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기도를 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마음을 가다듬어 눈을 감았다.
까짓 사과 하나 먹었다고 매몰차게 인간을 낙원에서 내친
그 분을 꼭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이라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싶었다.
성당의 벽에 걸린 두 팔을 벌린 예수님께 나는 매달리고 싶었다.
하느님!...
잠깐일지, 아님 좀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다.
(중략)
학급 전체가 모인 날을 꼽으라면 한쪽 손가락으로도
셈이 충분한 우리 반 아이들과도,
어쩌다 있는 업데이트이기 때문에
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간 운영되어 왔던 어줍잖은 홈페이지도,
그리고 참으로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할 상황이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휴식"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읽으며
뭔가 불안감에 소름이 돋았다.
애써 좋은 일일 꺼야 라고 자위를 하며 서둘러 그에게 전화를 했다.
아득히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덤덤하면서도 지친 그의 목소리.
“병원에서 희망이 없다네요.”
놀라움에 경황이 없어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로 온다는 말을 들으며 이겨내시라는 상투적인
격려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그냥 두루뭉실 전화를 끊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촛불시위에 온 가족을 동반해서 다녀온 그였는데...
그가 갑작스런 말기암의 진단을 받았다는 메일을 보내준 사람은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동료교사였다.
나의 말을 전해 듣는 아내도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건장했던 젊음과 선한 인상의 조용한 그의 아내,
눈빛 초롱한 그의 아들과 딸을 들먹이며
또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위 사진 : 그와 그의 가족을 여수의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날.
그와 나는 인터넷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인연이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그의 “열린그림판”이란 홈페이지를 보게 되었고
(왜 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게시판에 짧은 글을 남기곤 했다.
*위 사진 : 작년 겨울 미국으로오기 전 그의 가족과 여수에서 잠깐 만났다.
일년에 겨우 몇 차례 글을 남길 뿐이었지만 나를 기억해주는 그와
얼마쯤 뒤 아내와 함께 여수를 간 길에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훤칠한 키의 (본인 표현대로) “체육선생같은 미술선생”이었다.
실제로 여수시 대표선수로 나갈 만큼 그림보다 배구에 열심이라고 했다.
그날 우리는 각자의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몇 군데 자리를 바꾸어가며
술잔을 거푸 뒤집은 끝에 대취를 했다. 초면에 서로 실수를 한 것이다.
실수를 공유하는 것은 때로 인간적인 친밀감을 더하기도 한다던가?
아내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위 사진 : 3년 전인가 겨울방학 그의 가족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 뒤로 주로 그의 방학을 이용해 우리는 서너 번의 만남을 더 가졌다.
그는 늘 겸손했고 교사로서 진심으로 학생들을 사랑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와 학생들의 스스럼없는 대화를 보며 나는
그와 같은 교사가 있어 우리의 교육이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었다.
댓가로는 그냥 나의 글을 읽는 것이라고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글이라면 그보다 먼저 내가 그의 그림과 글을 좋아했다.
미술교사라지만 나는 그가 글쟁이로 나서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의 글 앞에서 나는 늘 부끄러웠다.
그 중 몇 편을 본다.
<삶을 견디고 삶을 만나게 하는 술>
더운 여름 날 부모님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사오다가 으슥한 골목에서 꼴짝거렸던
어린 시절로 술에 대한 기억은 시작된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일을 나가면
으레 따라주시던 막걸리로 기억은 이어지고, 맛을 알 리 없지만 바싹바싹 타는 한
여름을 흥건히 적셔 주었던 중학교 시절의 술맛도 어둡고 칙칙한 것은 아니었다.
미대 간답시고 어려운 살림에 광주로 올라가 미술학원을 다니던 고등학교 때 혼자
마시곤 했던 겨울 날 해질녘 포장마차의 소주맛에서 술이 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로 인해 더 힘겨워진 아버지의 뱃일, 더 오랫동안 갯벌에 박힌 바지락을 파내야
했던 어머니의 나날을 벌써부터 알았을 리는 물론 없었을 텐데 고등학교 때의 술맛은
항상 쓰디 썼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닌 퍼부었던 대학시절, 취하면 객기부터 우선 올라와
기억 하고 싶지 않은 부끄럽고 아찔한 사고도 많았던 술도 있었다.
여수에서 뱃길로 두 시간 걸리는 낭도중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교문 앞에 모래밭이 넓어 참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두 사람이 타면 꽉 차는 대야같이
작은 배를 만들어 그 모래밭 너머 바다에 아침이면 그물을 쳤다. 학교가 끝나면 그물에
걸린 꽁치를 안주 로 소주잔을 힘있게 부딪치며 한 시절을 보냈다. 유난히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기타에 맞추어 벌건 얼굴로 불렀던 노래도 있었다. 모두가 하루라도
모이지 않으면 이 먼 섬에 떨어뜨려진 우리가 너무 불쌍하지 않냐며 서로를 확인
하던 그곳은 신선들의 세상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한 주일을 보내야 하고, 퇴근이
따로 없는 , 그래서 다시 한가족인 섬교사에게만 부여되는 유일한 낙이었다. 학교
앞 모래밭은 우리들의 해방구였고, 술은 그렇게 우리에게 섬을 견디게 했다.
발령을 받기 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광주 불로동에 있는 작업실에서의 술판이야기는
술에 대한 내 기억의 절정이다. 삐그덕 거리는 나무 계단 끝의 작은 골방에는 나를
포함 해 전업 그림쟁이라고 자칭하는 여섯 선배들이 시인 곽재구씨의 따뜻한 얼굴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술판은 곧 일상생활이었다. 소모적이고 오로지 취하기
만을 위한 단순하고 무모한 술판이 아니었다. 건강한 하루를 만들어주는 힘이었다.
그 안에는 치열하고 무서운 작업에 관한 숱한 고민들이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피붙이
이상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 다. 그곳에서의 술은 우리의 고단함을 덜어주었고, 분노
해야할 곳에 분노해야 함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너 취했구나’라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 좋은 곳이었다. 허름한 대문 위에 등꽃이 자지러질 때면 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림쟁이들이 주류 를 이루고 글쟁이들, 어떤 날은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씨도 찾아온 적이 있는 곳이다. 그 렇게 해서 광주의 그곳은 문화
마당으로 자리 잡아 갔다. 하루가 지나면 문 앞에 가득 쌓 인 술병들을 지켜보면서
되팔아 해장거리를 만들 궁리를 하기도 했던 가난한 그 곳. 나 는 그곳에서 내 그림을
배웠으며, 세상을 배웠다. 그 때의 술은 비틀거리는 날 바로 걷 게 해주는 힘이었다.
지금은 낡은 건물이 뜯기고 우라지게 반듯한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새 건물의
반듯함과 빈틈없음을 견디지 못하는 그 때의 사람들 역시 등꽃나무가 파헤쳐질 무렵
모두 그 곳을 떠났다. 다들 자기 몫의 칼날 같은 붓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서든
아직 도 시들지 않고 비겁하지 않은 땀냄새 가득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다륻 나처럼
그 때의 술판을, 그 만남과 그리고 고단했던 날들을 잊지 않고 살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사십여년 동안 술은 나라를 잃은 통분을 삭히는데 마셔졌다.
60-70년대를 건너면서 ‘술 마시고 심각한 정치 문제는 잊어버려라’는 정책에 이용
되기도 했던 술은 90년대에 들어서 신 음주 문화가 형성되면서 그 폐해성과 위험성만
부각 되어 건강과 실속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갈수록 술 맛이 안난다. 사실 술맛 나는 세상도 아니다. 나는 술을 자주 마시지만
잘 마시지는 못한다. 잘 마시고 못마시고의 기준을 정해서 따 져보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쟁쟁한 술꾼들을 많이 본 터라 함부로 자신하진 않는다. 하지만 술자리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벽없는 어울림이 좋아서다.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시는 술이나 억지로 마셔야만 하는 술은 알콜용액을 들이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술자리는 얼마나 우리를
피곤하게 하겠는가. 여럿이 만나도 하나의 이야기가 오가는 술자리. 작은 농담도
놓치지 않고 크게 웃는 술 자리. 서로에 대한 반가움과 관심어린 배려로 채워지는
술자리. 이것이 내가 좋아하 는 술자리이고 나의 술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눈으로 가슴으로 마시는 따뜻한 술한잔이 그립다.
*위 사진 : 정병우의 그림(그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아버지와 배고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남아 친구들과 공을 차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생이 와서 날 찾는
다. 나는 함지만큼 튀어나온 입모양으로 집으로 간다. 소꼴을 먹이러 가는 것이 일 중의
하나이다. 영문도 모른 채 거나하게 체벌을 당한 소는 멀리 달아난다.
지겹도록 졸리운 뻐꾸기 울음소리, 자기 속만 채우는 야속한 누렁소...쓴 풀잎 입에 물고
고녀석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그 하염없는 무료함만 아니면 사실 그 일은
아주 편한 일이다.
바다일... 긴 말목을 갯펄에 박고 부러진 것들은 다시 뽑고, 말목에 이은 밧줄에 그물을
걸고 물이 빠지기를 한참 기다려 허리춤까지 오르는 갯펄에 들어가 그물을 그 속에
꽁꽁 눌러 묻고, 다시 물이 차기를 기다려 어둑한 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얼마
후면 이렇게 막아놓은 그물을 다시 걷어 온다. 장갑이 찢기고 온 팔뚝이 상처투성
이가 돼서 돌아오곤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어머니가 안달이시다. 같은 또래들과 견주어
난 일을 많이 한다고 항상 불만스러워 했다. 일도 일 나름이겠지 만... 어린 나이에
바다에 나가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까마득할 뿐이다. 더구나 점심까지
준비해서 하루종일 바다에 떠 있어야 하는 날이면 까닭모를 화가 치밀 어 오르기 일쑤!
투덜투덜 거리며 일하기 싫어한 모습을 내비칠 때면 난낫하게 못한다 고 또 나무라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아부지 배고파서 일 못하겠어요!” 하면 된
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밀려 있는 일들이 산더미라도 “집에 가자” 하시며 말없이 노를
젓는다. 몇 번 써먹던(?) 이 방법도 나중엔 아버지의 막걸리 공세 작전으로 통하진 않았
다. 문득 아버지가 과거에 숱하게 겪어야 했을 ‘배고픔’에 대한 한스러움이 생각난다.
*위 사진 : 정병우의 그림 "아버지와 바다"(그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 시절 같이 일을 나간 후 돌아와 아버지의 모습을 구겨진 화선지에 습작으로
그려보았다. 이 작품을 완성해본 적은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결코 저게
아니다란 것이다.
그의 <겨울바다 이야기>란 글과 그림을 보고 내가 아래와 같은 댓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느낌은 지금도 여전하다.
“글을 읽으면서 아내와 내가 여행이랍시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이 유치한 일이거나
아니면 부끄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요한 그 어떤 것을 나는 끝내 깨달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림 속 망망한 하늘이 ‘가늠할 수 없는 물 속 깊이보다 더한 무서움’처럼
쿵 하며 가슴을 울립니다.”
정병우.
그가, 십년이라는 나이를 넘어 이제 친구가 된 그가,
젊은 나이에 죽음의 병마와 싸우고 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사랑하는 그의 고향 마을의 뻘밭처럼 경건한
삶으로의 ‘반전’을 이루었으면,
그래서 내가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 -겨울 꼬막 한 접시에 소주 한 잔-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일어나시라, 벌떡 일어나시라.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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