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없는 동안 나의 토요일 일과는 단순하게 정해져 있다.
우선 아침 새벽에 일어나 골프를 치러간다.
이곳에서의 골프는 한국에서 상상하는 고비용 스포츠의 상징이 아니다.
내가 가는 골프장은 시립인데다가 카트 CART 를 타지 않고 걷기때문에
한국의 당구치는 비용보다 저렴하다.
나의 골프 실력은 '종합무술의 달인'의 수준이다.
땅을 헤치고 허공을 가르는 스윙이 예측불허에 변화무쌍하다.
때문에 연못 속으로 잠수 시켜 놓은 공과
수풀 속으로 들여보내 은폐와 엄폐를 철저히 시켜놓은 공이
샌디에고 생활 2년 반만에 수백 개에 이른다.
골프 후 같이 시간을 보낸 멤버들과 맥주 한 잔을 곁들인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고 나 홀로 산으로 향한다.
꼭 산이 아닐 경우도 있다.
계곡이나 바닷가의 숲 속을 걸을 때도 있다.
아내가 없는 동안에는 조금 힘든 코스를 택하고 있다.
산행 시간은 3-4시간 정도.
나른해진 상태로 집에 돌아오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이번 주의 목적지는 ELLIE LANE TRAIL.
2주 전에 다녀온 아이언 마운틴 IRON MOUNTAIN과 코스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TRAIL이다.
계곡으로 들어가 다소 경사진 두 개의 산을 넘는 코스이다.
책자에 3시간 반 정도의 예상이 시간이 나와 있으니
실제로는 3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2주 전과 같은 장소에 주차를 하고 길을 나선다.
샌디에고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한 여름에도
날씨가 고르게 선산한 편이나 차로 30분 정도 내륙으로 들어온
이곳은 사막에 가까워 덥다.
그나마 습도가 높지 않은 날씨가 다행이다.
마른 먼지가 풀썩이는 길.
길가에 영롱한 빛으로 핀 크고 작은 들꽃.
말라가는 풀냄새.
혼자 걸어도 행복한 길이다.
오늘은 유난히 자유롭고 한가롭다는
생각을 해보다가 문득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손에 카메라가 없는 것이다.
아! 카메라를 잊고 안가지고 왔구나.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아쉬워하다가
이내 그럴 일만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카메라 하나 없을 뿐인데 이렇게 편안하다니!
지리산이나 덕유산을 종주할 때도
해외여행을 할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집밖에만 나서면 한시도 손에서 떼지 않고
들고 있었던 그 카메라.....
그랬구나!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뒷머리를 친다.
이른바 '중명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라지만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닌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나를 끌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찮은 욕심에 몸도 카메라도 풍경도 여행도
고단하게 만들었다는 반성이 뒤따르기도 한다.
빈손으로 길을 걸으니 땅도 산도 하늘도
소록소록 눈에 한 가득 들어찬다.
넓은 길은 소로로 바뀌며 연못을 지나
계곡을 거슬러 산으로 오른다.
산 하나를 넘고 잠시 식탄처럼 평평한 지대를 지나
또 다시 경사를 타고 두번째 산의 정상에 이르도록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2주 전 아이언 마운틴 길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정상에서 하산으로 틀었을 때야 비로소
웃통을 벗어제낀 건장한 체구의 두 백인 청년을 만날 수 있었다.
벗은 근육질의 몸이 땀투성이다.
그래도 밝은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며 정상이 멀었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도 산행길에 종종 이런 물음을 대할 때가 있다.
대개 힘이 들어 그런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짓궂은 대답을 해준다.
"유 아 올모스트 데어. 온리 투 아워즈.(YOU ARE ALMOST THERE. ONLY TWO HOURS.) "
"투 아워즈?" 과장된 표정과 음성으로 나의 농담을 받은 그들은 낄낄거리며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혼자다.
길은 적막하다. 가끔씩 저 혼자 놀란 도마뱀이 바쁘게 지나간다.
"야 이놈아 천천히 가라. 너한테 관심없다."
혼잣말을 중얼거려본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곳인가 주위를 둘러보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저 끝에서 막혀 있을 것 같아도
그곳에 다다르면 또 어딘가로 방향을 틀며 이어지는 길은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는 새를 닮아 있다.
삶의 어느 순간에도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길이란 원래 많은 사람의 발걸음으로 생겨난 것이다.
앞선 발자국을 믿으며 사는 일도 일단은 굳세게 걸어볼 일이다.
샌디에고의 공기는 매우 투명하다.
능선에 앉아 눈을 들면 저 멀리 아스라한 곳까지 선명하게 보이다.
눈이 상쾌하다. 베낭에서 얼려 가지고 온 생수를 꺼내 마시니
가슴 속도 시원해진다.
(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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