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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새 카메라에 익숙해지 듯

by 장돌뱅이. 2013. 5. 30.

받아놓은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한국에서의 20여 일이 잠깐 사이에 지났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한강변을 달리며 내다보는 창밖에 겨울답지 않은 화사한 햇빛이
파란 강물 위로 쏟아져 내렸고, 나는 그것이 아깝다는
조금 터무니 없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엘에이로 오는 비행기 안.
한국에서 채 정리를 하지 못하고 온 일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있었다.
읽던 책을 책상머리에 두고왔고,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조문에 친구에게 대신 부탁했던
조의금을 갚지 않은 것도 있었다.

거기에 또 살붙이의 염려와 애끓는 정을 두고 왔다.
90년대 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주재하러나갈 때는
이국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든 탓인지
이번의 미국행은 기대감 대신에
건조한 업무의 실행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장모님은 인도네시아로 갈 때에는
외국생활을 하러나가는 사위가 내심 자랑스러워
은근히 주위에 자랑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조심스레 미국행을 말씀드리자 조금 당황한 빛을
보이시더니 기여코 눈물을 보이셨다.
팔순을 넘기신 장모님에게 먼 곳에서 생활하는 자식이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의 어머니가 살아계셨다고 하더라도
아마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엘에이공항을 걸어나오며 한가지 더 두고온 것이 생각이 났다.
카메라를 기내에 두고온 것이다.
아차! 하며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확인해 보았지만
청소 도중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샌디에고로 오는 승용차 안에서
손에 익은 카메라를 못내 아까워하는 소심한 내게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낡은
카메라니까 마음 쓸 것 없이
이 기회에 새 카메라를 장만하라고 했다.
그리고 '액땜'이란 말을 꺼냈다.
미국에서 다가올지도 모를 모든 나쁜 일이 카메라에 묻어 사라져 버렸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액땜'이란 단어는
이럴 때 들으니 지난 시간의 안타까움을 잎날에 대한 긍정으로 바꾸는
재치있고 기발한 발상이었다.

두고온 것도 소중하지만
가야할 길도 여전히 소중한 것 이닌가.
새 카메라에 다시 친숙해지 듯
내 앞에 놓여진 새길을 좀더 유쾌하게 가야 하리라.  
달리는 차앞으로 샌디에고로 가는 5번 프리웨이의
길끝은 멀리 뻗어나가 파란 하늘과 닿아 있었다.
딸아이는 샌디에고로 오는 내내
뒷죄석에서 카메라를 두고온 나를 짖궂게 놀려댔다.

(2007. 12)
*미국에 살집을 장만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한 뒤 나는 한국에 가서
 이국살이의 최종준비를 했다. 그리고 2007년 12월 미국으로 왔다.
그 첫날 쓴 글이다. 위 사진은 다른 시기의 방콕행 기내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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