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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부활절

by 장돌뱅이. 2013. 7. 26.

비틀거리며 걸었던 거친 언덕길
그는 봄꽃 흐드러진 길을 따라 내려가지 말고
아직 올라오라고 한다.
언덕 아래 세상
그를 못 박고도 유구한 전통처럼 
횡행하는 찬바람 속을 걸으라 한다.
빛과 생명의 탄성이 아니라
어둠과 죽음을 거부하는 아우성으로.

올 2월 한신대학교 졸업식에서
도올 김용옥교수가 한 기조연설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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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적 근간을 마련한 죤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교회에는 진짜 교회가 있고 가짜 교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와 가짜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의 해답은 매우 명료합니다. 관용을 할 줄 아는
교회만이
진짜 교회이고, 관용을 할 줄 모르는 교회는 가짜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말씀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율법적
가혹함이 아닌 관용이요, 이방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신봉하는 에클레시아의 사람들이 관용을 모르고,
독선과 배타와 증오와 분열과 훼방과 시기만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저 도올의 말이 아니라 서구 근세사상을 형성해간 모든 기독교사상가들의
호소입니다. 로크의 관용론이 의회와 정치권력을 분리시켰고, 명예혁명을 성립시켰고,
권리장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격발시켰고 미국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교회는 명예혁명 이전의 수준도 안 되는
조잡한 배타론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로크가 말한 “관용”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관한 관용입니다.
그리고 이 관용은 당시의 정치권력에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영국교회에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로크의 관용의 개념이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대한 관용까지도 포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은 유신론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근세 과학적 이신론(理神論)의 한 변형태일 뿐입니다. 무신론자라 해서 그 모두가
하나님을 저버리는 방종한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경건한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경배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의 논변은 또다시 신학적 논쟁의 파장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의 해석이, 신·구약을 막론하고, “사건”으로서 우리의 현재적 다자인
(Dasein)의 삶의 지평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민중신학의 논리를 확인하고자
할 뿐입니다.

 (...)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민족의 미래와 더불어 가야 합니다. 종교가 하나의 민족을
위하여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 교회가 처한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고
글로발라이제이션이나 네오리버랄리즘을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요 무지요 타락이요
부패입니다. 글로발라이제이션의 보편주의를 말하면서 제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고,
제 민족의 타민족에게로의 종속을 정당화 시키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재차 불러
일으키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신앙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까? 현 남북 간의
긴장조성의 현실태는 우리 민족이 일으킨 일도 아니요, 민중의 바램도 아닙니다.
남북한의 소수 정치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이기적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조작해낸
불행한 정치산물일 뿐입니다. 그 산물에 대해 강대국들은 박수를 보내고 있지요.
불행하게도 한국의 보수기독교는 남북화해의 최대걸림돌 노릇을 하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시대에도 예수를 비방하는 자들이 끄떡하면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정의로운 생각을 하는 자들을 향해 끄떡하면 “빨갱이”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지요. 그런데 나대는 “빨갱이 응징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대형
기독교교회의 목사·장로·권사·집사인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 또한 무시 할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善待)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우리가 북한사람들이 어떠한 바보스러운 짓을 한다 해도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선대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용정신을 가지고 있지 아니 하다면 어찌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이까?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 마치 독실한 기독교
인들의 정치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결국 한국기독교의 최대의
자멸함수가 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제 외침은 예레미아의 비통한 애가보다
더 비통하게 메아리칠 것입니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그 멸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 수유리 한신동산의 본관건물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장공 선생님의 매우
힘찬 글씨가 목각으로 걸려 있습니다.

 慕義如飢渴

 그런데 제가 아는 바로 이것은 중국고전에서 따온 문구는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의 말씀의 옛 한역 성서문구에서 따오신 말씀 같은데 그것을
그냥 한학자인 저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정의로움을 사모하기를 굶주린 듯, 목마른
듯하라.” 라는 말씀이 됩니다. 아마도 장공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 싶어하신
것은 이러한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기를…”이라고 말씀하지도 아니 하셨고,
“하나님의 정의를 사모하기를…”이라고 말씀하지도 아니 하셨습니다.
오직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사모하기를 굶주린 듯, 목마른 듯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도 종말론적 함의를
뜻한다기보다는,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정의로운 개인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의견을 모읍니다. 개인의 정의로움과 사회의
정의로움이 일치될 때 비로소 천국의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결국 법정용어로서 하나님의 죄지은 인간에 대한 관용과
용서의 판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결국 사회정의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사회정의야말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입니다.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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