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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정약종 아구스티노와 유세실리아

by 장돌뱅이. 2013. 6. 21.


이제 작년이 된 2008년 크리스마스날.

아내와 나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며 천주교인으로서 각각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 이외에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다.

정약종 아구스티노.
아내는 유세실리아.

세례를 받기 전 정약종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 분이 천주교 전래 초기에 이 땅의 숱한 순교자 중의 한 분이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정약종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대학자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는 도중에
일종의 덤으로 그가 정약용의 형제임을 알게 된 것이다.
또 다른 형제로 흑산도 유배 중에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그린 소설에서
그의 이름과 참혹한 죽음을 읽은 적도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그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대충 요약해 보면 이러했다.

   선암(選菴) 정약종(丁若鍾) 은 1760년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1801년 신유년의
   대박해 때에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786년에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입교에
   있어 망설이던 태도가 성 아구스티노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이름을
   따랐다고 한다. 그는 평신도 모임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된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집필하기도 했다.
   체포 후 국문 기록이나 황사영백서 등이 전하는 그의 순교의 마지막 과정은 그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도 확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그는 길거리에 모인 군중들에게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행할 일이오."

   그의 순교에 이어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큰아들  정철상(丁哲祥, 가를로)도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 유세실리아와 작은 아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그리고 딸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각각 순교하였다.

가히 전율스럽기까지한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 공포 앞에선 베드로조차도 세 번이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던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성호를 긋는 것조차 익숙치 못한 날라리신자일뿐이다.
마치 태극1장의 기본 품세도 익히지 못했는데 검은띠의 도복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 없다.
이름은 빌려왔지만 그 분과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입교에
망설여 늦었다는 사실 밖에 없고
나의 얄팍한 신심(信心)의 정도로 보건데
아마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럴 것 같다.

미국에 와서 시작된 천주교와의 인연은 특별한 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한 우연 때문이었다.
기존의 신자들이 초심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과도한 관심이나 종교적 은총에 대한 '감동의 도가니'가(?)
부담스러워
예배당에 들고남에 좀 무관심한 곳을 찾다가 보니 성당에 오게 된 것이었다.

솔직히 천주교(기독교) 전래에 대한  젊은 날의 나의 생각은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서양제국주의 본격적인 침략에 앞선
문화적인
선발대의 의미로 간주해 왔었던 터라 그다지 곱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반복되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의 '땅'에 대한
정직한 관심과 선한 싸움에는
게으른 채
다분히 관념적인 용서와 화해만을 강조하는 듯한 교리는 실제적인 역사의 진보에 기능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세상을
유지하고 고착화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가 아닌가 의심해오기도 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는 개인적인 회개만으로는 세상의 구조적인 부조리는
끝내 깨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와의 만남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뜻밖인 일이다.
  
하지만 한번도 소망하지 않았던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다가왔듯
(모든 일이 미리 내정된 운명에 의한 것은 아니라해도)
삶은 자신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비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성당교리반을 담당하신 수녀님의 강의는 매우 시원시원하면서도 진지한 감성이 있었다.
종교에 대한 어설픈  '삐딱함' 을 늘 한 구석에
지닌 내게도 거부감이 없는 매력적인 내용이었다.
나의 속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하듯 언젠가 수녀님은 하느님은  "수동적인 전능" -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폭군의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전능 - 으로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했다.
그리하여 침묵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뢰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생각과 지식이 짧은 내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답답한 세상을 이겨나가는 방법으로
격앙된 분노 이외에
좀더 근원에 닿아있는 지혜처럼 느껴져 자주 곱씹어 보게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고 했던가?
아뭏튼 천주교에서 새 이름을 얻었고 나는 이제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 곳에 가깝게 다가가
이제까지 와는 다른 어떤 '꽃'이 되어 화답하고 싶다.

하지만 갑자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내와 함께 매일 조금씩 성경을 읽어볼 작정이다.
더욱 열심히 아내와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면서.

그러다보면 언젠가 모든 일에 기뻐하고 기도할 수도 있을까?
그러다보면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당연하고 흔한 일들이 신비로워질 수도 있을까?
그러다보면...
 

(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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