서까지 사람들은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은행이 세계
최고의 은행임을 과시하기 위해 건물은 점점 높아져갔다. 이번 여행에
당신이 반드시 들르게 될 102층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에
지어졌다는 것을 잊지 마라. 당신이 태어나기 전,
당신의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
-서진의 소설, 『웰컴투더언더그라운드』중에서-
영화 속 스파이더맨의 무대는 뉴욕이다. 빌딩 사이를 접착 거미줄을 쏘며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이 정의의 사나이는 활동 무대가 뉴욕이 아닌 서부의
샌디에고라면 정체가 금방 탄로났을 것이다. 아니 초능력의 영웅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내 일부를 제외하곤 단층의 주택만 가득한 샌디에고에선
그의 활동 영역이 매우 한정적이고 거미줄을 쏘며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그의 장기를 발휘하기에도 제약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악당들은 서부로 오지 않고 멍청하게 뉴욕만 고집한 거지?”
“서부에는 슈퍼맨이 있잖아?”
아내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진지한 상념도 실없는 농담도 아내와 하는 여행 안에선 쉽게 행복이 된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뉴욕현대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
MoMA)으로 갔다. 1929년 단 9점의 작품으로 시작해 현재는 15만점에 이르는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실린 작품 이외에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한번 읽은 것이 미술에 관한 소양의 전부인 나로서는 많이 본다고 해서 본 것을
모두 내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치 뉴욕의 빌딩을 조망하듯이
전시 작품들을 보기로 했다. 그것도 피카소, 세잔느, 모네, 고흐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 한해서만.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가 어린 아들을 설치물 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흔한 풍경이지만 경직된 아들의 자세를 교정해가며 카메라의
앵글을 조이는 사내의 진지함이 훈훈해보였다. 훗날 아들은 어쩌면 미술관 안에
가득한 위대한 작품들보다 아버지와 나눈 이 교감의 순간을 향기롭게 기억해낼
지도 모른다. 그날이 행복한 날이라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고 외롭고 쓸쓸한 날이라면
작은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을 살아있는 자의 권리이자 의무로
자각할 때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미술관 뜨락에 ‘소원을 비는 나무’(WISH TREE)가 있었다.
죤레넌의 부인인 설치미술가 오노요꼬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KEEP WISHING.”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행복해지기 위한
소망을 적어 걸었다. 아내와 나도 따라했다.
우리는 딸아이를 위한 기원문을 적어 걸었다.
*위 사진 : 점심을 먹으러 6번가를 걷다가 만난 이 구조물을 태국 방콕의 한 건물
안에서 본 적이 있다. 알고보니 미국의 유명한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ROBERT INDIANA의 작품으로 비싼 값에 팔려간 것이 라고 한다.
미술관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56 STREET의 르 파커 메르디앙
LE PARKER MERDIAN 호텔의 일층 구석에 있는 버거조인트 BURGER JOINT.
*위 사진 : 버거조인트
간판도 없이 좁은 복도 끝에 있는데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있다. 하긴 뉴욕 초행길의 나부터도 소문을 듣고 왔으니까 남들만
극성스럽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야 겨우 차례가
돌아왔다. 아내는 급한 성격 탓이라고 나무라지만 나는 아무리 유명한 맛집
이라도 기다려서 먹는 것은 질색이다. 그런 성격에 아침부터 걸어 다녀
지친데다가 서서 기다리느라 다리까지 더욱 뻐근해지다보니 햄버거의 맛에
후한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
*위 사진 : 5번가
식사를 마치고 5번가로 나왔다. 거리를 구경하면서 남쪽으로 타임스퀘어까지
걸어가면 미리 예약을 해두었던 뮤지컬의 입장 시간과 대충 맞출 생각이었다.
나의 부실한 경제적인 능력 때문에 ‘명품 브랜드의 거리’ 5번가에서 아내가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은 별로 없어 보였다.
눈 호사라도 해본다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최고급에 속한다는
백화점 버그도프굿맨 BERGDOF GOODMAN 를 만났다.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상표가 많았고 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구매 의지가
있어 들어온 것이 아니므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매장의 분위기나 진열의 방식,
정중한 직원들의 태도에 비해 운동화차림에 배낭을 멘 우리의 복장은 너무
‘튀어’ 보였다. 그것도 은근히 부담스럽긴 했지만 어차피 ‘구경하러 온 건데 뭐’
하며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두 층의 매장을 돌아보다가 아내는 예상보다
빨리그만 나가자고 했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더 이상 돌아보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의 말이다. 누군가 이용하는 사람이 있어 존재하는 곳이겠지만
아무리 사려는 마음이 없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부러움이나 거부감이 아닌
너무 비현실적인 공간이이라는 것이다.
“장돌뱅이가 이곳에 다시 와서 당신에게 마음대로 골라봐 하며 호기를
부릴 수 있는 날이 있을까?”
백화점 문을 나서며 내가 탄식을 과장하자 아내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아마 확실히 없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버그도프굿맨보다 늘 당신이 더 굿맨이니까.”
아! 내겐 늘 아내가 있다.
5번가를 기웃거리며 걸어 아침에 왔었던 타임스퀘어로 다시 돌아왔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뮤지컬 “라이언킹”을 공연하는 민스코프 극장
MINSKOFF THEATRE 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라이언킹”은 무엇보다 만화영화를 통해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있어 얄팍한
우리의 영어 실력으로도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 택하게 되었다.
무대 장치와 조명과 음향과 분장이 환상적인 공연이었다.
특히 밀림 속에서 뛰노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법이 기발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밤이 제법 깊어 건물마다 붙어있는 전광판들이
두드러지게 밝아 보였다. 잠시 브로드웨이의 밤거리를 걷다가 32번가
한인타운의 식당 “큰집”(TEL:212-216-9487)으로 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마치 서울 강남의 어느 곳에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막걸리로 뉴욕에서 보낸 또 다른 하루를 자축했다.
'여행과 사진 > 미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와 나의 뉴욕5 - 뮤지엄마일과 엠파이어스테이트 (0) | 2013.03.19 |
---|---|
아내와 나의 뉴욕4 - 비를 피하는 법 (0) | 2013.03.18 |
아내와 나의 뉴욕2 - 자유의 여신상 (0) | 2013.03.14 |
아내와 나의 뉴욕1 - 지하철 (0) | 2013.03.14 |
샌엘리호 해변에서 주말 보내기 (0) | 2013.03.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