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한번 읽었다.
아내와 함께 하루에 3장씩을 번갈아가며
소리 내어 읽다보니 대략 2년 정도가 걸렸다.
신약을 먼저 읽고 구약을 나중에 읽었다.
가끔씩 빼먹을 때도 있었지만 아내가 한국에
머물러 헤어져 있을 때도 전화로 서로의 진도를 확인하며
가급적 잊지 않으려고 했다.
오늘 낮 구약의 마지막을 읽고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작은 성취감과 함께 꾸준함이 만드는 결과가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솔직히 성서의 내용은 어려웠다. 믿음의 깊이도 얕은데다가
성서가 쓰여진 배경과 그 시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지하다보니
상식의 선에서 이해가 가는 일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그냥
읽는 행위 자체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미를 깨우치진 못했다하더라도 아내와 함께 성서를 읽은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평화롭고 고즈넉한 시간이어서 좋았다.
군대 시절 다분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어본 뒤로,
어쨌거나 천주교신자가 되어 다시 읽어본 성서
- 어쩌면 성서는 믿음의 기록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인간의 배반의 기록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덴동산의 과실을 훔쳐 먹은 것을 시작으로
인간은 늘 신의 짝사랑을 외면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신은 오래 전 혹독한 노동과 폭력의 땅으로부터 인간에게 해방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인간은 걸핏하면 가던 길을 멈추고 불평을 해댔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를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구약 전체는 그런 인간에 대한 신의 안타까움과 절규로 가득해 보였다.
세상은 여전히 하늘의 뜻과는 다른 모습이고
그 속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도 여전해보인다.
아내와 읽은 구약 말라키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고 말한다.”
새해부터 아내와 다시 신약을 읽기로 했다.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그분보다는
동정 마리아에게 태어나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그분이
세상에서 걸었던 길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보고 싶다.
결국 그가 보여준 인간을 향한 짝사랑의 무대는
먼 천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한가운데일 것이니까.
아직 쓱스럽긴 하지만 성경을 읽는 동안만큼이라도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해묵은 그의 짝사랑에 가만히 손을
흔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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