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다 예상치 못한 악천후에 휘말린다. 대개의 경우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번쩍이는 번갯불 사이로 거센 빗줄기가 드러난다. 비행기는 바다로 추락하고 설상가상으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쳐온다. 의식마저 희미해져 가는 주인공의 얼굴이 FADE-OUT된다. 다음에 이어지는 화면은 언제나 맑고 잔잔한 해변가에 의식을 읽고 쓰러져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신성일・엄앵란의 해변 달리기’ 장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는 영화의 장면은 언제나 이렇게 상투적이다.
좀더 다른 방식은 없을까? 영화 『SIX DAYS SEVEN NIGHT』의 해리슨 포드가 그랬고 『캐스트 어웨이(CASTAWAY)』의 주인공 ‘척’(톰 행크스)도 그렇다.
표류하기 전까지 그는 일분, 일초를 다투는 택배 회사의 직원으로 동분서주하는 보습을 보여준다.
시간과 속도는 그의 삶을 장악한 주인이며 그는 일에 중독된 자본주의적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크리스마스 밤마저도 일을 위해 접어둔 채 야간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하게 된다.
무인도에 철저히 고립된 그에게 남은 것은 이혼서류,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피겨 스케이트 한 켤레, 그리고 흰 색의 배구공 따위의 택배 운송물들뿐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 애인이 선물로 준, 그녀의 사진이 든 자그마한 시계 하나가 있다. 시계는 그가 처한 상황을 암시라도 하듯 고장나 멈춰있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그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군분투한다. 배구공엔 얼굴을 그려놓고 친구로 삼는다. 스케이트 날은 때론 칼이 되고 때론 도끼가 된다. 드레스는 찢어 고기를 잡는 어망으로 쓴다.
언젠가 어느 소설에서나 영화에서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듯한 표류자의 모습이다. 끝내
불을 피우기까지 그의 무인도 생활은 처절하기보다는 흥미롭고 재미있다. 자살을
꿈꾸기도 하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4년을 무인도에서 살아낸 그는 어느 날 파도에 휩쓸려온 플라스틱 조각을 돛으로 만들어 섬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정작
무인도의 표류보다 처절하고 참담한 것은 다시 돌아온 이후의 현실이다. 소속회사 회장이 베푼 성대한 환영식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옛 애인을 잃은 상실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무인도에선 눈에 보이는 곳에 애인의 사진을 놓아두고 배구공으로 만든 가상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탈출과 재회에 대한 꿈이라도 키울 수 있었으니까. 톰행크스의
‘모노드라마’만으로도 속도감 있고 경쾌하게 진행되던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못다한 옛 애인과의 사랑이 화면을 채운다. 그리고 참신함 대신 의례적이고 공식적인 귀결이 따라온다. 야반도주라도 할 것 같은 기세이던 ‘척’과 그의 옛 애인은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고 ‘척’은 애인이 그때까지 보관해 둔, 둘만의 추억이 서린 자동차를 몰고 길을 떠난다. 우리의
일상은 종종 얼마나 무료하며 권태로운가. 삶은
그런 일상을 벗어난 저 먼 곳의 솜사탕 같은 뜬 구름이 아니라 상투적인 일상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아야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척’의 교과서적인 발언도 그다지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은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지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옛 애인을 보내야 하는 현실에서 ‘척’은 기죽지 않고 그래도 희망을 말한다.
‘나는 또 살아낼 것이다. 내일 파도엔 또다시 무엇이 밀려올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이
진부하고 흔해빠진 희망의 표현이라도 가슴을 울린다. 희망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영화의
마지막,
‘척’은 드넓은 벌판에 서있다. 그의
앞에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끝 간 데 없는 길이 희망처럼 누워있다.
* 이 영화에서 주인공 ‘척’이 근무하는 택배회사인 Fedex는 잘 알려져 있는 실재 회사이다. 이 영화는 Fedex의 홍보용 영화로 써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혹은 광고료를 지불했는지 모르겠지만 Fedex는 신속한 운송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회사로 그려져 있다. 특히 표류 기간 중 배달할 수 없었던 고객의 오래된 탁송물을 배달해 주며, 배달에 대한 책임감 역시 무인도에서 자신을 지탱해 준 힘이라고 주인공이 독백하는 장면은 신대륙에 발을 디딘 콜럼버스에게 탁송물을 배달하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웃긴 동종 택배업체인 DHL의 TV 광고보다 더한 광고성이 엿보인다.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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