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소셜넘버를 받기 위해 SOCIAL SECURITY를 방문했다.
미국 관공서에서는 기다리는 게 제일 큰 일이다.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경우에도 일의 처리가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늘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린 후에야 내 번호가 호출되는 창구에 앉을 수 있었다.
경쾌한 인사로 우리를 맞아준 직원은 필리핀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나와 아내의 여권과 비자를 받아든 직원은 결혼증명서(MARRIAGE CERTIFICATE)를 요구했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번역 공증된 '결혼증명서' 원본은 노동허가와 비자를 발급 받을 때
다른 서류들과 함께 변호사를 통하여 이미 이민국에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변호사는 물론, 주변의 어느 누구도 소셜넘버를 받기 위한 준비물로 결혼증명서를 이야기 한 적 없기 때문이다.
이미 아내가 나의 아내임이 증명되어 아내가 가족 비자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직원은 규정에 결혼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고 짧게 대답했다.
잠깐 침묵의 시간이 있고 난 뒤, 나는 아내의 비자에 프린트된 회사명과 나의 이름를 들어 실질적인 결혼증명이 되지 않느냐고
다소 비굴한 웃음을 지어가며 말했지만 그녀는 규정은 규정이라고 컴퓨터에 시선을 둔 채 새침하게 대답했다.
나는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필요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샌디에고에 수많은 한국인이 있지만 이 일로 비자 외에 결혼증명서를 요구받은 사람은 없는 걸로 안다."
'수많은(THOUSANDS, THOUSANDS OF)' 이라고 일부러 반복해서 말할 때 목소리가 약간 커지기도 했다.
'왜 당신만 그걸 요구하느냐?'는 말은 애써 참았던 것 같다.
그녀는 어깨를 박쥐처럼 오그라뜨리며 두 손바닥을 보이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제스처를 과장되게 해보였다.
영화에서 미국인들이 모르겠다거나 황당할 때 짓는 그 표정과 동작 말이다.
직원은 규정을 프린트 하여 관련 부분을 형광펜으로 북북 긋더니 내게 읽어보라며 건네주었다.
규정이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NEXT!"를 외치는 것으로 나와는 일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결혼증명서라는 종이 한 장 없으니 아내와 내가 부부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뭐야! 당신과 내가 그 여자 면전에서 찐한 프렌치키스라도 하면 부부임이 증명될려나?
그것도 아니면 더 진한 19금의 퍼포먼스라도 벌이며 'YOU SEE?!'를 외치면 될려나?"
아내에게 흰소리를 하며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오다가 보니 아무래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회사일 도 바쁜데 또 시간을 내어 이곳에 와서 차례를 기다리기 싫었다.
결국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번호표를 받아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려 다른 창구에 앉게 되었다. 이번에는 늙수그레한 백인 여성이었다.
처음 온 것인양 시치미를 떼고 나는 아내와 나의 비자를 내밀었다.
잠시 말없이 일을 처리하던 그녀도 기여코 그 놈의 '결혼증명서' 얘기를 꺼냈다.
나는 솔직히 좀 전에 다른 창구에서도 그 때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그녀는 자기도 보아서 알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도 글렀구나' 하는 생각에 슬슬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전에는 없던 사항을 왜 요구하느냐고 조금 목청을 높이려는 찰나 그녀가 손으로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웃음을 지으며 나의 아내임을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규정은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다고 친절한 어투로 덧붙였다.
나이든 직원의 융통성으로 아내는 등록을 마쳤고 2주 뒤에는 소셜넘버를 받았다.
제길!
아내와 저 결혼한 것 맞습니다. 25년째 살고 있다구요.!!!
(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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