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하면 나는 그의 70년대 시집 『참깨를 털면서』와 광주민중항쟁 직후인 80년 6월 초 침묵의 세상에 절규하듯 외친 절창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지평선에 서서』에서 우리 역사와 현실과 삶의 아픔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밭’을 다시 넉넉하고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는 듯한 비도덕적, 시대착오적 무리들의 터무니없는 논리가 흘러넘치는 대선의 와중에서도 그의 시는 각별하게 읽힌다. 쉽게 투정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련다. 신동엽의 말처럼 껍데기는 저희들끼리 춤추다 그냥 저희들끼리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변함없이 남아있는 것은 ‘밭’이 될 것이다. 늘 그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길을 찾지 못해 밭으로 갔다
저물녘,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서
“흙 알갱이를 조금만 만져도 좋으냐?”고
물었다 남의 밭이었지만 밭은 통째로 풀꽃들을
흔들어주며 내게 깊고 축축한 흙고랑을 멀리까지
내주었다 그럼 좋지. 나는 아무런 씨앗이나 뿌려두었다
며칠 후 새벽, 이슬을 털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밭은
갖가지 식물들의 얼굴을 내밀어주기에 바빴다 잎새들 푸른
정맥에 붙여 실말 같은 푸른 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있었다.
-「멀리 가는 길 찾기」-
옛사람들 신발이
삭아서 흙으로 스며든
천리만리 지평선에
흰 눈이 내린다
11월 단풍나무처럼
허리를 수그린 육신들 위에
돌미륵마저
풀 구덩이에 파묻힌
천리만리 지평선에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못내 잠들 수 없는
그리운 님 하나 남겨둔다
아직은 꺼버려서는 안 될 불씨인 듯.
- 「지평선에 서서」-
동해의 배꼽을 찢고 솟아오른 저 붉고
둥근 칼날 속에서 그러나 다시 태어나려는 자여
이제 그대는 다시 밭으로 가야 한다 총칼도 흙으로 만들어버리는
절망도 흙으로 만들어버리는, 돼지. 뱀. 닭. 원숭이. 소. 말. 쥐. 양. 호랑이.
토끼...... 를 마음껏 놀게 하고 일하게 하는 밭을 보라
시간과 공간도 푸르게 썩혀서 거름을 만들고 온갖 곡식들의 여문
모가지를 춤추게 하는 밭-잘 익은 누룩이 깊숙이 가라앉은 술항아리처럼
밭은 모든 유생물과 무생물이 비빔밥으로 섞여서 맛을 내는 고향이다
밭은 돌멩이한테도 눈과 귀, 코와 입술을 진흙마냥 주물러서 붙여주고
- 「다시 밭으로 가야한다」 중에서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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