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슈퍼에서 먹거리를 사서 주차장으로 걸어오던 아내와 내게 깔끔한 차림의 여성이 다가와 물었다.
"교회에 나가세요?"
예전엔 이런 물음에 좀 당황스러워했지만 (아니라고 했을 때 대개 그녀 같은 사람들이 따라붙으며 보여주는 집요함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제는 좀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 성당에 나갑니다."
아직 믿음에 투철한 것은 아니지만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가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아 그러세요. 열심히 다니세요'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던 우리에게 그녀의 이어진 질문은 우리를 매우 당황스럽게 했다.
"성당에 나가셔도 구원의 확신은 있으세요?"
아내와 나는 잠시 멈칫하며 눈을 마주쳐야 했다.
'구원의 확신?'
이건 또 뭔 새로운 버전의 질문인가?
종교철학과 학기말 고사에 나올만한 시험 문제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슈퍼주차장에서 트렁크에 부식거리를 싣다가 즉흥적으로 대답하기에는 실로 난해하고 엄청난 종교적이고 철학적 질문 아닌가.
1 과를 공부했는데 배우지도 않은 2과에서 출제된 시험지를 받은 학생처럼 잠시 멍해있는 우리에게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섰다.
"확신이 없으시면 이 글을 읽어보세요."
그녀는 우리의 만류를 무릅쓰고 기어코 차 트렁크 속에 교회에 나오라는, 예수를 믿으라는 내용의 인쇄물 몇 장을 놓았다. 그녀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접근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빨리 집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로 우선 허기나 구원받자."
내게 그렇게 물었던 그녀 자신은 정말 확신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확신은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현재완료형 확신일까?
아니면 이렇게 깊이 믿고 있느니 확실히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미래형 확신일까?
그런데 왜 나는 그녀의 '확신'이 좀 오만하게 보이고 무서워지기까지 하는 것일까?
대체 구원은 무엇일까?
삶이 끝난 뒤에는 몸도 영혼도 그저 흙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면, 그것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본이 안되어 있는 것일까?
흙도 영생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
"······"
내가 답을 할 수 없는 그녀의 질문들이 주어질 수 있는 기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다음번 슈퍼에 올 때는 다른 쪽 주차장에 차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2009.11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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