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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우리 동네 별다방에서

by 장돌뱅이. 2013. 6. 21.

오래 전, 딸아이가 아직 학생이었던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스타벅스가 들어온다고 즐거운 표정으로 전해 주었다.
"별다방이?  근데 그게 뭐가 좋지? 아빠가 부업으로 여는 것 도 아닌 터에······."
시큰둥한 반응에 딸아이는 "왠지 폼 나는 것 같잖아! 우리 동네가!" 하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스타벅스가 단순히 커피점이 아니라 언제부터 마을의 '폼'까지 올려주는 상징이 되었나 싶은 생각에 좀 냉소적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젊은 세대들의 감성적 예지력은 남달랐나 보다.
경제 불황으로 미국에서는 2백여 곳의 점포가 문을 닫았지만, 올해 한국 스타벅스는 오히려 수십 개의 매장이 새로 문을 열고, 매출증가율도 전 세계 평균치의 두 배에 달하는 20%를 기록했다는 보도를 보니 말이다. 하긴 '장미'니 '우정'이니 하는 지금와서보면 촌스런 이름이 붙은 70년대식 지하다방에 익숙했던 나부터도 미국에 오기 전 딸아이와 대학로에서 가보았던 밝고 깔끔한 스타벅스가 싫지 않았다. 

얼마 전 미국에 다니러 온 딸아이가 가장 실망한 것 중 하나가 그 쟁쟁한 '별다방'이나 '콩다방'의 후줄그레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쇼핑몰 한구석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자리하고 있는가 하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실내 공간도 협소하기도 하고, 초라할 정도의 허름한 철제 테이블 몇 개가 매장 밖에 놓인 것이 전부인 그곳을 '원조'의 모습이라고 인정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쇼핑몰 옆에도 그 별다방이 있다. 매장 안팎의 분위기는 특별할 것 없이 한국에 비해 '후진 원조'의 모습이지만 그곳에서 보는 주변 야경이 나쁘지 않은 곳이라 가끔씩 찾게 된다.

오늘도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가 아내와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점 하나가 그곳을 찾는 개인과 그곳이 위치한 마을의 어떤 문화적 위상을 격상시킨다는 착각은 상품의 판매전략과 대중의 기대치가 만들어낸 일종의 허상일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투명한 유리와 세련된 인테리어가 빛나는 곳도 아니고 마을의 이미지를 높이는 어떤 특별함도 없는 이곳 미국의 별다방이지만 손 안에 따뜻한 커피를 쥐고 아내와 눈을 마주치는 시간은 커피처럼 따뜻해서 좋다.

태양이 거리를 비추거나 황금의 먼지처럼 황혼이 따뜻한 대지 속으로 밀려들어올 때, 그리고 밤이 찾아와 수백만 개의 불빛들이 세상을 대낮처럼 밝혀줄 때면, 나는 어김없이 카페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멍청히 앉아 있다. 시간을 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 앞에 펼쳐진 세계를 바라본다. 파리는 문을 활짝 열고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날마다 큰 길을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각양각색의 군중들을 사열하고 있다. 모든 인생의 모습들이 거기에 총망라되어 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자신을 위해 천 가지 이야기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 헤밍웨이, 『파리는 축제다』 중에서 -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해마다 이 맘때쯤 돌이켜보면 지나간 한 해는 늘 힘들었던 기억보다 감사해야 할 일로 가득하다.
아내에게, 딸에게, 그리고 주변에 갖가지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들에게 웃고 노래하고 떠들거나 화내고 인상쓰고 싸우던 시간들에게, 오늘은 커피처럼 따뜻한 감사와 격려와 사랑의 말을, 헤밍웨이가 말했던 "우리들을 위한 천 가지" 이야기를 건네고 싶다. 다시 힘든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그것들에 당당히 맞서기 위한 큰 호흡을 내쉬며 부디 이 밤만이라도 모두 평안하시라!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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