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부활절 달걀이나 크리스마스선물을 노려 교회에 나가본 후
학창시절 몇 번 그리고 결혼 후 아내와 또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그다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내가
이곳 샌디에고에서 아내와 성당에 나가길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내게 성당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소라기보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곳 살림살이의 정보를 얻는
세속적인 장소의 의미가 더 강한 탓에
성호를 긋는 것마저 어색한 단계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건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이전에 나를 이곳 미국까지 보내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해주는 분도 계셔서
그냥저냥 한 달을 넘기고 있다.
샌디에고에 한인성당은 한 곳뿐이라고 한다.
미국인들의 성당을 빌려 그들이 예배를 본 후
오후에 우리는 예배를 본다.
한국의 교회나 성당처럼 주위 환경과 두드러지게 달라 보이는
외관이 아닌 마치 좀 규모만 큰 평범한 마을 집같은 성당의 첫인상이
정감있게 다가왔다.
따뜻하게 맞아주면서도 적당히 무관심한 사람들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아내와 내게는 좋았다.
첫날부터 예수님의 크나큰 은총을 받으라 들이밀면
얼마나 부담스러우겠는가.
아무튼 성당이 아내와 나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되면서
오래간만에 성경을 펴볼 기회가 조금 늘게 되었다.
덕분에 구절 하나가 기억 속에 남게되었으니 2월 한달 동안
일요일 오후를 한두 시간을 투자한 보람은 있었던 것 같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 고린도전서 1장 26 - 29절 -
읽다가보니 “하늘 아래 큰 것 없네 땅위에 새 것 없네” 하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이른바 ‘고소영’과 ‘강부자’ 정권의 출범이란 강진 속에
우리 사회의 진보 진영이 흔들리고 있는 듯 하다.
흔들리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치 못한 것도 같지만
적어도 발전적 분화라는 소망스런 수사를 쓰기에는
그 모습이 처절해 보인다.
선진적인 활동가들만의 ‘자주’니 ‘평등’이니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의 리그전을 벌이기 전에
성경에 나와 있는 말대로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고, 천대받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처지와
그들의 소리에 자세를 낮추어 귀를 열고 다가가는 모습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다시 옛 기억을 더듬어 말이다.
급할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난 대선 때 한 일’을 알고 있지만
희망은 여전히 그 속에 있고
또 그 속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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