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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싱가포르

싱가폴과 자카르타1

by 장돌뱅이. 2013. 10. 19.

싱가폴항공을 탔다. 저녁 비행기를 탄 적은 있지만 한밤중인 00시20분에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보기는 처음이다. 아침 6시경에 싱가폴에 도착할 예정이다. 
한국과는 1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7시간의 비행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의자에
묶여 공중에 떠있는 처지에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잠을 자거나 여행지에 대한 상상을 해보거나...... 그러다 시나브로 잠이 들었다.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창이공항에 안착했다.
택시를 타고 아직 본격적인 아침이 시작되지 않은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숙소인 맨더린 오리엔탈 싱가폴 MANDARIN ORIENTAL SINGAPORE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체크인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직원은 친절하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예약된 오션뷰는 오후 2시에 체크인이 가능하나 시티뷰로 바꾼다면
지금 당장 방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시티뷰로 이튿날부터는 오션뷰로
합의가 되었다. 불만 없는 거래였다.
 

 


*싱가폴 만다린 오리엔탈(출처:호텔 홈페이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잠부터 청했다. 나는 곁에서 책을 읽었다.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아내는 눈을 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어? YHA(유스호스텔)가 아니니 잠도 잘 오네.”
지난 뉴질랜드여행에서 우리가 묵었던 (아내와 딸아이의 뉴질랜드 여행에 대한 유일한
불만이었던^^) YHA의 ‘후유증’은 싱가폴까지 따라왔다.

점심은 게요리로 하기로 했다. 마침 호텔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에스플러네이드 몰
ESPLANADE MALL 에 유명 게요리 음식점 중의 하나인 노사인보드 NO SIGN BOARD 가
있었다. 노사인보드의 게 요리는 5년 전 싱가폴 여행시 아내와 매우 만족했던 식당이다.
물론 그때는 에스플러네이드의 분점이 아닌 겔랑 GEYRANG 의 본점이었다. 
 

 

 


*위 사진 : 2007년 싱가폴 여행시 접한 게요리. 위로부터 화이트크랩, 칠리크랩, 블랙페퍼크랩.

직원이 가져온 메뉴에는 예전과는 다르게(예전에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기억과는 다르게)
세 종류의 게가 올라있었다. 제일 저렴한 것은 스리랑카크랩(키로당 45불이었던가?) 이고,
그 다음이 호주산, 그리고 가장 비싼 것이 알래스카크랩으로 킬로그램당 무려 200불이었다.
호주산은 그 중간의 가격이었으나 계절에 따라 나오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는
스리랑카이나 알래스카였다. 우리는 헷갈렸다. 부실한 기억 탓이지만 예전에 겔랑 본점에서는
게의 종류가 아니라 그냥 요리방법만 선택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원에게 두 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스리랑카는 작고 알래스카는 크다는
것이었다. 직원이 손으로 알려주는 동작으로는 크기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사진이 첨부
되지 않은 메뉴였다. 게다가 아직 좀 이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주위에 사람이 없어 실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먹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직원은 알래스카크랩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걸 권하겠냐고 했더니
역시 알래스카라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이렇게 비싼 것 같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비싸졌냐고 했더니 알 수 없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러면서 다시 알래스카를 권했다.

“물가가 그 사이에 이렇게 올랐단 말인가???....”
말끝을 흐리며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얼마 전 여행에서 유스호스텔이라는 저렴한
숙소를 이용했다가 아내로부터 심한 불만을 들은 지라, 음식마저 '쫀쫀하게' 값싼 쪽으로
찍었다가 자칫 어린애 손가락만한 것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이건 ‘피박에 이은 광박’이
될 소지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아내는 나를 구원해(?) 주었다.
“그냥 스리랑카로(45불짜리) 먹자. 맛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키로에 200불이라니!”

그러나 요리가 나온 다음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것이, 그리고 지난 번 여행에서 먹은 것이
알래스카가 아니라 바로 스리랑카크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리랑카크랩은 우리가
알고 있는 머드크랩 MUD CRAB과 같은 것이었다. 노사인보드처럼 유명 음식점에서
고의적으로 비싼 음식 쪽으로 선택을 유도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이날 직원의 태도는
다분히 그런 의도가 있어보였다.

두 사람이 37만원을 냈다던가 메뉴판을 보지 않고 주문을 했다가 700불을 냈다는
인터넷의 여행기는 아마 그런 직원에 때문에 생겨난 일일 것이다.
(물론 그 분들의 경험이 에스플러네이드의 노사인보드에서 경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행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노사인보드가 그런 방법으로 종종 여행자에게 바가지를
씌우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사실이라면 싱가폴에선 드문 일이다.)

게의 종류에 따라 큰 가격 차이가 있다면 사전에 말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식당 직원의 태도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미필적 고의’이거나 책임의 방기에 해당되는 행위이다.

식사를 하고 에스플러네이드의 안팎을 돌아다녔다. 거대한 두리안 형상의 지붕으로
마리나베이에 오면 지나칠 수 없는 에스플러네이드는 2002년에 완공되었다.
공연장과 전시관, 도서관을 비롯해 각종 상점과 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루프테라스에 올라 싱가폴강과 마리나베이의 일대를 바라보기도 했다.
바다 쪽으로 지난 여행 때에는 한창 공사중이던 호텔 마리나베이 샌즈
MARINABAY SANDS 가 그 사이 완공되어 우뚝 서 있었다.
세 개의 고층 건물로 이루어진 대형 호텔이었다. 그 세 개를 연결하는, 수영장과
공원이 있는, 배 형상의 옥상이 독특해 보였다. 다만 바다 쪽으로 툭 트인 풍경을
막고 들어서 만(灣)을 답답하게 만드는 그 위치가 좀 유감스럽게 느껴졌다.
호텔 앞쪽으로 대형쇼핑몰과 음식점이 있고 카지노가 있다고 했다.
이번 여행 중 이틀은 그곳에서 묵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여행에
체크인과 체크 아웃의 번거로움이 귀찮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마리나베이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길을 걷는데 문득 허전함이 느껴진다.
손도 허전하고 어깨도 허전하다.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카메라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는 일부러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직접적인 이유는
“카메라가 없는 아빠의 여행은 어떨까?” 하는 딸아이의 물음 섞인 권유에 있다.
그러지 않아도 아내와 ‘카메라가 과연 여행에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견을
나누어 오던 참이었다.

필름을 쓸 때부터 등산을 갈 때 배낭의 맨 상단부나 손에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카메라를 넣고 다녔으니 30년 가까운 습관이다. 더군다나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 일단 셔터를 많이 누르는 게 일종의 노하우처럼 권장되는 디지털카메라는
습관을 넘어 ‘카메라 중독’을 부추기기 쉬운 도구이다.

모든 중독이 문제인 것은 기계적인 단순한 반복이 생각에 앞서고 상식적인 판단을
압도하는데 있다. 대상을 찬찬히 보기에 앞서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행위도 그와 같다.
뭔가를 흘리고 온 듯한 허전함은 그렇게 카메라의 부재 때문에 생겨난 금단현상이다.

에스플러네이드를 나와 마리나스퀘어 MARINA SUARE 로 들어갔다.
기왕 호텔 밖으로 나온 김에 오후동안 일대의 쇼핑몰을 돌아보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가급적 호텔 안에서 보낼 작정이었다. 마리나스퀘어는 고급 유명 상품보다는
편안하고(?) 실용적인 상품들이 주종을 이루는 듯 했다. 우리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상점과
상품 구경도 하며 걸어다녔다.

싱가폴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상표는 현지 상표인 찰스 & 키스 CHARLES &KEITH 이다.
중저가의 실용적인 가방과 구두 제품이 주류이다. 아내는 딸아이를 위한 것을 고르면서
즐거워했다. 마리나스퀘어에서 선택시티몰 SUNTEC CITY MALL 로 발길이 이어졌다.
4백여 개의 상점이 들어와 있다는 선택시티몰의 규모는 엄청나게 넓었다.

도중에 커피를 마시며 쉬기도 했지만 쇼핑몰에서의 아내의 체력은 놀랍다.
지리산을 다닌 내가 쇼핑몰에서 보낸 몇 시간을 힘에 겨워하는 것이 엄살이라면
쇼핑몰을 줄기차게 걸어다닐 수 있는 아내가 ‘까짓’ 지리산을 힘들어하는 하는 것도
내겐 엄살로 보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들인 시간과 발품에 비해 정작 손에 쥐는
구매품이 별로 없는, 가장 비효율적인 ‘시간죽이기(보내기가 아닌)’라는 나의 투덜거림에
아내는 또렷한 대항논리를 가지고 있다. 꼭 사지 않더라도 상품의 디자인이나 색상, 가격
등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도 즐거움이라는 논리다. 그것은 일테면 내가 책방에서
이책저책 뒤적이다가 마지막엔 한두 권 사들고 나오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인 ‘시간죽이기’의 구매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장돌뱅이의 경제적인 능력 때문이라는 결정타로 나를 제압한다.

선택시티를 나와 정한 방향 없이 길을 걷다보니 래플스호텔 RAFFLES이 나왔다.
내겐 오후 내내 쇼핑몰이라는 ‘험산준령’을 넘는 고행의 길이었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랐다. 호텔 앞마당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어느 덧 저녁 어스름이 천천히 깔리며 호텔 창문마다 불빛들이 또렷해져왔다.
불빛이 드리운 방마다 우리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어디론가부터 떠나온 사람들이
머물고 있을 것이다. 열대 기후와는 다른 의미의 따뜻함이 그런 상상과 함께 피어올랐다.
아내와 나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들처럼 어둠과 함께 스러지고 또 살아나는 호텔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저녁이면 어디서 산들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자
머리카락을 간질이듯 한 줄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래플스시티 RAFFLES CITY 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 아내와 함께 거쳐야 할
마지막 쇼핑몰이었다. 싱가폴은 가히 쇼핑몰로 이루어진 도시 같았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늦은 저녁을 먹으로 강변으로 나왔다. 에스플러네이드 옆에
있는 야외 호커 센터인 마깐수뜨라 글루턴스 베이 MAKANSUTRA GLUTTONS BAY에
자리를 잡았다. ‘마깐’은 먹는다는 뜻이고 ‘수뜨라’는 비단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이곳은
‘포장마차’의 집결지이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선 음식점들은 모두 싱가폴에서는 이름난
맛집들이라고 한다.  식탁은 공용으로 쓰지만 음식과 음료는 개별적인 상점에서 사야 하는
야외 푸드코트이다. 음식은 사떼와 해산물, 국수와 볶음밥, 바베큐 등 다양한 종류가 있고
술은 맥주만 있다. 고층건물에서 떨어져 강물 위에 흔들리는 불빛과 잔치집 분위기의
떠들썩함이 음식의 맛을 돋구는 양념이 되는 곳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카메라 없는 하루 - 습관은 접착제처럼 끈질겼다.
하지만 그것을 털어내고나자 숙소에서 거리에서 식당에서 커피점에서 생겨난 시간의
조각들은 모여 커다란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풍경은 작은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감으로 살아서 들어오는 듯 했다. 아무래도 그동안 부질없이, 혹은 너무 고단하게
카메라만 부려먹은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보았다.
앞으로 모든 여행에서 카메라와 단절을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절제는 여기에도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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