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환의 시는 따뜻하다.
그의 시 속에 드러난 사회적 상황이 때로 살풍경한 것임에도
그는 어머니의 모태 같은 따뜻한 시선으로 그 순간들을 끌어안고 있다.
따뜻함은 날카로움이나 격렬함보다
세상의 근본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집회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과 사람이 더는 섬이 아니다
보이지 않던 길이 조금 보인다
촛불 앞에 일렁이는 슬픈 얼굴도 아름답다
차고 센 바람이 간혹 불어왔지만
촛불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하늘의 별이 꺼지지 않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간 아이들도
따뜻한 별이 되어 우리 곁에 내려왔다
-「겨울밤」중에서-
그는 오래 전 “아이들을 이 땅에 바로 세우겠노라고 뛰어다니다”(「나의 집」중)
부당한 체제의 횡포에 떠밀려 잠시 교직을 떠났어야 했던 모양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시절의 제자들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힘들었던 지난 시간조차
“아픈 채찍”이라는 성찰의 의미로 받아들일 뿐 부당한 세상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의 따뜻한 포옹 속에 아이들은 “생애의 별”이 된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굳게 입 다문 쇠교문에 매달려 울던 아이들
언젠가는 꼭 한번 빌고 빌어
용서받겠노라고 다짐하던 나 먼저
가던 길 지쳐 허덕일 땐 언제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아픈 채찍들
나눠 가진 상처 때문에 더 자랑스러운
내 생애의 별이 된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내 생애의 별들」중에서-
시속에서 그는 이미 “겨울 가야산”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생피”를 머금고 청정한 새벽 기운을 거느린 눈 덮인 “겨울 가야산”.
눈 덮인 가야산에 새벽 햇살 점점이 붉다
직선에 가까운, 굵은 먹을 주욱 그어
하늘 경계를 또렷이 판각하는 지금이
내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장엄한 순간이다
그 앞에선 언제나 엎드리고 싶어지는
저 산의 뿌리는 쩡쩡한 얼음 속처럼 깊고 고요해도
곡괭이로 깡깡 쳐보면 따뜻한 생피가 금세 튀어올라
내 얼굴 환히 적셔줄 듯 눈부신데
사람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언제쯤일까, 저 산과 내가 가장 닮아 있을 때는
-「겨울 가야산」-
시집.『겨울가야산』에서「산골 마을 은행나무」를 반복해서 여러 번 읽었다.
가을 깊은 산골 마을에 드니
마을 중심에 2백 년은 실히 묵은 은행나무가
온 마을에 노오란 빛 흩뿌리며 곧추서 있다
그 아래 여대기로 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
쌕쌕 자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바람이 지나다 심술을 부려
등 뒤로 은행잎을 수북수북 뿌려대는데
선 고운 어깨에도 머리 위에도 흐르르 쌓인다
나무도 아낙도 아무 걱정 없는 듯
제각각 제일만 보고 섰는데
정지된 영화 장면에 들어서듯 황홀경에 들어
나는 왜 한참이나 발 묶여 서성였을까
수북이 쌓인 저 잎 위에 굵은 눈이라도 덮히면
땅 위로 튀어 올라온 뿌리는 이불을 끌어 덮고
아랫목으로 발 벋어 새봄을 기다릴 테고
아이는 꿈속에서 엄마가 읽어준 이야기 듣고
한잠을 더 자고 일어나 뛰놀다가
10년, 20년 지난 어느 날, 문득
세상 어딘가에서 엄마의 음성 듣고 벌떡 일어나
벼락같이 이 나무 아래로 달려오리라
노오란 은행잎, 아프도록 실컷 맞아 보려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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