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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휴지걸이 혹은 나누나누

by 장돌뱅이. 2013. 7. 18.

자카르타에는 휴지걸이가 없다?
90년 초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근무를 했다. 그곳에 공장을 짓고 관리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맡은 팀원 중의 일부가 먼저 인도네시아로 떠난 뒤 한국 회사의 뒷정리가 남은 나는 2달이
지나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
 


*위 사진 :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보로부두르사원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수카르노하타 공항에 도착하던 날,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환영 파티가 있었다.
한국음식점에서 일인당 의무정량인(?) 세 병씩의 소주를 ‘깐’ 뒤에 한국에서 하던 대로 가라오케의 폭탄주와
호텔의 바에서 입가심까지
수차례의 술판이 이어졌다.
 


*위 사진 : 90년대 초 발리 부두굴에서

그 날 희미해져가는 취기 속에서 내게 인상 깊게 박힌 것은 앞서 도착한 직원들의
현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었다. 대개 “여기는 말이야” 혹은 “얘네들은 말이야”로
시작하는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추가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성하고 다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곳 현지인들이 얼마나 느리고, 게으른가,
얼마나 ‘하이바’(머리)가 늦게 도는가,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무책임한가 등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외국생활은 물론 방문도 처음인 나로서는 그들처럼 2달이 지난다 해도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들 정도로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직원들 중의 일부는 술이 취하면서 식당과 술집 종업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는 운전사에게까지 거친 말(물론 한국말)을 퍼붓기도 했다.
“알아듣건 못하건 무조건 욕은 하지마라.”
숙소롤 돌아오는 차안에서 내가 취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내뱉자 누군가 비슷한 음성으로 대꾸를 했다.
“장돌뱅이님도 여기서 두 달만 살아보소. 그러면 우릴 이해할낍니더.”

두 달 뒤에 내가 그들과 같아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를 추켜세우는 말이 되고
그들과 같아졌다면 나 역시 ‘일방통행’적 사고에 동참한 꼴이 되므로
어느 경우나 소망스럽지 못한 것 같아 나의 변모 여부에 대해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위 사진 : 90년대 초 발리에서

그렇지만 두 달 '현지선배'의 그들 중 누군가가 가르쳐준 ‘해박한’ 현지 지식 한 가지는
지금도 아내와 나를 웃게 만든다. 당시에 아내와 딸은 두 달 뒤에 인도네시아로 오게 되어
있었다. 나는 식구들이 합류했을 때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지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들을 최대한 확보하여 두어한다는 의무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가장 염려스러운 몸이 아플 경우에 대비하여 유명 병원의 위치에서부터
딸아이의 학교, 대사관, 한인 슈퍼 등등에 대하여 틈이 나는 대로 조사하고 답사까지 했다.
현지인들과의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생존형 수준’의 인도네시아어 공부도 해두어야 했다.

한국에는 있으나 자카르타에는 없는(혹은 귀한) 일상용품들에 대한 조사도
그중의 한가지였다. 아내가 올 때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와중에 앞서간 직원 중의 하나가 내게 한 가지 귀띔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같은 이유로 2개월 동안 열심히 조사해 본 결과
자카르타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이상하게도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걸이는 없다고 했다.
(그가 많고많은 일상용품 중에 왜 하필 휴지걸이를 알아보았던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이다.)

휴지걸이?
대형 쇼핑몰이 그리고 가정용품만을 파는 곳도 당시의 한국보다 더 많이 있던
자카르타에서 왜 하필 그게 없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 역시 단순히
그 말을 믿었다. 그리 생각한 탓인지 가정용품몰에 가서도 휴지걸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내가 인도네시아로 가지고 온 휴지걸이는 버릴 수도 없어 3년 뒤
그대로 한국으로 가지고 왔다. 세를 얻어들어간 집에 이미 설치된 휴지걸이가 쉽게 망가거나
유행을 타는 물건도 아니거니와 가정용품의 가게에는 그런 물품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아마 아내와 나는 서울 - 자카르타를 연결하는 항공기에 휴지걸이를 가지고 왕복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내게 정보를 준 그의 마음은 순수한 것이라 믿는다.
앞선 자신의 경험으로 나를 돕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내게 말을 해줄 때 ‘내가 본 한도 내에서는’ 이라는 말을 빼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카르타 도착 첫 날 내게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강의’를 해준 직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누나누! 샌디에고!

*위 사진 : 샌디에고 집 앞 도로

“나누나누!”는 오래된 미국의 텔레비전 코미디극 「모크와 민디(Mork and Mindy)」에
나오는 외계인의 인사말이라고 한다. 샌디에고에서 이제 막 생활을 시작한 아내와 나도
같은 ‘외계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글의 제목으로 그 인사말을 빌려왔다.

이곳에도 한인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생활에 초보인 내게 미국의 이모저모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명해주고 알려준다. 개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있고 십여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휴지걸이’ 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미국애들은 우리와는 달리 북향집을 좋아해.”
(햇빛이 들지 않는 북향집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라스베가스의 치안은 사실 마피아가 담당하고 있지. 사고가 나면 사람들이
안오니까 마피아들이 자신들이 하는 카지노사업을 지키기 위해서도 일반 범죄
방지에 열성적 이라니깐. 경찰은 그저 교통정리만 한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더 안전한 곳이야.”
(라스베가스의 비즈니스와 치안을 정말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어떻게 ... 그래서 라스베가스의 범죄율은 실제로 다른 곳보다 낮은 것일까?)
 

 


*위 사진 : 연말 휴가에 다녀온 미국 내륙 사막지대.

연말 휴가를 기해 아내와 딸과 함께 첫 미국 여행을 떠났었다.
샌디에고에서 출발하여10여 일 동안 엘에이-라스베가스-데쓰벨리-불의계곡-
그랜드캐년- 세도나를 돌아오는 3천5백 킬로의 여정이었다.
그 여행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미국에게 대해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미국은 크고 넓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위 사진 : 그랜드 캐년


*위 사진 : 세도나의 풍경

목적지까지 이르는 거리가 멀었고 도시와 도시간의 거리가 ‘징그럽게’ 멀었다.
그리고 도시 내부에서 마을과 마을이, 마을 내부에서도 집과 집, 집과 상점, 학교 등의
일상 생활공간과의 거리가 멀었다. 도시 자체가 차량 이동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는 듯 했다.
미국에서(서부 지역이 특히 심하다고 하던가?) 대중교통의 존재가 미약해진 이유는
거대 자동차 자본의 담합 때문이라고 한다. 1940년대 말 자동차 회사들은 전차 회사들을
사들여 전차의 궤도를 걷어 내버렸다. 자신들이 생산하는 차량을 팔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철도회사인 앰트랙 AMTRAK은 만성 적자의 늪 속에 빠져 있다고 한다.

몸무게 100키로도 나가지 않는 한 사람의 이동을 위해 그 열배가 넘는 무게의 자동차가
출동해야만 하는 사회가 미국인 것이다. 미국 프리웨이의 카풀래인(CARPOOL LANE)을
달릴 수 있는 조건은 두 사람 이상만 타면 된다. 그 결과 세계 인구의 5퍼센트도 안되는
미국인들이 세계 석유소비량의 4분의 1을 소비한다고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진짜
이유가 석유 자원의 확보에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자동차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미국을 보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도로가 여유롭고 자동차 문화가 오래 돼서 그런지 운전 매너들은 좋았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일단정지”에 해당하는 “STOP” 사인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정지선에서는 운전자마다 2-3초간 완전정지를 한 후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출발을 하였다.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라 하더라도 먼저 정지선 도착한 순서대로 출발을 하기에
사거리 한복판에서 차들이 서로 엉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차량의 이동이 거의 없는
한 밤중에 혼자 지나는 차들도 정지선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듯 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것은 의외였다. 자연적인 동물과 식물들의 보호에는
그토록 엄격하면서도 쇼핑몰마다 비닐봉투를 무료로 사용하고 모든 쓰레기를 비닐봉투에만
담으면 문제될게 없었다.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장 옆에 재활용품을 버리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냥 일반쓰레기 통에 버려진 재활용 가능품들이 많았다.
부엌의 싱크대에는 음식물 분쇄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음식물 찌거기들을 바로 갈아서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별도의 정화설비를 통과하게 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빨래를 널지 않는 것도 특이 했다. 빨래는 세탁 후 별도의 건조기에 넣어 말리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는 듯 했다. 맑고 강렬한 사막의 햇빛을 왜 이용하지 않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빨래를 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미관상 안된다고 사람들이 알려주었지만) 관리실에 물어본다고 해놓고서 아직 묻지 못했다.

샌디에고에 국한 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못하고 스페인어만 한다고 해도
일상 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보였다. 영어로 소설을 쓰거나 캘리포니아 주지사나
CIA국장을 만나고 씨엔엔과 인터뷰 하는 일이 일상이 아니라면 말이다.
멕시코 국경과 가까워서인지 식당과 쇼핑몰, 세차장 등 주로 ‘몸으로 때우는’ 현장은
히스패닉계의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케이블 텔레비전의 방송도 스페인어 방송이
따로 있었고 오바마와 힐러리가 맞붙은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BILINGUAL”에 대한 후보들의 의견을 묻는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던 곳과 다른 것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도 ‘외계인’으로서의 나와 아내와 생활을
규정지으며 우리가 깨우치기를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휴지걸이 혹은 나누나누
미국의 버디해킷(BUDDY HACKETT)이라는 코미디언이 오래 전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코미디언답게 중국 정치지도자에게 손을 흔들며 “나누나누”라는 인사를 던졌다.
너무 진지한 중국 지도자들의 분위기를 바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그 뜻을 묻자 장난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버디해킷은 그것이
최신 유행의 미국 인사말이라고 둘러댔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중국 정치가들은
버디해킷을 만나기만 하면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나누나누” 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언제까지 될 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국, 아니 샌디에고에서 아내와 함께 하는 생활과 여행을
이곳에 글로 써보려고 한다. 염려스러운 것은 혹시 나도 ‘자카르타의 휴지걸이’처럼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중국을 방문한 미국인 코미디언처럼 없는 나누나누를
있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그런 ‘미필적 고의’가 쉽사리 통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분명 필요한 것이겠지만 자신만의 시야에 갇힌다면 못 보는 것 또한
많을 것이다. 능력에 벗어난 깊이와 폭을 탐하기보다 우선은 피상적인 것들이라도 성실하게
받아들이자는 다짐을 해두어야겠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2008년 초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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